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

다섯살 때였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하나 떠오른다. 무슨 잘못인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내가 큰 잘못을 했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 빗자루 들고 나 대신 바닥을 때리시며 크게 야단치던 때였는데, 나는 어머니의 고함과 서슬퍼런 빗자루에 놀라 엉엉 울면서 구석에 쭈그러져 있었다. 그때 따르릉, 하고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께서는 분노 모드를 일시정지하시고 전화기로 가셨다. “여보세요옹~?” 나는 평소 맑고 예쁜 어머니의 전화응대 목소리를 참 좋아했는데, 그때는 뭐랄까, 놀라웠다. 10초 전까지 나를 혼내시던 어머니와 지금 전화를 받는 분이 서로 다른 사람일까, 어쩌면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어머니 대신 나를 혼내고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저 전화가 영영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다.

목소리에도 화장이랄 게 있다면, 내 어머니께서 하셨던 건 분장에 가까웠다고 본다. 화장이 본모습을 보다 예쁘게 보이도록 하는 행위라면, 분장은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 하는 행위이다. 이 때문에 분장은 주로 연극 무대에서 배우가 아니라 배역이 보이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 화장의 기원은 분장이다. 화장이라는 행위를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외관을 꾸며 보다 나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화장은 분장에서 비롯되었다고, 인간의 외관(appearance)과 본질(being)을 구분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분장은 연극 배우들이 쓰던 가면이 얇아진 것이다. 가면은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이라는 장르를 처음으로 만들었던 테스피스라는 배우 겸 작가가 시작했다. 테스피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고대 그리스의 극예술은 합창 경연대회에 가까웠다. 그 시기의 축제는 누가 누가 신을 잘 찬양했는지, 그래서 우리 공동체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고르는 행사였기 때문이다. 그때 테스피스라는 괴짜가 등장해 최초로 “대답(ὑποκρίνειν)“이라는 역할을 도입했다. 합창단원 중 한 명에게 가면을 씌우고 가사 한 소절에 걸맞은 대답을 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 대답은 훗날 가사가 대사로 진화하는 계기가 된다. 가면은 왜 씌웠을까? 고대 사회에서는 배우와 배역을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디오뉘소스 신을 연기하는 테스피스가 디오뉘소스로서 말하는 것이지 테스피스로서 말하는 게 아니라는 표시가 바로 가면이었다.

가면의 발명으로 인간은 자유로이 악을 입에 올릴 수 있게 됐다. 이기적이고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행동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지만 누구도 공개적으로 해서는 안 될 범죄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무대에서 범죄를 저지르다가도 다시 동료 시민으로 기꺼이 돌아갈 수 있었다. 자신의 말이 얼굴에 달라붙어도 가면을 벗어버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가면은 프로소폰(πρόσωπον)이라 불렸는데 얼굴(ὤψ) 앞(πρός)에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가 그대로 이어져 고대 로마에서는 페르소나(persona)로 불렸다. 배우의 얼굴을 잊고 오직 목소리(sonus)만을 통해(per-) 배역에 집중하겠다는 관객들의 결의가 담긴 듯하다. 이 결의는 법 앞에 평등한 인격이라는 의미로 파생되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아무리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처벌을 마쳤다면 그 가면은 벗겨졌다고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20세기 심리학자 융은, 사람이 단일한 자아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천 개의 인격을 가졌다고 본다. 나를 혼내던 사람도 간드러지게 전화를 받던 사람도, 같은 나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 시대로 넘어가면서부터 배우는 연기의 늪에 빠져버렸다. 몇몇 배역이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행위로 인해 배역에게 머물러야 할 모욕이 배우에게 옮겨간 것이다. 연기자에게 명성이 부여되어서는 안 될 이유는 외관이 아니라 본질을 중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의 집정관을 지낸 철학자 키케로가 쓴 『의무론』 2권의 설명이다.

소크라테스가 훌륭하게 말했듯 영광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 말하자면 지름길은 자기가 남에게 보이고 싶은 사람으로 실제로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假裝), 공허한 과시, 거짓된 말과 표정으로 확고한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참된 영광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지만, 모든 거짓된 것은 마치 꽃처럼 빨리 시들고, 가장된 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
우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를 남에게 가장 쉽게 보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남에게 보이고 싶은 사람으로 실제로 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2.12.43.-2.13.44.

인간은 행하는 대로 된다. 그렇다면 신을 모방하기에도 벅찬데 저열한 배역도 마다하지 않는 배우는 엉망진창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당시의 극예술은 축제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평상시에는 숨겨오던 욕망을 분출하던 수단이었다. 그러니 대중은 배우라고 하면 추잡하고 방탕한 품행을 자연스럽게 연상했을 것이다.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수치의 대상이었고, 배우들은 노예처럼 취급되었다. 좋은 나라를 만들려면 극작가와 배우를, 연극 자체를 나라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 키케로가 그토록 칭송했던 플라톤의 이론이다. 플라톤이 아리스토클레스로 불리던 청년기에는 비극 경연대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던 작가지망생이었고, 그가 쓴 대화편들이 시나리오 같은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그가 펼친 모든 철학적 이론이 소크라테스라는 가면을 쓰고 전개되었다는 점은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키케로와 플라톤이 우리 어머니를 보았다면 뭐라 했을지 예상이 가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께 이들의 책을 추천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식에 대한 훈육과 성인으로서 타인에게 보여야 할 바람직한 태도 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여성의 난처함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들에게는 콧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말하면서 왜 자식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어린 시절의 고민이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이론화된 건 반가운 일이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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