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만지다

아기가 났다. 오늘은 아니고 6일 전. 이제야 느꼈다. 아이가 태어났구나. 아이가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보고 듣기만 했기 때문이다. 아기를 만진 건 오늘이다.

아내의 몸에서 아이를 떼어내던 날 나는 탯줄을 자르지 못했다. 병원의 방침이 수술실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절차가 완료된 뒤, 나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양수와 혈액, 태지와 함께 버둥거리는 아이를 봤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울고 있었다.

그로부터 5일간 아이와 내 사이에는 늘 유리창 한 겹이 놓였다.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영화 같은 아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이었다. 아내는 모유수유를 위해 하루에 한 번 아이를 안아볼 특권을 누렸는데, 내게 돌아와 아이가 어땠는지 성실히 전해주었다. 나는 마치 액자 소설을 읽듯이 아이의 모습을 음미했다.

내가 아이를 안아본 건 산부인과에서 퇴원하고 산후조리원에 입소한 이후였다. 며칠새 아기가 자라 이미 세상물이 들어 오염된 아비를 견뎌낼 면역력이 갖추어진 덕분이기도 하겠으나, 나는 공간의 차이에 주목했다. 두 조직의 목적만큼이나 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내가 아이의 생명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잠재적 요인이었다면, 조리원에서 나는 아이와 함께 지내야 하지만 아직 어설픈 가족이었다.

아이는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예상보다 더 조막만 하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아이는 때때로 울다 웃었다. 아이가 울면 아내와 나는 허둥지둥했다. 무엇이 불편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아이는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곧바로 울음을 그쳤다. 아기는 분명히, 아내와 내게 매번 울음으로 간청했지만, 우리는 이 작은 존재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모두가 지배되지만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이 아이러니가, 아기의 작은 크기에서 비롯됐다. 나는 아이를 만진 뒤부터, 숭고의 반대가 가엾음이라고, 그리고 가엾음은 숭고만큼 큰 힘을 발휘한다고 믿게 됐다.

옛 사람들이 말하던 자족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아기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이는 무엇도 불편하지 않을 때 잠들었다. 오히려 불편한 무언가가 있을 때 아이가 깨어났다고 말해야 옳을 듯싶다. 누군가 생물의 기본은 잠든 상태이고, 깨어난 상태가 예외적이라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는 젖을 먹다가도 잠들기를 여러 번 했다. 아이에게는 잠과 깸의 경계가 모호해 보였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아이의 귀를 만져주며 나지막히 이름을 불렀다. 그때마다 나는 선녀의 옷을 숨기는 나뭇꾼의 마음으로, 아이의 발에 입 맞추며 회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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