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지나 봄

얼었던 분수가 터졌다 버들 여린 잎 돋아나고 목련은 벌써 떨어지기 시작해서 목놓아 봄 부르는 새된 소리들 남해는 벚꽃이 한철이라는데 이곳은 아직 꽃망울이 수줍다 어디는 겨울, 어디는 봄 벛꽃의 꽃말은 부끄러움 먼 흑토의 밀밭에서는 수많은 세계가 사그라들고 나는 연못가에 앉아 벚꽃을 본다 평화, 사랑, 인류 이따위 거창한 것들을 떠올리면서 결코 닿지 못할 길을 닦으면서 빼앗긴 밀밭에도…

거기에 강아지

가장 좋아하는 방석에 강아지가 엎드렸다 아마도 천 번은 넘게 돌았을 산책길 가로수가 심긴 흙 냄새 맡고 오줌 갈긴 전봇대 냄새 맡고 자기도 똑같이 갈기고 아직 이해할 순 없지만 횡단보도 앞에 선 주인 따라 때때로 멈추었다 건너가고 익숙한 냄새 집에 돌아오면 발 닦고 물 마시고 사료 한 그릇 먹으면 볕이 드는 창가에서 졸음에 겨운 눈꺼풀 거실…

바람소리

바람 앞에서 나는 떠들고 있었다 혼자인 줄도 모르고 소란스러운 게 바람 때문인지 소아시아의 먼 강이 흘러가는 때문인지 아니면 흑백논리에 빠진 올리브나무 때문인지 생각하다가 잠시 바람이 흰색일 수도 있겠다 영사기의 빛을 받아내듯이 바람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점멸하고 흐려지고 부예져서 이제는 어두운 객석에서 멀뚱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나를 되비추는 거울처럼 하얄 수도 있겠구나 나는 바람이 너무 시끄러워서 소주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