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이가 고양이의 눈을 삼켰다고양이는 볕을 쬐고 있었다부엉이의 발톱이 고양이의목과 갈빗대 사이를 파고들 때고양이도 발톱을 꺼냈다죽음은 멀리서 생명을이미 바라보고 있었다고양이가 볕을 따라 여기에서 저기로옮겨갈 때 죽음은 사각도 없이생명을 감시하다가 소리 없이날아들어 낚아챘다부엉이는 발톱을 다듬었다고양이는 부엉이가 앉은 나무를날지 못할 발톱으로 긁었다고양이는 부엉이가 착륙할 때까지만 해도숨이 붙어 있었다부엉이의 발톱이 신경을 끊어목 아래는 이미 죽었지만고양이는 눈을 깜빡였다마지막 조감도를 기억하려고
[태그:] 시
미아
출근길 개찰구사람들이 흐른다삑 삑 우는 검표원부정맥을 알리는 기계의 울음정파를 알리는 텔레비전의 사인파한켠에 소용돌이“방화역으로 가려면 어디로“가야 하나요 말도 맺지 못하고무표정한 흐름을 맴도는 사람 한 명“여기로 가서 5호선”타야 한다고뒤로 손짓하면서 앞으로휩쓸려가면서안도하면서부끄러워하는
골골송
우리는 언제까지날짜를 셀까순간을 건너기도 이렇게 힘든데고양이를 보면서나는 생각했다가르릉 소리를 들으면서푸리에는복잡한 소리와 단순한 소리를 구분하고 복잡한 소리가 단순한 소리들로 구성된다는 복잡한소리를 했다 고양이의고운 저 소리도신디사이저건반 몇 개를동시에 누르면똑같은 소리가 난다는 소리다소리는힐베르트의 거리와제논의 순간을 넘어내게 닿아 귓전을 울린다울리면서 고양이 네가 죽을 때뚝그칠 것이다나는 왜 너의 장례를 치러야 할 운명일까
거품
시체가 된 너의 몸 너는 눈을 반쯤 뜬 건지 감은 건지 흐리고 웨트 블루의 피부 아래에는 검은 피가 흐르던 정맥의 흔적 네가 체했을 때 따주던 손톱 위 여린 살 바늘을 찔러도 얼어붙은 손끝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아름다운 네 얼굴에 이 따위 것들이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이편과 저편이 죽음만큼 가까운 거품이어서 표면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칼국수
거울을 안 본지 오래도 되었다 오늘 점심은 바지락 칼국수 홀로 온 손님도 반겨줄 만한 작은 가게를 찾아 왔다 그런데 이럴수가 저쪽 테이블에 회사 동료 세 명이 옹기종기 혼자 오셨냐는 걱정에 사람이 물려서요 라는 대답을 거의 쏟을 뻔했다가 김밥이 물린 탓이라 간신히 틀어막았다 어느 집 커피가 맛있더라 학원비 이야기 옆 부서 불륜 이야기 마요네즈 참치에 아스파탐…
소주 한 잔
취기가 오른다. 나는 나를 생각하고, 나는 내게 술을 사달라 조르고, 나는 나를 생각한다. 재영아, 소주 한 잔만 사주라. 나는 배운 게 이것뿐이라 이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나는 불운 앞에 발가벗고 있는데 주섬주섬 옷을 입으려니 어제 화장실 앞에 벗어둔 잠바, 청바지, 뉴에라 모자, 내의, 내의, 속옷, 냄새나는 속옷 가엾은 나는 씻고 나온 몸을…
씨
사물과 생명의 대비가 아름다운 시다. 사물을 알기 위해서는 쪼개야 한다. 이건 내가 늘 말하듯이, 원자론적 세계관에 적합하다. 원자는 고대 그리스어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아톰(atom)이니까. 사물은 쪼개도 사물이다. 다른 사물로 변할지언정 사물이 사물이 아닌 것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질량과 에너지가 실은 하나라는 아인슈타인의 발견도 놀랍지 않다. 그 모두가 사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을 알기…
겨울 지나 봄
얼었던 분수가 터졌다 버들 여린 잎 돋아나고 목련은 벌써 떨어지기 시작해서 목놓아 봄 부르는 새된 소리들 남해는 벚꽃이 한철이라는데 이곳은 아직 꽃망울이 수줍다 어디는 겨울, 어디는 봄 벛꽃의 꽃말은 부끄러움 먼 흑토의 밀밭에서는 수많은 세계가 사그라들고 나는 연못가에 앉아 벚꽃을 본다 평화, 사랑, 인류 이따위 거창한 것들을 떠올리면서 결코 닿지 못할 길을 닦으면서 빼앗긴 밀밭에도…
거기에 강아지
가장 좋아하는 방석에 강아지가 엎드렸다 아마도 천 번은 넘게 돌았을 산책길 가로수가 심긴 흙 냄새 맡고 오줌 갈긴 전봇대 냄새 맡고 자기도 똑같이 갈기고 아직 이해할 순 없지만 횡단보도 앞에 선 주인 따라 때때로 멈추었다 건너가고 익숙한 냄새 집에 돌아오면 발 닦고 물 마시고 사료 한 그릇 먹으면 볕이 드는 창가에서 졸음에 겨운 눈꺼풀 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