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사과

1.
1997년 전두환·노태우를 특별사면한 김대중 대통령의 용서가 나는 헷갈렸다. 그의 용서에는 양 극단의 평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의 용서는, 한 편으로는 위대한 정치인이 자기 목숨을 끊임없이 위협하던 경쟁자의 박해를 견뎌내고 마침내 그를 용서한 대승적 결단이었다.

다른 한 편으로 그의 용서는, 그처럼 위대하지 못한 사람들 즉 자기가 당한 고통에 응당한 보복을 바라던 소시민들이 용서할 기회를 빼앗은 오만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김대중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2.
물론 김대중은 누군가의 용서를 대신하겠다는 오만을 부린 적 없다. 그러나 ‘김대중도 용서했는데’ 김대중의 기역도 되지 못하는 소시민이 끊임없이 원수의 처벌을 부르짖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대중만큼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면 처벌을 요구할 수 없고, 처벌을 요구한다면 그만큼 위대해질 수 없는 기묘한 맥락이 형성됐다. 실제로 김대중의 화해 정신을 되새기자고 주장한 사람들 중에는, 김대중의 추종자만큼 전두환·노태우의 추종자도 있었다.

어떤 이의 폭력에 내 가족이 죽었는데 어떤 정치인이, 단지 오랜 세월 그의 억압을 견뎌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용서를 대신 할 수 있는가? 김대중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했다는 말도 믿을동말동한데, 인간이 다른 인간의 용서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는 이 지점을 꼬집는다. 어린 아이를 유괴해 죽인 범죄자는 사람들 앞에서 뻔뻔하게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주장한다. 죽은 아이의 엄마인 주인공은 범죄자의 태도를 보고 이렇게 일갈한다.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

한동안 나는 김대중의 용서가 못마땅했다. 거듭난 성인(聖人)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속물(俗物)의 시각이었다. 성인은 악인의 사과 없이도 용서를 할 수 있다. 속물에게는 사과 없이 용서할 힘이 없다.

3.
김대중의 용서로부터 26년이 흘러 2023년이 됐다. 전두환의 손자는 광주를 찾아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에게 사죄했다. 사람들은 마침내 용서랄 것을 할 기회를 얻었다.

물론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진짜 사죄할 사람이 따로 있는데, 전우원의 사죄가 가당키나 하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우원 할아버지가 와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우원이 사과 이후 돌연 얼굴을 바꿀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용서하고픈 사람들이 용서의 기회를 얻었다는 게 중요하다. 사람들은 이제 김대중만큼 성인이 아니어도 용서할 수 있게 됐다.

4.
사실 용서의 기회는 김대중이 빼앗은 게 아니었다. 사과 없는 용서를 통해 김대중은 ‘사과해도 처벌 없이 용서받을 조건’을 보장한 것이다. 이런데도 사과하지 않은 사람들은 굴러 들어온 호박을 찬 것이다.

그러나 사과했어야 할 사람들은 김대중의 용서를 이유로 사과하지 않았다. 복수의 연쇄를 끊고 용서와 사과의 선순환을 만들고자 했던 김대중의 의도를 그들은 왜곡했다. 김대중의 용서를 오히려 곡해하도록 만든 것이다.

김대중의 용서는 한동안 미완의 작품으로 남았지만 결코 멈춰 있지 않았다. 그의 용서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야기를 꾸며나가고 있었다. 김대중이 옥중수필에서 “역사에 대한 신뢰”를 언급한 이유가 여기 있다고 본다.

5.
모든 인간에게는 어둠이 있다. 모든 범죄는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벌어진다. 사적인 것들을 공공연히 꺼낼 때 그가 얼마나 수치스러워 하는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우리는 안다.

전우원의 개인사와 기행이 어떻든, 광주에 내려간 일만 놓고 보자면, 용기가 가상하다. 모든 거듭남은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데에서, 나아가 내게 드리운 전통의 영향력을 끊어내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철학은 부친살해의 역사다. 계몽, 거듭남, 사죄에는 용기가 공통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이 있어 세상은 변하고, 우리는 그 안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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