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 재즈, 인정

나는 드럼을 배웠다. 오래는 아니고 아주 잠깐. 중학생 때였는데, 어느 여름방학, 학교에서 아주 싼 값에 선생님 한 분을 불러줬다. 내 형편에 드럼처럼 돈 많이 드는 악기를 배우기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와 형편이 비슷했던 네 명의 친구가 함께 했던 걸로 기억한다. 8주 동안 배웠는데, 모두 다 까먹어서, 이제는 차라리 칠 줄 모른다고 하는 편이 맞다. 나는 늘…

부끄러움

부끄러움은 내가 내 행동을 돌아볼 때에만 느껴진다. 양심의 목소리는 다름아닌 내 목소리. 양심의 고통은 내가 내게 주는 처벌. 도덕은 자기 자신과 대화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세계다. 판단의 기준을 다른 누군가에 맡긴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판단의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요구조건만 만족하면 도덕을 완성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정해진 규칙만 따르면 이외의 논의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

인간은 물건이 아니라서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꼼짝 않을 수 있는 건 도마 위의 생닭뿐이다. 인간이 모여 만든 것들도 그러하다. 어쭙잖은 동아리부터 시작해 국가, 국제연합까지. 상황에 따라 인간은 다르게 행한다. 인간의 일에 한해서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 있다. 그렇다고 도덕이나 윤리, 정치가 아무짝에 쓸모없는 건 아니다. 견고한 기준이 없다고 손놓을…

시스템, 계, 체계, 기계, 헌법

시스템(system)은 그리스어 쉬스떼마(σύστημα)에서 왔는데, 함께(쉰, σύν) 서있다(히스떼미, ἵστημι)는 말이 조합된 단어이다. 라틴어로 치면 콘시스토(cōnsistō)인데, 역시 함께(쿰, cum) 서있다(시스타레, sistāre)는 뜻이다. 그러나 의미로 보면 쉬스떼마는 콘스티투토(cōnstitūtō)와 더욱 가깝다. 콘시스토는 멈추다는 의미에 더욱 가깝지만 콘스티투토는 설립하다 혹은 결정하다라는 뜻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당연히 콘스티투토 역시 함께 세우다(스타투오, statuō)라는 의미로 형성됐다. 쉬스떼마는 집합체, 기계, 무리, 동맹을 의미한다. 단지 멈춘다는…

사랑

사랑은 결합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만이 함께할 수 있다. 남녀간에, 부모자식 사이에, 친구 사이에 우리는 사랑한다. 그 첫 모습은 신과 인간을 엮어주는 사랑이겠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신은 인간이 아니므로. 사랑은 생성이다. 남녀가 사랑을 하면 아이가 태어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면 아이는 성장한다. 성장한 아이들이 서로를 사랑하면 공동체가 탄생한다.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면 대체로 사랑…

네거티브: 정치와 도덕의 경계에서

선거에서 상대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은 용인될까? 거짓말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른바 네거티브다. 없는 사실을 말하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감추고 싶어하는 것을 굳이 공개적으로 말하는 모습이, 상대의 약점을 잡고 늘어지는 모습이 정치인에게 바람직한 모습일까? 일단, 네거티브는 도덕적이지 않다. 모든 사람이 서로 치부 드러내기에 몰두하는 세상은 끔찍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춘 것을 드러내면 그것은 더 이상 감춘 것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우상

인간이 십자가를 우상으로 만든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의 희생을 기리자’는 주장은 십자가를 성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십자가에 기도하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인간의 주장은 십자가를 우상으로 만든다. ‘십자가 앞에서 하지 않는다면 어떤 기도도 신께 닿지 않는다’는 주장도 십자가를 우상으로 만든다. ‘우리 교회에 오면, 혹은 내 설교를 들으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그 오만한 말이 우상을 만들어낸다. 그 외 모든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끼어들기

섣불리 어떤 공동체에 끼어들려 하지 말라. 혐오를 불러 쫓겨날 수 있다. 공동체는 집단 이상이다. 공동체는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기만 한 집단이 아니라, 언어와 관습으로 묶인 관계이다. 그들만이 아는 말이 있고, 그들만 하는 행동의 양식이 있다. 그걸 아는 사람은 공동체에 빠르게 녹아들 수 있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공동체에 있더라도 쫓겨날 수 있다. 공동체 밖에 있던 사람은 공동체의…

교양 있는 사람이 되려면

교양인이라고 하면 일단 타인이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개인적인 특성은 드러내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와 반대로 교양이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의 태도가 대상의 보편적인 성질에 맞추어지지 않은 채 그의 개인적인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교양이 없는 사람은 단지 자기 멋대로 처신하면서 상대방의 감정을 염두에 두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