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부끄러움을 잊은 아이의 제자리걸음 – 「시냇물」, 「Time machine」

1. 들어가며 여진석 님(필명 '반달돌칼', 이하 필명으로 지칭)께서 쓰신 시 「시냇물」, 「Time machine」에 대해 비평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작가와 독자가 구성하는 공동체의 윤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내재적 선(internal good)'이라는 개념을 경유하여 다음 네 가지 사안에 주목했습니다. 먼저, '작품을 발표하는 행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반달돌칼의 특징은 왕성한 작품 '발표' 활동입니다. 이러한 활동이 작가-독자 공동체에서…

앙불괴어천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나는 바라지도 않는다자정을 넘겨이렇게 뒤척이는 까닭은아직 피곤하지 않기 때문이요밝은 동안 열심 내지 않았기 때문이요오늘 하루를 이대로 끝내기는 아쉽기 때문이요잠에 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천정이 나를 내려다보아나는 모로 눕는다

뫼비우스

피부의 표면을 기어가던 개미가 지쳐갈 때쯤 땅으로 꺼진 구덩이를 발견했다 구덩이에서는 무시무시한 악취가 풍겼다 개미는 표면을 따라 구덩이 속으로 기어갔다 개미가 구덩이 안으로 기어갈수록 주변은 점차 어두워졌다 절반쯤 어두워졌을 즈음 그러니까 피부의 황혼을 목도했을 때 개미는 자신이 구덩이의 경계에 서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개미는 어디까지가 구덩이인지 알 수 없음을 혹은 기어가던 모든 표면이 이미 구덩이었음을…

술집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술집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는 시를 써서 보여주었다 아내는 시를 읽고 이렇게 쓰면 더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존경하는 친구에게 같은 시를 보여주었다 친구는 실제 있던 이야기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존경하는 친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어떻게 아내를 두고 이런 글을 쓸 수 있냐고 그러고도 어떻게…

나락

어쩌지 나 큰일났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겠어 아직은 아니고 언젠가 땅으로 떨어져 알몸이 드러나면 더럽고 징그러우며 고약하고 역겨운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그래서 더더욱 더럽고 징그러우며 고약하고 역겨운 내가 어느 맑고 높은 가을날 웅성이는 광장의 단두대 앞에서 이토록 깨끗한 인간이 순교하는 영광의 날이 찾아오면 칼날에 묻은 살점이며 내 목의 짓이겨진 단면이며 흘러나오는 피냄새를 맡고 사람들은 제각기 구역질을…

[비평] 눈물의 기도는 노래가 아니다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허 연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혹 시간이 맞거든 연차를 내고 시골 성당에 가서 커다란 나무 밑에 앉는 거야. 촛불도 켜고 명란파스타를 먹고 헤어지는 거지.…

귀로

아침 출근길 우는 매미 엄마 손 잡고 울면서 걸어가는 여자아이 보도블럭 위에 채소를 늘어놓고 파는 할머니 반음씩 하강하는 시간 떨어져 백화한 매미를 환대하는 개미들 우는 아이 손 잡고 바라보며 걸어가는 엄마 소쿠리에 담긴 채소처럼 떠오르는 반음씩 하강하는 나의 유년

철학자가 사람을 죽였다

가능한 잘게 썰어야 한다 인간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철학의 이비총을 쌓으려면 그는 먼저 도구를 골라야 했다 윤리는 너무 둔했다 도덕은 쥘 손잡이가 없었다 언어가 좋겠다 아니야 그보다는 좀 더 좆같네 그때 수(數)가 보였다 그는 수를 낚아채고 숫돌에 갈았다 수에서는 불꽃이 튀고 마침내 '0=00' 따위의 모양을 갖게 되었다 철학자는 퍼렇게 날선 수를 들고 뛰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