연재 1

어릴 때부터 의아한 게 하나 있다. 화장실은 왜 화장실인가. 화장실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아주 고약해서 비밀스럽고 사적인,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간이라면 무릇 하루에 두세 번씩은 요란하게 해치우는, 똥오줌을 누는 일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화장실에서 간혹 화장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는 있겠지만 대다수는 다른 일로 바쁘다. 그나마 화장과 유사한 일은 용변 직후의 절차일 것이다. 입술과 항문은 해부학적으로 동일한 괄약근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립스틱을 바르는 일과 뒤처리를 동일시하는 건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화장실에게 원래 이름을 찾아주어야 할까? 뒷간처럼 더러운 것을 최대한 숨기고픈 마음을 담아 부를 수도 있고, 변소처럼 그곳에서 하는 일을 담백하게 기술할 수도 있다. 요즘처럼 솔직함이나 진정성, 꾸미지 않은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을 칭송하는 시대에는 그냥 똥간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싶다. 용변과는 거리가 먼 화장을 끌어다 명명한 건 어쩐지 가식적이다. 화장실이라는 이름에 담긴 건 모두가 아는 비밀, 모순이자 위선이다. 그러나 그 위선이 곧 문명의 증표다. 뒷간이 화장실로 불리기 시작한 건 문명화 과정의 결실이다. 말 그대로 치장과 단장을 위한 공간을 일컫던 프랑스어 투알레트(toilette)에서 화장실(toilet)이 온 것처럼, 원초적인 무언가를 감추는 게 곧 문화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꾸미는 데 얼마나 진심인 존재인가. 아내와 나지막한 동네 산을 오르던 어느 가을날의 일이다. 우리는 꼭대기에 올라 숨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아내에게 정상석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자 아내는 가방에서 잽싸게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전화기만 챙겨 맨몸으로 오르던 나는, 물과 계란, 초코바 이외에 혹시 모를 사진 촬영에 대비해 화장품까지 챙긴 아내의 준비성에 한 번 놀랐고, 이제 아내가 최소한의 사회적 예의를 차리는 대상에서 나는 예외가 되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부부는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인 관계지만, 자식을 낳고 기르면 무언가 다른 관계로 변화하는 듯하다. 인간은 다른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알몸으로 나온다. 이러한 원초성이 문명 이전의 가장 원초적인 관계인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한다. 배우자가 인간에서 부모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확실히 사회적 관계보다 근원적인 무언가로 묶인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내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화장을 했으려나.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인간은 화장을 하고 옷을 입으니 말이다.

인간은 꾸밈으로 다른 인간과 묶인다. 꾸밈이 없다면 사회적 관계는 유지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트레폰이라는 한 남성의 실연 이야기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숙녀의 화장방」(The Lady’s Dressing Room, 1732)이라는 시의 주인공인 스트레폰은 연인 실리아가 몸단장에 다섯 시간이나 쏟은 나머지 기다리다 지쳐 그 방에 들어선다. 때마침 실리아와 하녀는 자리를 비웠고 비극은 시작된다. 화장방은 온갖 잡동사니로 난장판이다. 화장 도구는 각질로 떡지고 거울에는 코딱지가 튀었다. 빨래통에 담긴 악취나는 속옷 옆 스트레폰은 의문스러운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그것은 알고 보니 요강이었고 판도라의 처지가 된 스트레폰은 내용물을 보고(맡고?) 혼비백산 도망간다. 불쌍한 실리아는 화장실을 매우 현대적인 방식으로 사용했음에도 연인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스트레폰 역시 파국을 맞았는데, 여성 전체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린 것이다.

스트레폰은 몹쓸 상상력으로
모든 여자들에게 씰리아와 같은 역겨운 냄새가 날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혹시나 불쾌한 냄새가 어디서 날아오면,
여성이 근처 어디에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모든 여성들이 스트레폰의 이러한 상상에 다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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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국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스트레폰에게는 세 가지 잘못이 있다. 타인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간 잘못이요, 누구에게나 추한 모습이 있다는 진리를 부정한 잘못이요, 그 순간만큼은 추함과 관계 없을 다른 인간을 끌어들인 잘못이 바로 스트레폰에게 있다. 사람들은 흔히 헛된 꿈을 꾼다. 인위적인 거짓을 없애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허황된 꿈 말이다. 그러나 꾸밈 없는 인간은 누구와도 묶이지 못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사회는 기본적으로 꾸밈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에 따르면 화장을 포함한 모든 꾸밈(parure)은 “인간 영혼의 태생적 고귀함의 한 표시”이다. 화장은 자연스러움을 숨기기 위함도 과장된 껍데기를 앞세우기 위함도 아니고 오히려 솔직함을 드러내기 위한 행위라는 것이다. 애초에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인위일진데, 최소한의 인위인 꾸밈을 거부하는 자연은 곧 인간 없는 사회이다.

스위프트의 말마따나 “튤립은 똥밭에서 자란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크게 보면 우리가 항문으로 배출한 것들의 다른 모습이다. 이런 이유로 평생 금식을 하겠다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 내 앞에 있는 모습이다. 겉모습 이면에 숨겨진 허위를 고발한다는 주장은 사회를 망가뜨리는 허황된 잠꼬대와 같다. 꿈 꾸는 사람은 그 순간만큼은 꿈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꿈속에서는 생시를 말하는 사람만큼 우스운 사람이 없다. 이렇게 보니 꿈과 묶이라는 글자가 왠지 닮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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