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항복강도

우리는 시간의 모양을 상상할 수 없어서 직선으로 비유하곤 한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다. 흐르는 것인데 한 길로 흐르는 것이다. 갈라지지 않고 모이지도 휘지도 끊어지지도 않고 흐른다. 여기서 몇몇 사람은 태초의 유무를 두고 원점이 있는 반직선이냐 아니면 과거도 미래만큼 끝없이 소급한다는 직선이냐로 나뉘지만, 여전히 시간의 모양은 곧은 듯하다.

나는 이따금 시간을 만질 수 있다면 어떤 촉감일까 그려본다. 곧은 모양이니 단단할까? 아니면 흐르고 있으니 부들부들할까? 지루할 땐 한없이 늘어지고 정신이 쏙 빠질 땐 쏜살 같으니 함흥냉면의 면발이나 탱탱볼처럼 쫄깃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형상기억합금을 반례로 들 수 있다. 모양이 변한다고 반드시 부드러운 것은 아니다. 유리가 아주 느리게 흐르는 유체인 것처럼, 시간은 단단한 무엇일 수 있다.

이제 나의 관심은 시간의 물성 전반으로 확장된다. 시간은 어디까지 늘어날 수 있을까?

“파열강도는 재료가 파열되지 않고 압력을 견디는 힘의 크기를 의미한다. 이것은 주어진 두께의 용기를 파열하는 데 필요한 수압과 같다. 인장강도는 재료를 잡아당겨서 측정할 수 있으며 시편이 파열되기까지 필요한 최대 응력을 말한다.” (빛 가운데 걷기)

시간의 물성은 일종의 겹말이다. 사물의 고유한 성질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물과의 관계를 놓고 일정 시간 관찰해야 한다. 시간을 들여다보는 시간, 시간이 끊어지고 깨지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사건과 연관지으며 시간을 들여다보는 시간에 우리는 미래로 흐르던 시간을 잡고 과거로 구부린다. 과거에는 이런 미래를 보며 걸었지 하며 미래로, 다시 과거로, 미래로, 휘면서 시간은 일종의 용수철 같은 나선 모양으로 휘감긴다.

그러다가 툭, 시간의 옆구리가 터진다. 시간의 변두리가 늘어나다 못해 항복강도를 넘어서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지금 나를 덮치는 감각 속에서 어떤 연관도 찾지 못하고 조각난다. 우리는 이 순간을 언어로 어렴풋이 경험할 수 있는데, 이런 순간에 놓인 사람은 말을 잇지 못한다. 흐름을 나타내는 동사(움직씨)가 소멸된 언어는 무엇도 서술하지 못한다.

“싸구려 세제 냄새. 지름길. 굴착기 소리.”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

문제는 시간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 항복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시간을 시계로 달력으로 조각내도 항복강도를 측정할 도리는 없다. 그 순간은 메시아가 강림하듯이 “도적과 같이” 온다. 시간의 파열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시간을 휘지 않는 일, 들여다보지 않는 일, 눈물을 참고 말을 그치는 일이다.

“한 달 후, 4월 벚꽃이 만발하는 계절에, 노인은 내부의 소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생활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빛 가운데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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