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갓또는 나름의 일상을 찾은 듯하다. 언제나 안방에서 함께—항상 내 가랑이 사이에서—잠을 청하던 갓또지만 지음이 함께한 이후로 의연하게 자기 잠자리를 찾는다. 새벽에도 여지없이 터지는 울음소리에도—놀란 마음에 동공이 커지고 가까이 찾아와 살펴보면서도—너그러이 자기 자리를 지킨다. 몇 주 동안의 외박에도 우울해하거나 속상한 기색이 없다. 다행히 지음에게도 고양이 알레르기가 없다.
2. 희생의 기원은 이기(利己)라는 생각을 했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의자 주머니에 꽂힌 비상시 행동요령을 재미있게 읽었다. 기린이 튀어나온다든지 하는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넘기던 차에 엄마와 아기가 산소호흡기를 매는 장면에 눈이 멈췄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흡기를 차고 있던 건 엄마뿐이고 엄마 손에는 아기에게 채우기 위한 호흡기가 들려 있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하고 말았지만 아이를 낳고 길러보니 새삼 와닿는다. 부모에게는 아이를 잘 돌봐야 할 의무가 있고 또 그보다 먼저 각자 자신의 몸을 잘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부모의 이기는 희생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갓난아기의 시간은 늘 비상이다. 하루 7시간 잠을 자고 세 끼 밥을 먹는 일상은 아기에게 전혀 일상적이지 않다. 아기의 시간은 마치 블랙홀 근처 행성을 방문한 여행자처럼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영화와 현실에 다른 점이 있다면, 일상의 시간을 사는 우리 부부가 아기 주위를 공전하며 그저 기다릴 수는 없다는 점이다. 아기는 자신만의 리듬과 템포로 우리와 끊임없이 소통한다.
우리 부부가 지음과 함께 비상한 시간을 사는 만큼 일상은 무너져내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비행기 의자에 꽂힌 비상시 행동요령을 생각한다. 비행기가 급전직하하고 호흡기가 천장에서 떨어지는 경악스러운 순간일수록, 호흡기는 부모가 먼저, 그리고 아이에게, 착용해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산다. 잠은 밤에 자야 한다는 것, 밥은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한다는 것, 이 기본적인 이기주의에 부모는 힘써야 한다.
3. 우리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은 어디일까? 저마다 다른 곳을 짚겠지만 갓난아기의 살보다는 거칠고 단단할 것이다. 나는 부드럽다는 말에 주목한다. 이 말의 반댓말을 찾으려면 우리는 마찰과 저항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아울러야 한다. 아기는 마찰도 저항도 하지 않는다. 아기는 순응한다, 몸도 마음도.
아기가 유일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때가 있다. 울음을 터뜨릴 때다. 아기는 흐느끼지 못한다. 아기는 언제나 폭발하면서 운다. 이 원초적인 언어를 들으면서, 나는 인간의 언어가 흘흘 느끼는 소리와 얼마나 비슷한지 깨달았다. 폭발하는 아기는 호흡만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을 모조리 날려버린다. 웅성웅성하는 어른의 대화를 가로막고 나를 좀 봐달라고 몸부림을 친다.
그런데 아기의 울음은 마찰도 저항도 아니다. 아기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건, 어른이 주목할 때까지다. 젖을 먹이든 기저귀를 갈든 아기는 어른의 손길에 몸을 모조리 맡긴다. 아기는 순응하기 위해 우는 것이다. 이건 어른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다. 우리가 목소리를 낸다는 건 끝까지 말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기는 다르다. 아기는 모든 걸 듣겠다고 목소리를 낸다. 이 압도적인 간청 앞에서 어른의 의지는 무력하다.
아기의 울음은 말하자면 폭발하는 부드러움이다. 아무리 적막강산이라도 아기가 응앙응앙 울면 귀가 기울어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