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식 통하는 나라 세우기 위한 고통 감내해야
- 혁명기에 통합과 공존 주장은 그럴싸한 허울
- 고시 출신 엘리트의 가짜 혁명에 속으면 안돼
- 섣불리 말하는 타협은 진정한 혁명을 망친다
1. 혁명이라는 오해
분열의 시대라고들 한다. 통합이니 공존이니 말하는 자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공자님 말씀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지금은 혁명기이다. 혁명기에는 일상적인 언어도 의미가 바뀐다. 통합과 공존은 분명 좋은 말이지만, 헌법이 자리잡아 상식이 통하는 입헌기에나 그렇다. 혁명기에 반혁명은 그럴싸한 허울을 쓰고 나타난다.
‘혁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유혈이 낭자한 광경을 떠올린다. 250년 전 프랑스 혁명기에 각인된 이미지다. 그러나 혁명은 그런 게 아니다. 혁명은 상식을 바로잡는 것이다. 불의하지만 합법적이라고 여겨지던 것을 ‘위법’으로, 정의롭지만 위법하다고 여겨지던 것을 ‘합법’으로 고치는 것이다. 혁명기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과도기이고, 입헌기는 혁명이 끝나고 헌법이 자리잡는 상식의 시대다.

2. 혁명이란 질서의 교체다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혁명을 ‘나라를 세우는 일(foundation)’이라고 정의했다. 나라란 공공(publica)의 것(res), 즉 공화국(republic)이다. 공화국은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공간이다. 하나는 자유의 확립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유를 사람들이 새로운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란 반대할 자유이다. 정치적 사안에 반대하더라도, 폭력 수단을 거머쥔 자들에 의해 불이익을 당할 걱정이 없을 때 자유가 나타난다. 질서란 견고함이다. 아무리 자유가 보장된다 한들, 누군가 또 자기 마음대로 바꾸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법이다. 법 중에서도 사람들이 쉽게 바꿀 수 없는 헌법이 바뀌어야 한다. 누구도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기 어렵다고 느끼게 될 때, 그때가 혁명기가 끝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혁명기란 무엇이 혁신이고 무엇이 범죄인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 결과물이 헌법이다.
그렇다면 혁명이란 헌법을 바꾸는 것이다. 결국 나라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이게 나라냐’고 했던 그 나라, 헌법 개정에 따라 ‘몇 공화국’이라며 이름을 붙이는 그 공화국 말이다. 혁명을 이렇게 이해하면 짐승이 털갈이(革)하듯, 우리 인간의 손 밖에 있는 듯이 보이던 질서(命)를 바꾸는 것, 그래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revolve)이라는 혁명(革命, revolution)의 본래 의미에도 맞는다.

3. 혁명기의 혁신과 범죄
혁명기란, 혁명 그 자체와 다른 어떤 시간이다. 견고한 상식에 사람들이 의문을 품을 때 혁명기는 시작된다. 구체제의 모순을 바꾸려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란범들도 자기 범죄를 옹호할 때 이를 ‘혁명’이라고 우긴다는 점이다. 아마 이완용도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할 때 나름대로 혁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혁명기란 모름지기 혁명을 부르짖는 사람은 많아도 누가 진짜 혁명가인지 알기 어려운 시기이다.
혁명기가 시작되면 정치적 자유는 잠시 중단된다. 혁명기에는 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정치란 법 안에서 서로 반대할 자유를 보장하며 의견을 나누는 일이다. 하지만 혁명기란 표면(表面)의 법이 사라지면서 이면(裏面)의 질서에 가까운 새로운 법이 나타나는 중간기이다. 그래서 혁명기에는 범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합법적이라고 여겨지던 행위가 범죄로 규정되기도 한다. 나라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테두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정치적 반대파를 보호할 법도 함께 사라진다. 정치인 암살 시도와 공공시설물 파괴가 전형적인 양상이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면 질서가 바뀐다. 바뀐 질서에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을 때, 품더라도 쉽게 드러내지 못할 때 혁명기는 끝난다. 그러나 혁명기의 종료가 언제나 혁명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60년대 헌법의 전문을 보라. 일개 투스타의 반란이었던 5·16군사정변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3·1운동과 4·19의거 옆에 당당히 서 있다. 과연 그의 내란이 사람들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한 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혁명기에는 이렇듯 혁신과 범죄가 한 끗 차이다. 범죄가 혁신을 참칭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시기가 바로 혁명기이다.
혁명기의 싸움이란 말하자면 목숨을 건 사투다. 혁명기에 패배한 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범죄’로 규정되어 헌법에 영구히 박제된다. 이렇게 보면 조용한 죽음이 아니라 효수에 가깝다. 반대로 승리한 자는 ‘혁신’의 기수가 되어 마치 신화 속 신처럼 남는다.
4. 우리나라는 혁명기에 놓였다
사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혁명기에 놓였다. 아마도 20년쯤 전, 행정부의 일부분일 뿐인 고시 출신 몇몇 엘리트들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때부터였다. 몇십 년 동안 대통령 말에 껌뻑 죽어야 했던 상식에 균열이 발생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했다. 생존과 동맹의 질서다. 각종 이해관계로 사람들을 엮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면 범죄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합법이 되는, 어두운 혁명은 십수 년간 계속됐다. 지금의 난리는 그 어두운 혁명이 표면에 드러났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혁명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헌법을 고칠 수 없고 나라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정치적 자유는 안중에도 없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혁명기의 혼란을 이용해 동맹을 늘려나가는 것, 오직 이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이런 짓은 절대로 혁명이 될 수 없다.
그들의 혁명을 부정한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관점일 뿐이다. 실제 우리의 피부에 와닿는 건 180도 다르다. 그들에게 헌법 따위는 두꺼운 책, 적당히 외우면 평생 소득을 보장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헌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면서, 이 지리멸렬한 혁명기를 이어가고 싶을 것이다. 왜냐? 그래도 되니까. 그래야 이득이니까.
국회에서 선출한 헌법재판관을 일개 공무원이 임명하지 않으면 위헌이라는 사실이 확정됐는데도 눈 감고 귀 막는 꼴을 보라. 모두가 똑똑히 본 내란에도 탄핵 심판 선고를 미루는 꼴을 보라. 시간은 흐르고 구미에 맞지 않는 재판관은 퇴임할 것이다. 그동안 다음 선거 전에 캐비넷에서 어떤 사건을 풀까 고민하면 된다. 아니, 선거 자체를 뭉개버리는 선택지도 고려해볼 만하다. 이미 헌법은 의미 없다. 생존과 동맹이라는 운동이 마치 질서처럼 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혁명기에 놓였다.

5. 혁명기에 타협을 말하는 자, 혁명을 망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과 통합해야 한다고,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게 옳은 말이니까? 결코 아니다! 혁명기에 입헌기의 언어를 쓰는 사람은 오히려 파워 엘리트의 지연 전략을 연장하는 데 복무할 뿐이다. 아하, 일이 잘 풀리면 영화 끝자락 크레디트에 작게 몇 글자 올라가듯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겠다.
분열의 시대니, 정치의 실패니 운운하는 사람들은 세상 참 편히 살아서 좋겠다. 이미 혁명기는 시작된 지 오래다. 이제는 어떻게 끝낼지를 생각해야 한다. 혁명은 정치적 자유를 새로운 질서로 만들어야만 완성되는 일이다. 생존과 동맹이라는 운동을 끊어내는 일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마음을 모아 헌법에 담는 것이다. 이 일에 온 힘을 집중해도 어려운 일이 혁명이다.
‘지금 여기에서’ 통합과 공존이 정치적 자유를 확립하는 길인가? 아니면, 일신을 보전하기 위해 파워 엘리트와 동맹을 맺는 일인가? 그건 여러분 각자가 생각해볼 일이다.
이 칼럼은 2025년 3월 30일 「시민언론 민들레」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