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 Ⅱ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에 남는 것도 좋지만,내가 사랑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아 살고 싶다.살고 싶다. 살고 싶다. 이 글은 지난 1월 하순에 썼던 내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의 속편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다른 글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학자에 푹 빠져 지낸 한 학기였다. 이제야 아렌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대강 알겠다. 아렌트는 폭력을 거부했다.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복수에 대하여 1] 정의의 여신은 정말 칼을 들었나

들어가며 복수는 흔히 정의로운 폭력으로 해석되곤 한다. 이 글에서는 신화와 어원을 통해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와 언어에 녹아든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살펴보고, 복수와 정의, 폭력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복수, 정의, 폭력 신화: 복수와 폭력의 만남 네메시스와 에리니에스 칼과 시계를 들고 눈을 감은 네메시스Nemesis, by Alfred Rethel (1837) 네메시스Nέμεσις는 복수의 여신으로서, 개념신인 어둠의 신 에레보스와 밤의 여신 닉스의…

[영화 리뷰] 정이삭, 「미나리」

윤여정(김여정 아님) 배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라고 기자들은 신이 났다. 심지어 몇몇 기자들은 윤여정 배우에게 볼멘 소리를 했나보다. '해외 신문하고만 인터뷰하고, 국내 신문에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논조였다. 윤여정 배우 얼굴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영화에 이런 말이 나온다. 기억에 의존해 옮기니 토씨가 다를 수는 있다는 점 양해하길. 모니카: 여기(아칸소)에는 한인 교회가 없나요? 열다섯 명이면…

요약: 삶의 기술(機術/記述)

어두운 삶을 밝히는 요약의 빛 나는 내 기억력이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매번 웃으면서 이야기하시는 '너 어릴 때 ~' 하는 이야기들, 여자친구가 해주는 '우리 그때 기억나?' 하는 이야기들이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때마다 나는 '아 그랬나?' 하면서 눈치를 봤다. 참 신기하지, 난생 처음 듣는 철학자 이름과 사상은 그렇게 잘 말하면서, 왜 내 삶에는 그렇게 무지했을까? 오늘 그…

죽음 (Ⅰ)

내가 겪은 죽음들 나는 살면서 두 차례의 죽음을 겪었다. 당연히, 나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죽음이었다. 하나는 초등학생 시절 시장에서 사온 토끼, 토순이의 죽음이었다. 토순이에게는 여물냄새가 났고 나는 그 냄새가 싫었다. 샴푸 거품으로 벅벅 닦아 깔끔히 토순이를 씻겼다. 드라이어로 말리니 털이 보드라워 좋았다.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던 때라 품에 안고 같이 축구를 봤다. 자기 전 건초를…

내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

"그런데 꼭 내가 요리사가 되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무엇이 맛있는지, 어느 집이 잘 하는지만 알면 되지." 나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1년 동안 철학 공부에 매진하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모든 선택이 그러하듯이, 결심은 충동적이었고 설득은 논리적이었다. 읽어야지, 하고 책장에 쌓아놓은 책들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절간에 들어가 두문불출하고 책만 읽다 나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