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는 삶을 요약하는 일이다. 경험한 바를 요약하면 굳이 외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래서 일기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 위해 중요하다. 그렇게 중요한 일기를 요새 쓰지 않았다. 일기를 쓸 짬이 안 났다는 변명에는 사실 그만큼 성실하게 살지 않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학기가 끝나고 한동안 술에 취해 있었다. 읽기로 마음 먹은 책들을 겨우 읽어내며 살았다. 그래서 쓰기보다 읽기를 더 많이 하면서 살았다. 그러는 동안 바뀐 것들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읽는 일에 꽤나 자신이 생겨서, 이제는 웬만큼 무서운 글을 읽어도 눈이 헛돌지 않는다는 것. 다른 하나는 목표가 뚜렷하게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목표지향적인 삶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지난 삶을 반성하면서, 목표를 향해 꾸준히 살기로 마음먹어본다.
나는 올해 논문을 써야 한다. 방학 동안 영어 시험을 봐야 하고, 방학이 끝나자마자 자격시험을 치러야 한다. 자격시험을 마치고 나면 논문 초안을 다른 사람들에게 읽혀서 혼나야 한다. 그렇게 두어 달 동안 글을 쓰고 논문을 마치기까지, 학교라는 조직에서 내 소속을 유지하기 위해 몇 차례 시험을 더 치러야 한다. 그러면 올해가 끝난다.
목표를 자주 바꾸면 매 순간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지친다. 한 군데를 정해 놓고, 단단하게 한 걸음씩 걸어나가야 한다. 적절한 페이스와 리듬과 호흡을 느끼면서 가야 한다. 내 목표는 부끄럽지 않은 논문을 쓰는 일이요, 다음 소속으로 연착륙하기 위해 자격을 갖추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요약생활을 다시 시작한다. 이제는 삶에 대한 요약이라기보다 그날 배운 것들에 대한 요약을 쓰려고 한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보다, 내가 무엇을 배웠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흔히 영역의 이미지로 떠올리기도 한다.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의 총량을 어떤 영역으로 생각해볼 때, 학문은 그 지식의 경계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진일보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선 사람들이 확정해 놓은 지식의 경계를 한 걸음 멀리 옮겨놓는 일. 그 숭고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