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가 유능하다는 착각

범죄는 상식으로 알아본다. 합법이어도 범죄같은 짓들이 있고, 불법이어도 상식선에서 이해할 만한 일들이 있다. 이를테면 나치의 유대인 차별은 합법이었지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빈곤으로 절도에 내몰린 장 발장에게 많은 사람들이 동정하는 것과 대조된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면 상식을 배운다. 누가 가르쳐주는 건 아니지만, 과거의 여러 사례들을 기억해 현재의 사안을 평가하는 데 참고하는 적당한 기준이 바로 상식이다. 상식은…

현명함

때로는 지식을 말하기보다 말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내기보다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 때가 있다. 현명함은 행위와 무위 사이에 있다. 양 극단을 모두 떠올릴 줄 알아야 중간을 선택할 수 있다. 중간만 가라는 건 하나만 아는 소리다. 덮어놓고 반대만 하는 것들은 양자택일만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제3의 선택이 가능하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말의 힘

인간의 말은 힘을 갖고 있다. 말은 자기 자신과 세계, 그리고 타인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인간을 움직이게 만들고, 움직이는 인간은 모든 것을 바꾼다. 심지어는, 약속과 같은 말들이 매순간 바뀌는 인간의 마음과 모습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도 있다. 말의 힘은 변화와 안정으로 나타난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말은 인간에 한계를 짓는다. 인간이 하는 모든 말은 사실을 가리키더라도 의견처럼…

불멸, 영속, 지속

작업의 결과인 작품은 행위(action)의 결과인 행위(deed)보다 지속한다. 행위는 망각되기 쉽지만 작품은 사물로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체가 설립되면, 정치체는 작품을 대체한다. 정치체는 영속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치체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행위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행위자가 죽고난 뒤에도 행위는 남아 기억된다. 정치체는 작품을 대체하지만 작품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 도식에서 보면 작품은 지속하고, 정치체는 영속한다. 그러나 정치체의 영속성은 작품의…

Are: 전체주의의 기원

Arendt, Hannah,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6.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 · 박미애 역, 한길사, 2017. 김선욱,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 푸른숲, 2002. (law) 제국주의자들은 무한한 운동과 같은 팽창을 신봉한다. 크로머는 이런 형태의 통치를 '전례없는 정부형태'라고 일컬었다. 법과 조약 없이 통치자 개인의 영향력으로만 공적 사안을 처리하면서 동시에 본국과의 연관을 효과적으로 끊는 방식이다. 세실…

죽음, 타인 없는 삶

강대영 외 9명, 『법의학』 법의학에서 죽음은 생명활동이 영원히 불가역적으로 정지 및 소실된 상태이다. 생명활동은 평형상태(homeostasis)를 유지하는 운동으로서, 내부의 질병이나 외부 자극으로 인한 손상을 입었을 때 회복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반면 죽음은 자극에 대한 반응과 운동, 물질대사 능력이 모두 감소해 나가서 완전한 정지를 향해 변화하는 과정이다. 죽음의 과정은 가사-장기사-개체사-세포사의 단계로 나타난다. 죽음을 볼 때 인체는 세포<조직<장기<계통<개체로 구성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지혜와 도덕

에티엔느 질송,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이해』, 김태규 역, 누멘, 2018.제2부 제1장 「지혜」부터 제2장 「도덕적 행동의 요소」까지.Étienne Gilson, Introduction à l'étude de saint Augustin, Librairie Philosophique J. Vrin, 1949. 아우구스티누스의 지혜 개념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관 인식의 목적은 행복이다. 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피하고 선을 택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준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므로 지혜는 행복에 이르는…

한나 아렌트의 관점으로 본 고대 중국의 정치 사상

들어가며 2021년 1학기 동안 '중국철학사 입문'이라는 과목을 흥미롭게 들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고대 중국의 사상에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와 교차하는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렌트와 고대 중국의 정치 철학은 공통적으로 현실적인 문제에 주목했지만, 아렌트는 정치 현상을 그녀 고유의 인간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한 반면, 고대 중국의 사상은 공통적으로 군(君)-신(臣)-민(民)의 질서를 전제하여 더 나은 정치를 추구했다는…

[서양고대철학Ⅰ (5/6)] 플라톤 Ⅰ (윤리학, 영혼론, 인식론)

행복: 내 안의 영혼 닦기 이 글은 "서양고대철학1(강철웅, 박희영, 이정호, 전헌상 외 저, 도서출판 길)"을 읽고 제 나름대로 요약 및 해석한 글입니다. 플라톤을 살피기에 앞서 이 책은 플라톤을 설명하기 전까지 시간의 순서에 따라 각각의 장에 독자적인 학파와 학자를 배치했다. 그러나 플라톤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장을 배치하는 방식 변화했다. 윤리학 → 영혼론 → 인식론 → 형이상학 →…

[서양고대철학Ⅰ (4/6)]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이 글은 "서양고대철학1(강철웅, 박희영, 이정호, 전헌상 외 저, 도서출판 길)"을 읽고 제 나름대로 요약 및 해석한 글입니다. 철학, 더 나은 앎을 위한 싸움 제7-8장 소피스트 소피스트(sophist)는 지혜로운 자(sophia (지혜) + -ist (-한 사람)라는 일반명사이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지식 소매상이다. 소피스트들이 덕(arete)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학생들로부터 돈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적 배경을 고려하자면,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전성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