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옷깃에 꼬리표를 달아야 한다 저는 다음 역에 내립니다 저는 종점까지 갑니다 충분치 않다 어제 몇 시간 잤는지도 이마에 써붙여야 한다 하루 평균 앉아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건강검진 결과 신체 나이는 얼마나 먹었다는지 류머티즘 관절염은 앓고 있는지 뒤룩뒤룩 살이 쪄서 무릎에 하중은 얼마나 걸리는지 살찐 이유가 폭식 때문인지 한약을 잘못 먹어서인지 면접 자리에서 어려운…
시
거품
시체가 된 너의 몸 너는 눈을 반쯤 뜬 건지 감은 건지 흐리고 웨트 블루의 피부 아래에는 검은 피가 흐르던 정맥의 흔적 네가 체했을 때 따주던 손톱 위 여린 살 바늘을 찔러도 얼어붙은 손끝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아름다운 네 얼굴에 이 따위 것들이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이편과 저편이 죽음만큼 가까운 거품이어서 표면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칼국수
거울을 안 본지 오래도 되었다 오늘 점심은 바지락 칼국수 홀로 온 손님도 반겨줄 만한 작은 가게를 찾아 왔다 그런데 이럴수가 저쪽 테이블에 회사 동료 세 명이 옹기종기 혼자 오셨냐는 걱정에 사람이 물려서요 라는 대답을 거의 쏟을 뻔했다가 김밥이 물린 탓이라 간신히 틀어막았다 어느 집 커피가 맛있더라 학원비 이야기 옆 부서 불륜 이야기 마요네즈 참치에 아스파탐…
선
돌아가신 내 아버지께서 마주오는 트럭에 받힌 뒤로 나는 기차를 애용하기로 한다 중앙선은 믿음의 벽 줄지어 가는 자동차들 선을 넘어 균열을 내는 목마 한 마리 원운동을 하는 자동차에게 차선은 위선이라 나는 기차를 애용하기로 한다 아홉시 뉴스 말미 어느 개발도상국 특파원으로부터 수백이 죽고 수천이 다쳤다는 탈선사고 소식이 작게 한 꼭지 두 점 사이를 지나는 직선은 유일하다는데 아버지의…
전자레인지
우울한 날이면 편의점에 들어가 가장 비싼 포켓 위스키를 고른다 기분은 내야겠고 돈은 없고 안주는 원 플러스 원 냉동만두로 적당히 타협한다 만 구천 원짜리 발렌타인 양주는 이백 밀리리터 백 밀리리터에 오천 원 더하기 사천 오백원 일 밀리리터에 구십오 원짜리 스카치 위스키 대충 한 봉지에 오천원 하는 냉동만두 두 봉지 한 봉지에 네 덩이 원 플러스 원이면…
요지가 분명한 시
말 없이 설득하는 법을 아니? 잘 살면 된다 삶 자체가 증거가 된다 알아서 듣는다 기분 나빠도 배운다 앞뒤 안 가리고 끄덕인다 이 시대는 말의 인플레이션 위조지폐 같은 말을 쏟아내니 헐값이 되고 모두가 떠드는데 아무도 듣지 않는다 듣기 좋은 말만 앨범에 수집한다 앞뒤 안 가리고 끄덕인다 말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면서 표현의 시식코너를…
옷
참 재미있지 옷이라는 게 지하철에 앉아 고개를 들면 마주선 중년남성의 사타구니와 내 입을 가로막고 있는 게 몇 겹의 옷이 전부라는 게 옷은 천이고 천은 실인데 얽히고설킨 몇 올의 실이 뜻밖의 구강성교라는 지옥에서 나를 건져올리다니 바지 속의 팬티 속의 피부 속의 세포막 속의 무엇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양파가 될 지도 몰라 그 속은 마리아나 해구보다 깊을 텐데…
탑
우리 있잖아 그때 말이야 우리가 무언가 쌓아가고 있었을 때 우리가 입술을 맞추고 있었을 때 말이야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우리는 그때 우리였지 나와 너로 흩어지기 전 그때 우리는 들숨과 날숨으로 조용한 숨결처럼 대화를 했잖아 이제는 고작 음파를 일으키면서 한숨처럼 소리쳐야 하잖아 외국어처럼 나는 empathy라는 말이 슬퍼 언제부터 나는 너를 느끼려면 네 안으로 들어가야만…
숙취
잔이 멈추고 무서운 숙취가 찾아오면 나는 이불에 갇혀 웅크리고 떤다 혼자 떤다 연탄가스 매캐하고 악을 쓰고 몸을 기울여야 겨우 들리는 술집에서 따닥 뚜껑을 딴 뒤 투명한 잔에 맑은 술 졸졸졸 창을 가린 허름한 시트지에는 푸른 초원에 웃는 소 일가족 건배, 건배, 건강이 최고야 펄떡이는 생선을 건져 눈 앞에서 대가리를 치고 배를 가르면 쏟아지는 내장 흥건한…
소주 한 잔
취기가 오른다. 나는 나를 생각하고, 나는 내게 술을 사달라 조르고, 나는 나를 생각한다. 재영아, 소주 한 잔만 사주라. 나는 배운 게 이것뿐이라 이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나는 불운 앞에 발가벗고 있는데 주섬주섬 옷을 입으려니 어제 화장실 앞에 벗어둔 잠바, 청바지, 뉴에라 모자, 내의, 내의, 속옷, 냄새나는 속옷 가엾은 나는 씻고 나온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