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름 의미 있는 견해라 본다. 그러나 이분도 역시 특정한 정파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절대적이고 중립적인 과학적 시각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누구라도 이 말만큼은 중립적으로 할 수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원전 오염수 문제는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의 사례와 비슷하게 보아야 한다. 탈리도마이드는 도입 당시 동물실험에서 별 문제가 없었다고 보고됐다. 입덧에 대한 효능이 발견되면서, 불면증, 감기, 두통에 효능 좋은 약으로 전세계에 팔렸다. 미국만 빼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탈리도마이드 판매를 불허했다. 기업은 계속해서 탈리도마이드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증거를 제출했지만 허가 담당자 프랜시스 켈시(Frances Oldham Kelsey)는 기업발 정보를 불신했다. 임산부에 대한 실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 뒤 전세계에 기형아 출생율이 늘었다. 처음에는 원인을 몰랐고, 나중에 알아보니 탈리도마이드 때문이었다. 모든 사건은 일상의 탈을 쓰고 즉각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그 사건이 사건이었다는 점을 규명하는 데에는 언제나 시간이 걸린다. 탈리도마이드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진 건 그 독약이 세계 약품시장에 본격적으로 풀린지 10년 쯤 뒤였다.
미국에서 기형아 출생 중 탈리도마이드 의심사례는 단 십수 건만 보고됐다. 탈리도마이드를 막은 공로로 켈시는 대통령상을 받았다. 탈리도마이드를 승인한 담당자가 처벌받은 사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들은 성실히 공무를 집행했을 뿐이고, 원래 톱니에는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법이니까. 생각 없는 성실함이 세계를 무너뜨린다.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도 비슷하다. 30년 전 귀찮은 가습기 청소를 안 해도 되게 만들어주는 약품이 시중에 팔렸다. 세균만 잡아야 할 소독약이 호흡기를 망가뜨렸다. 원인 불명의 폐렴이 창궐하고 사건이 사건임을 밝히는 지난한 시간이 시작됐다.
십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밝혀진 사실로는, 흡입독성시험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 공산품안전심의위원회에 기업 관계자가 있었다는 사실 , 옥시가 이미 유해성 경고를 받았음에도 묵살했다는 사실 등등이 있다. 피해자는 망가진 몸으로 법정에서 싸워야 했다.
옥시가 시중에 풀리는 과정에 조금이라도 몸 담은 공직자가 FDA의 켈리처럼 할 수는 없었을까? 우리나라의 최첨단 과학기술과 수많은 행정절차는 무엇을 위해 존재했단 말인가? 앞으로 어떤 과학기술과 행정절차를 추가해야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애초에 이 문제가 과학기술이나 행정절차의 문제인 걸까?
지난 70년 동안 과학은 믿을 수 없이 발전했다. 그런데 70년 전에 터진 탈리도마이드 스캔들과 매우 비슷한 옥시 스캔들이 30년 전 대한민국 땅에 터졌다. 그리고 다음 무대는 일본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건을 목전에 두고 있다.
과학적 방법론이 부실해 유사한 사건이 재발했다고 보아야 할까? 전혀 아니다. 태도의 문제다. 과학적 장치를 아무리 바벨탑처럼 쌓아도, 인간은 오만을 부리는 한 스스로 무너진다. 언제나 그렇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매사에 주저한다. 단정하는 자가 거짓말쟁이고 선동가다. 세상에 확실한 건 없다.
무죄추정의 원칙도 마찬가지다. 입증책임은 변화를 바라는 자에게 주어진다. 형사재판에서 입증의 수준은 합리적 의심을 넘어선 수준이어야 한다. 탈리도마이드,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되돌아볼 때, 오염수 방류는 몇몇 사람에게 사형이 될지도 모른다. 혹은 신체 일부를 영영 불구로 만드는 자유형이 될지도 모른다. 피의자 한 명의 상태를 변화하는 데에도 그 정도의 입증책임이 주어지는데, 몇 명이 될지도 모르고 어느 정도가 될지도 모르는 변화를 일으키려면 얼마나 무거운 입증책임이 주어져야 할까? 몇몇 사람들은 아마 이 말에 동의하지 않겠지.
누군가를 정파적이라 비판하는 건 누구에게나 허락된 권리다. 누군가를 위선적이라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비판을 하면서 마치 자기는 결코 정파적이지도 위선적이지도 않다는 듯이 완전무결하게 꾸미는 순간, 그는 스스로를 신처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말 그대로 신화,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