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과 불안

오래 키우던 로즈마리가 죽었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이것도 작년 10월 말의 이야기다. 애도마저 늦었다. 미안하고 미안하다.

미안은 불안의 가능태이다. 아직 편치 않다는 말은 곧 편해지리라는 희망을 함께 담는다. 불안은 그러한 희망이 사라진 상태, 그냥 편치 않다는 이 마음이 무거운 현실로 다가왔음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말이다.

로즈마리를 죽인 것이 못내 죄송스러웠다. 죄송을 미안의 높임말쯤으로들 아는데, 죄송이란 내가 죄를 지어 마음이 그 일에 묶였다는 뜻이다. 설문해자는 죄(罪)라는 한자를 해석하며, 죄인의 코(自)를 끌로 잘라내던(辛) 처벌의 전통을 언급한다. 그래, 어쩌면 인간은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두려운 것은 죄 그 자체라기보다 처벌이니까. 그러나 죽은 로즈마리를 대리해 나를 처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다, 내가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이 한 모든 일을 알고 있다. 나는 로즈마리를 보다 잘 돌봤어야 했다. 애초에 들이지 말아야 했을까? 그 수많은 “했어야(혹은 하지 말았어야) 했음들”을 돌아보는 의미가 독일어 죄(Schuld)에 담겨 있다. 영어의 죄(guilty)와 해야 함(should), 그리고 했어야 함(should’ve)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여기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 시야에 유일하게 보이는 고정된 신체가 코라는 점을 생각하면, 죄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코가 잘린 죄인(영어에서 죄를 일컫는 또 다른 말 crime은 라틴어 잘라내다cernere에서 비롯됐다)은 아무리 눈을 모아도 자신(自)을 더는 볼 수 없다. 미안한 모든 것들이 그 어떤 사과에도 돌이켜지지 않는 불안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내가 나의 죄에 마음이 묶일 때, 나는 미안하기보다 불안(Sorge)해진다.

그렇다고 불안을 ‘편안해질 모든 가능성의 상실‘로 보아야 할까? 잘린 코는 다시 돋을 수 없는 것일까? 사실 불안은 삶과 함께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기에 불안하지만, 누구도 그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를 모르기에 미안한 것이다. 불안은 생명을 만날 때 다시 미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생명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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