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타인 없는 삶

강대영 외 9명, 『법의학』

법의학에서 죽음은 생명활동이 영원히 불가역적으로 정지 및 소실된 상태이다. 생명활동은 평형상태(homeostasis)를 유지하는 운동으로서, 내부의 질병이나 외부 자극으로 인한 손상을 입었을 때 회복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반면 죽음은 자극에 대한 반응과 운동, 물질대사 능력이 모두 감소해 나가서 완전한 정지를 향해 변화하는 과정이다.

죽음의 과정은 가사-장기사-개체사-세포사의 단계로 나타난다. 죽음을 볼 때 인체는 세포<조직<장기<계통<개체로 구성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가사는 가짜 죽음으로, 영어로는 apparent death, 즉 죽음으로 보이는 것이다. 생명기능이 극도로 약화되어 죽은 것처럼 보이는 현상인 가사는 심폐소생술로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 장기사(organ death)는 일부 장기의 기능이 멈춘 것으로서, 심장사, 폐사, 뇌사의 경우에 개체사로 이어진다. 심폐장기는 죽었지만 뇌사는 아닌 경우 생명을 유지할 수는 있으므로 죽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뇌만 죽고 다른 모든 기능이 정상인 경우 장기이식에 한해서만 죽음으로 인정한다. 개체사(somatic death)는 생명활동이 비가역적으로 정지된 경우를 의미한다. 법적 죽음은 이 단계에서 의사나 법의학자의 서류화된 인정, 즉 사망진단서와 부검감정서로 완성된다. 세포사(molecular death)는 개체사 이후에 잔존하는 산소와 영양공급이 차단되어 세포 수준의 운동마저 종료되는 죽음이다. 정자나 백혈구, 근육조직 등은 개체사 이후에도 운동을 계속 할 수 있다. 모든 세포가 죽으면 생물학적 죽음이 완료된다.

죽음 직후에 시체가 변화하는 현상으로는, 체온이 내려가고, 혈액이 침하해 시반이 형성되며, 시체가 경직되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시간이 흐르면, 세포 벽이 녹아내리거나 소화기관이 스스로를 소화시키는 자가융해와, 부패로 인한 팽창과 변색, 지방질이 녹아내려 비누처럼 변하는 시랍화, 표면이 말라 자연적으로 방부처리가 되는 미라화 현상이 이어진다. 시체는 지상에서 약 1년이면 백골로 변하고, 물 속에서는 약 2배, 땅 속에서는 약 8배 느리게 부패한다.

그런데 법의학적 죽음은 자연과학적이면서 법적인 죽음이다. 이 죽음이 죽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완전한 은둔자」, 『나무』

유명한 의사였던 귀스타브 루블레 박사는 모든 지식의 원천은 사실 정신 안에 있음을 깨닫고 완전한 명상을 추구한다. 루블레 박사는 아내에게 컵과 물의 비유로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설명한다. 컵이 없어야 물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처럼, 육체가 없으면 영혼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루블레 박사는 외부 자극으로부터 영원히 차단된 세계에서 영원한 명상에 돌입하기 위해 실험을 기획한다. 두개골을 열어 시각 신경과 청각 신경을 잘라 머리에서 뇌를 꺼내고 표본병에 영양액을 부어 그 속에 루블레 박사의 뇌를 넣는다. 이제 루블레 박사와 외부세계를 연결시키는 건 잘린 경동맥뿐이다. 작은 경동맥으로 루블레 박사의 뇌는 당분과 산소를 공급받는다. 육체는 가족 무덤에 묻지 않고 과학 실험 도구로 바친다.

뇌가 되어버린 루블레 박사를 본 딸의 첫 반응은 구토였다. 가족들은 표본병을 거실 한가운데 둔다. 시간이 흐르고 아내 발레리 루블레는 늙었지만 박사의 뇌는 결코 늙지 않는다. 표본병은 점점 거실 구석으로 밀려나 가구 중의 하나처럼 취급된다. 아내가 죽던 날 아들 프랑시스는 관조의 세계로 숨어버린 아버지를 증오하여 표본병을 부수려고 하지만, 다른 가족들의 만류로 결국 박사의 뇌는 주방 찬장으로 쫓겨난다. 프랑시스도 죽고 그의 자식들에게 표본병이 인수인계되지만 프랑시스의 자식들도 죽는다.

한편, 박사는 육체에서 독립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박사의 뇌는 모든 외부 자극이 차단된 채 내면의 한계지점까지 명상한다. 의식의 영역과 무의식의 영역에 켜켜이 쌓인 ‘상상력의 층’들을 발견하고, 상상력이나 기억 외에 각종 개념들이 서로 융합하는 ‘삼투’라는 정신 작용을 발견하며,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선 ‘몽환의 영역’도 모두 발견한다. 그러나 박사는 발견한 것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외부와의 연결이 모두 차단됐기 때문이다.

루블레 박사로부터 몇 대가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그 후손 중 하나인 빌리는 찬장에 놓인 박사의 뇌를 보고 고깃덩이라고 가리킨다. 빌리는 집에 친구들을 불러 놀다가, 표본병 속 뇌를 발견하고 장난기가 돋아 케첩과 식초를 붓는다. 영양액의 급격한 염도 및 산도 변화는 정신에 각종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박사의 뇌는 그저 미세하게 부르르 떨 뿐이다. 아이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생크림, 과일, 온갖 것을 쏟아붓는다.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는 뒤늦게 뇌를 수돗물에 행군다. 오히려 염분 없는 수돗물이 신경세포를 파괴한다. 이후에도 빌리는 친구들에게 돈을 받고 뇌를 보여준다. 친구들은 뇌를 꺼내 주고 받고 던지며 장난치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친구들을 말리던 빌리는 왠지 역겨워서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빌리는 부모님께 뇌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둘러댄다. 빌리 아버지는 자기 조상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무심하게 쓰레기통을 비운다. 분홍빛의 고깃덩이를 떠돌이 개가 먹어치우고 트림한다. 루블레 박사는 공기속으로 흩어지며 최후를 맞는다.

루블레 박사의 이야기로 볼 수 있듯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 부를 수 있다. 공공의 영역에 내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순간 죽음과 다를 바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산다는 것을 사람들 틈에 끼는 것(inter homines esse)이라고,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 사이에 끼기를 멈추는 것이라고 했다. (The Human Condition, 7-8) 그래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음에도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가 그 현장이었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유대인 수용소에서 이송은 사형집행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수송을 할 때마다 수송인원은 정해져 있었다. 수감자들에게는 모두 번호가 있었고, 그들은 번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때문에 누가 수송이 되느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28) 나치의 수용소에서 중요했던 것은 누군가가 다른 수용소로 수송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지, ‘누가’ 끌려가야 하는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서슴없이 자신의 번호 대신 다른 이의 번호를 넣었다. 수감자는 번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수송된 수감자의 생사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리스트에 올린 번호와 맞아야 하기 때문”에 죽은 사람도 수레에 실어 옮겼다. (100-101) 이러한 나치의 행태에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범죄나 형벌과는 관계 없이 아무나 수용소에 감금해 법적 인격을 살해하고, 수감자들을 양심과 죽음의 딜레마에 빠뜨림으로써 도덕적 인격을 살해하고, 끔찍한 환경에 노출시켜 사람을 종적 동물의 상태로 빠뜨려 개성을 살해하는, 삼중의 살해를 통해 총체적 지배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기원』, 218-246)

빅터 프랭클은 119,104번이었다. 수감자는 수용시설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소지품을 압수당한다. 그러나 프랭클은 “외투 안 주머니에 있는 원고 뭉치”를 지키려고 애쓰지만 결국 빼앗기고 만다. 수용소 입구에서 독일군 장교는 수감자를 일렬로 세운 뒤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킨다. “왼쪽으로 간 사람들은 역에서 곧바로 화장터로 직행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그 화장터의 문에는 유럽 여러 나라 말로 ‘목욕탕’이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39) 수송 중에 헤어진 친구의 행방을 묻자, 먼저 와 있던 사람은 굴뚝 위 연기를 가리킨다. (영화 「미나리」에서 쓸모없는 수평아리들을 태우는 소각장 굴뚝 위 연기를 가리킬 때 이 장면이 떠올라 섬뜩했다)

수용소 생활은 말 그대로 ‘인간성의 말살’이었다. 수감자들은 온 몸의 털이란 털은 다 밀고, 고된 노동과 열악한 영양공급으로 피골이 상접하며, 닭장같은 막사에 전염병은 창궐한다. “매일 저녁 몸에 있는 이를 잡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있는 이 몸뚱이. 이제 정말로 송장이 되었구나. 나는 무엇일까? 나는 인간 살덩이를 모아 놓은 거대한 무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68) 프랭클은 나와 너의 차이가 불분명해지고, 삶의 의미가 사라진 현장에서 자기 자신을 그저 썩어들어가는 거대한 몸의 일부로 느꼈다.

죽음의 지옥도에서 프랭클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차이의 회복’과 ‘드러냄’이었다. 프랭클은 뜬소문과 정신착란으로 어지러운 막사 안에서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잃어버린 원고를 되살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 나는 마음 속으로 글을 썼다.” (74) 그리고 막사 내 도둑질이 발생해 동료 수감자들이 모두 굶게 되는 시련을 겪자 프랭클은 동료 수감자들에게 집단 정신치료와 같은 연설을 했다. 연설은 그들의 시련이 아무 의미없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고난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취지였다. (142-148) 수감기간 중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거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존재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당시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75-83)

한나 아렌트의 죽음관

법의학적 죽음과 루블레 박사의 은둔, 프랭클의 고난은 한 가지 공통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간 실존을 드러내는 공적 영역의 중요성이다. 자연과학적 죽음은 일종의 과정이지만 그 과정 안에서 ‘죽음의 순간’, 즉 언제까지가 삶이고 언제부터가 죽음인지 결정하는 것은 의사의 선고이거나 법의학자의 감정이다. 타인의 존재는 죽음의 순간까지 인간과 함께하며, 심지어 나의 죽음을 완성한다. 법의학적 죽음은 공적 공간에 드러났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루블레 박사의 은둔은 말할 것도 없이, 내면의 공간으로 숨어버린다면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더라도 ‘인간적으로는’ 죽은 것과 같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루블레 박사의 은둔이 인간 실존에서 공적 공간이 갖는 의미를 가상적인 이야기로 보여준다면, 프랭클은 그 의미를 몸소 느낀 산증인이다. 프랭클의 고난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이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살해되는 경우 숨이 붙어 있더라도 죽은 것과 같이 살게 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심지어, 그러한 고난마저도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와 공적 공간에 이야기를 내놓음으로써 알려지게 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 실존이 놓인 조건은 삶과 죽음이고 인간사의 영역을 구성하는 조건들은 삶, 세계, 복수성이다. 이 두 가지 조건 아래 노동, 작업, 행위라는 인간의 활동은 각각 ‘개인의 삶을 넘은 종적 삶’, ‘인공물을 통한 영속성과 내구성’, ‘정치체 구성과 기억으로서 역사’가 될 수 있다. (The Human Condition, 7-9) 인간은 활동을 통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생물학적 죽음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실존적 한계이지만, 인간사의 영역에서 기억을 통해, 마치 올림포스 신들과 같이 인간은 불멸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18) 불멸(immortality)은 영원(eternity)과 다르다. 불멸은 인간사의 영역에서 위대한 업적으로 삶과 죽음의 순환을 극복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것인 반면, 영원은 보편타당하고 불변하는 세계에 진입하는 것으로서 인간사의 영역 밖에서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을 경험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일종의 죽음이다. (19-20)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말과 행위를 통해 그들 스스로 독특한 정체성을 공적 세계 속에 드러낸다. 공적 영역은 외형을 통해 객관성과 실재성을 느끼는 공간으로서, 마치 테이블처럼 사람들 사이에 적절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무언가를 내놓을 수 있는 세계이다. (50-53) 아무 활동이 없어도 드러나는 육체의 물리적 정체성은 인간의 무엇됨(what-ness)이지만, 그 독특한 형태나 음색처럼 행위를 통해 인간이 드러내기도 감추기도 하는 속성은 누구됨(who-ness), 즉 개성이다. 개성은 마치 그리스의 다이몬처럼 그들 스스로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보인다. (178-18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진정한 의미에서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적 공간에 우리 스스로를 끊임없이 드러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과 귀에만 집착하는 순간 우리 삶은 천박해진다. 우리 삶이 갖는 의미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내면의 영역과 타인 앞에 드러내는 영역을 적절히 넘나들어야 한다. (71)

죽음, 타인 없는 삶”에 대한 답글 1개

  1. ‘자연과학적 죽음’ 외에 ‘인간적 죽음’을 생각해보게끔 하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특히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 부를 수 있다.”를 읽으면서, 조선 시대에 행해졌던 팽형(烹刑)이 떠올랐습니다. 팽형을 받은 사람은 자연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인간적 죽음을 당했단 점에서 결국 똑같은 사형(死刑)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반면, 나치의 수용소는 살아있지만 죽었다고 간주하여 장례식을 치러주고 울어주는 ‘팽형’과는 다르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인간성의 말살’을 수용자들에게 행했단 점에서 더욱 악랄한 것 같았습니다. 홀로코스트나 아우슈비츠를 주제로 한 많은 미술 작품들이 수용자들을 표현할 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인간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러한 ‘인간성의 말살’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참고: https://www.iwm.org.uk/collections/item/object/38950, https://www.iwm.org.uk/collections/item/object/2323)

    또한, 공적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삶’을 추구하는 한나 아렌트의 고찰은, 그녀가 “우리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우리로 하여금 함께 생각의 길을 걷도록 이끌어 주는 사람”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한나 아렌트라면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외톨이 같은 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란 궁금함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제 지인 중에 이런 사람들이 몇몇 있어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공적 공간인 현실 사회와 스스로를 격리하였지만, 동시에 또 다른 공적 공간인 인터넷 속에서 타인과 교류하며 자신을 드러내며, ‘노동’은 거의 하지 않으나, 동시에 ‘작업’과 ‘행위’를 인터넷 속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하고 있는 이들은, 달리 보면 그 누구보다도 진정한 의미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더욱 생각해봐야겠지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훌륭한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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