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있잖아 그때 말이야 우리가 무언가 쌓아가고 있었을 때 우리가 입술을 맞추고 있었을 때 말이야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우리는 그때 우리였지 나와 너로 흩어지기 전 그때 우리는 들숨과 날숨으로 조용한 숨결처럼 대화를 했잖아 이제는 고작 음파를 일으키면서 한숨처럼 소리쳐야 하잖아 외국어처럼 나는 empathy라는 말이 슬퍼 언제부터 나는 너를 느끼려면 네 안으로 들어가야만…
삶
숙취
잔이 멈추고 무서운 숙취가 찾아오면 나는 이불에 갇혀 웅크리고 떤다 혼자 떤다 연탄가스 매캐하고 악을 쓰고 몸을 기울여야 겨우 들리는 술집에서 따닥 뚜껑을 딴 뒤 투명한 잔에 맑은 술 졸졸졸 창을 가린 허름한 시트지에는 푸른 초원에 웃는 소 일가족 건배, 건배, 건강이 최고야 펄떡이는 생선을 건져 눈 앞에서 대가리를 치고 배를 가르면 쏟아지는 내장 흥건한…
2023. 5. 30. 요약생활 114
화요일, 흐림 나는 국어선생님들을 사랑한다. 아니,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놓고 보니 모두 국어선생님이었다는 말이 맞을지도. 어제는 중학 시절에 만난 국어선생님과 저녁을 먹었다. 그저께는 국어선생님을 하던 고교 친구와 길게 통화했다. 이 두 국어선생님은 정말 선생님이어서 언제 어디서든 매번 배운다. 집앞 꼼장어 집에서 만나면 그곳이 교실이 되고, 실없는 안부전화를 하면 그야말로 원격교육이 된다. 그래서 한 선생님을 만나면…
2023. 5. 23. 요약생활 113
화요일, 맑음 내일은 결혼사진을 찍는다. 요 며칠 운동 열심히 하고 건강하게 먹고 있다. 우락부락하게 몸 키울 생각은 없지만, 별로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진이면 평생 남는 건데, 멀쩡하게는 보여야 하지 않겠어? 몸은 습관 대로 큰다. 몸은 마치 지층과 같아서 켜켜이 퇴적된 무늬를 갖는다. 하루 양치 거른다고 충치가 생기겠냐마는 그런 행적들이 충치를 낳는…
거울
위대해지자는 것이 아니다. 우습게만 살지 말자는 것이다. 시간을 쪼개 잠 줄여가며 대단한 일을 하자는 게 아니고, 멍청하게 시간을 죽이지 말자는 것이다. 내 삶에 투입된 타인의 노력을 충분히 인정하고, 그들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요컨대, 자살을 하려거든 시체를 치우는 고생을 남에게 시키지 않을 만큼 조용히 사라지시라.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충고하는 바다. 그러나 당신의 시체를 찾지…
2023. 4. 24. 요약생활 112
월요일, 구름 조금 어제는 상견례를 했다. 공식적인 혼례의 시작이다. 이 시간부터, 혼례는 우리 둘이 논의하던 일에서 가족 전체가 논의하는 일로 격상됐다. 다행히 모두가 환대해주셨다. 화기애애했다. 지원이 시작부터 눈물을 쏟아 나도 울 뻔했다. 다 마친 뒤에 왜 울었냐 물어보니 벅차서 그랬다고 한다. 나도 내가 왜 울 뻔했는지 몰랐는데, 그 말이 맞는 듯하다. 상견례가 끝난 뒤에는 각…
바디 프로필 전성시대 8
에토스 없는 아름다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가치다. 아름다움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아우른다.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만 의미하게 된 단초는 로마 사람들의 베누스(Venus, 비너스) 숭배에서 찾을 수 있다. 로마인은 크리스트교가 부흥하기 전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된 다신교 문명을 유지했다. 그중에서 핵심은 올륌포스 신들에 대응되는 유피테르(Jupiter, Ζεύς), 유노(Juno, Ἥρα), 미네르바(Minerva, Ἀθήνα)였다. 그러나 각각의 신들은 그리스 신화와…
2023. 4. 13. 요약생활 111
목요일, 맑고 황사 어제는 일을 몰아쳐서 끝냈다. 국회의 국정감사에 비견되는 지방의회의 구정질문를 앞두었기 때문이다. 네 명의 의원들로부터 지시를 받아 5분 자유발언 원고 1개, 구두 구정질문 원고 3개를 모두 끝냈다. 책도 못 보고 글도 못 써 아쉬웠다. 뭐, 업무로 쓴 글도 글로 친다면야 많이 쓰기는 했다만. 여러 의원들이 잘 썼다고 했다. 으레 하는 칭찬은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2023. 4. 10. 요약생활 110
월요일, 맑음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원과 함께 살 전셋집을 구했다. 이사는 6월 중순. 조만간 상견례를 할 것이고, 결혼식을 준비할 것이다. 이렇게 한 가정을 꾸린다. 최근에 내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을 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운다. 국회를 떠나 강서구의회에서 일하고 있다. 일은 이미 손에 익었고, 좀 더 배울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즐기는 중이다. 점심시간에는 이렇게…
바디 프로필 전성시대 7
모든 기록과 해석은 사물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록의 핵심은 사물의 견고함에 있다. 인간은 사물의 존재에서 질서를 찾는다.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나눔으로써, 이름을 붙임으로써 인간은 자연에 경계를 만든다.* 그러나 사물이 동일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이내 상해 모습이 변해버린다면, 인간은 그 사물에서 질서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든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의 흐름은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