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냄새

월요일을 앞둔 고요한 밤이었다. 잠들기 전 아내와 몽고반점을 읽었다. 학창시절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돌려 보듯이, 내가 한 시간 반, 아내가 한 시간, 그렇지만 영화 한 편을 같이 보듯이, 그렇게 봤다. 그 시간 동안에는 책이 나를 삼겼다. 초록 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는 둥실 잠들었다. 출근 전에는 아내와 몽고반점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일상성-본래성이라는 틀로 처제와 ‘나’, J와…

앙불괴어천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나는 바라지도 않는다자정을 넘겨이렇게 뒤척이는 까닭은아직 피곤하지 않기 때문이요밝은 동안 열심 내지 않았기 때문이요오늘 하루를 이대로 끝내기는 아쉽기 때문이요잠에 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천정이 나를 내려다보아나는 모로 눕는다

2024. 9. 22.-29. 요약생활 205-209

2024. 9. 22. 일. 청명한 가을날씨.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느즈막히 일어나 설거지하고 화분을 돌봤다. 새싹귀리 수경재배 싹을 틔우고 아내와 햄버거를 사러 나갔다 왔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애니메이션 <루카>외 <안녕, 알베르토>를 봤다. 이탈리아에 다시 가고 싶었다. 밥 먹고 나서는 내내 논문작업을 했다. 의회의 회의록에 관한 철학적 기반을 조사했다. 아내가 간식을 이것저것 해줬다. 고구마를 구워주고, 오이무침을 해줬다. 저녁으로…

뫼비우스

피부의 표면을 기어가던 개미가 지쳐갈 때쯤 땅으로 꺼진 구덩이를 발견했다 구덩이에서는 무시무시한 악취가 풍겼다 개미는 표면을 따라 구덩이 속으로 기어갔다 개미가 구덩이 안으로 기어갈수록 주변은 점차 어두워졌다 절반쯤 어두워졌을 즈음 그러니까 피부의 황혼을 목도했을 때 개미는 자신이 구덩이의 경계에 서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개미는 어디까지가 구덩이인지 알 수 없음을 혹은 기어가던 모든 표면이 이미 구덩이었음을…

술집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술집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는 시를 써서 보여주었다 아내는 시를 읽고 이렇게 쓰면 더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존경하는 친구에게 같은 시를 보여주었다 친구는 실제 있던 이야기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존경하는 친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어떻게 아내를 두고 이런 글을 쓸 수 있냐고 그러고도 어떻게…

나락

어쩌지 나 큰일났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겠어 아직은 아니고 언젠가 땅으로 떨어져 알몸이 드러나면 더럽고 징그러우며 고약하고 역겨운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그래서 더더욱 더럽고 징그러우며 고약하고 역겨운 내가 어느 맑고 높은 가을날 웅성이는 광장의 단두대 앞에서 이토록 깨끗한 인간이 순교하는 영광의 날이 찾아오면 칼날에 묻은 살점이며 내 목의 짓이겨진 단면이며 흘러나오는 피냄새를 맡고 사람들은 제각기 구역질을…

강성훈, 위선과 염치

2022년 3월 29일에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온라인 인문 플랫폼 '인문360'에 '오늘, 키워드 인문학'이라는 기획으로 게재한 칼럼 하나를 소개한다.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545.do?mode=view&cid=2372611 위선과 염치 위선이 드러나는 양상은 다양할 수 있다. 위선은 못난 인간이 더 못난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른다. 위선의 이름으로 비난받는 행태가 비난받는 진짜 이유는 어쩌면 위선 자체가 아니라 그런 행태를 보이는 사람의 몰염치함…

[비평] 눈물의 기도는 노래가 아니다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허 연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혹 시간이 맞거든 연차를 내고 시골 성당에 가서 커다란 나무 밑에 앉는 거야. 촛불도 켜고 명란파스타를 먹고 헤어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