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글들

권위와 강제

아렌트는 분명히 권위에 "강제도 설득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권위가 의문시되지 않는 힘이라는 점이다. 명백한 범죄를 처벌하지 못할 때 권위는 의문시된다. 명백한 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폭력이다. 잠재적 폭력은 강제력이지만 강제력이 직접적으로 권위를 '위해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불멸, 영속, 지속

작업의 결과인 작품은 행위(action)의 결과인 행위(deed)보다 지속한다. 행위는 망각되기 쉽지만 작품은 사물로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체가 설립되면, 정치체는 작품을 대체한다. 정치체는 영속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치체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행위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행위자가 죽고난 뒤에도 행위는 남아 기억된다. 정치체는 작품을 대체하지만 작품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 도식에서 보면 작품은 지속하고, 정치체는 영속한다. 그러나 정치체의 영속성은 작품의…

죄형법정주의

죄형법정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이 재미있다. 나는 죄형법정주의가 실천의 문제에서 인식의 문제로 확장된다고까지만 생각했는데, 아렌트는 도덕의 문제까지 확장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죄가 법으로만 규정된다면, 그 자체 죄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도덕은 조건 없는 절대적 법칙이므로 죄는 금기로만 규정되고, 도덕의 영역에서는 그 자체 악인 것을 찾을 수 없다. 죄형법정주의가 어쩌면 근본악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을 변화시킨 주요…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 개론

법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을 논할 때 기호학(semiotics)이 꽤나 도움될 듯싶다. 먼저 기호학의 논의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기호: 개념과 역사(Il Segno)』에서 기호학에 관한 개론을 펼친다. 내가 이해한 간단한 도식은 다음과 같다. 기호 현상에 관한 기호학적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해 스토아에서 활발하게 진행됐다. 에코는 로크를 근대 기호학의 아버지로 본다. 사물과 기호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혁신의 기원들(가제) 목차

Ⅰ. 들어가기에 앞서 1. 아렌트의 세계관 (인간, 세계, 활동) 2. 사회와 정치 (사회 역시 인간의 모임이므로 필연적으로 정치가 등장, 정치를 아예 억압했던 것이 전체주의와 관료제이지, 사회와 정치는 구분되는 기준이 아님) 3. 사회와 시간 (이익과 결부됨, 이익은 시간과 밀접, 정치는 사실적 진리에 다다를 때까지 무한히 논의를 지속할 경우 최고, 그게 아니라면 의견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 최선,…

용서와 사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쁜 ‘짓’을 했다고 곧바로 나쁜 ‘사람’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앞으로 새 사람이 될 가능성을 믿어주겠다는 마음, 사람을 사랑해서 옛날 일을 눈감아주는 마음이 용서다. 용서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용서 덕분이다. 우리 부모님께서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셨으면, 고집세고 오만한 이 머리…

빛과 행위, 양자정치학 뻘소리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힘은 전자기력이다. 규모로 따진다면야 중력이 가장 큰 힘이겠지만, 전자기력은 다양하고 조절하기 쉽다. 전자기력은 달리 말해 빛이다. 빛은 직진하면서 동시에 회절한다. 그래서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전기력과 자기력은 파동의 형태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곧장 나아간다. 서로가 매질이자 힘이 된다. 우리가 사는 거시세계는 전자기력이 크게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공간이다. 햇볕을 쬔다고 내가 선…

인생 선배

인생 선배가 될 것 같았던 사람을 만났다. 나와 비슷하게 군 생활을 했고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분야를 먼저 연구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몸 담던 기관에 들어가도 될지 조언을 구했다.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통화를 성사시켰다. 그런데 웬걸 너무나 무식한 사람이었다. 뻔히 반박될 수 있는 말을 서슴없이 지껄이는 사람은 무식하다. 더군다나 그 말이 다른 사람에 대한 무시라면 더욱.…

2021. 9. 20. 요약생활 87

추석들 잘 보내고 계시는지. 나는 23일 연휴 다음날에 논문 발표가 있어 작업 중이다. 교수님께서 논문 주제가 너무 넓고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셔서 다시 쓰다시피 하고 있다. 작업하던 중에 까먹고 싶지 않은 내용이 있어 남긴다. 내가 보기에 법철학의 논의에서 범죄와 처벌의 관계는 핵심적이다. 법은 범죄를 처벌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그로티우스와 푸펜도르프, 몽테스키외의 법철학을 높게 평가한다. 아렌트가…

2021. 9. 7. 요약생활 86

논문 가제본을 제출했다. 물론 엉망이지만, 그래도 5일 밤을 새가면서 머리에 든 무언가를 꺼내니 후련하다. 앞으로 오래도록 수정 작업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도 내 글에 작은 성과가 있다면 법을 명령이 아니라 참여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렌트에게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은 우선 푹 쉬었다. 다음 논문을 구상하면서 The Warriors라는 책 서문을 봤다. 아렌트가 그레이의 책에 서문을 써주면서 전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