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얼룩소 요약

얼룩소(https://alook.so/)가 서비스를 종료했다. 지속 가능한 사업 모델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사업은 힘든 일이다. 돈을 벌어야 하고 사람을 잘 써야 한다. 얼룩소의 관계자가 이번 실패를 통해 얻어가는 것이 많길 바란다. (물론 나도 관계자 중 하나이다) 얼룩소가 사업 종료 이후 별도로 데이터 백업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나의 공간에 가 쓴 글을 옮겨본다.

나는 2021년 10월 8일 게시한 첫 글을 시작으로 마지막 글을 쓴 2023년 7월 26일까지 19편의 글을 썼다. 21명을 팔로우해 글을 읽어 보았고, 75명이 나를 팔로우해 글을 읽어 주셨다. 정치철학에 대한 글을 주로 썼다.

얼룩소의 디자인은 아무리 봐도 깔끔하다.

추가로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이 있다. 2021년 말 계정을 처음 만들고 글을 쓰던 중, 얼룩소에서 일하시던 김지은 씨를 2022년에 만났다. (사실 김지은 씨는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 ‘클럽하우스’ 어플이 유행하던 때 나는 김태국 형과 철학 수다 방을 운영한 적이 있는데, 거기 잠시 참여하셨던 게 인연이었다) 2022년 12월 19일 쓴 「재영 씨는 왜 이렇게 사내정치엔 둔해요?」를 시작으로 몇 편은 김지은 씨에게 퇴고와 편집을 받았다. 하지만 도중에 김지은 씨가 얼룩소에서 퇴사하면서 나도 얼룩소에서 글을 이어가는 데 흥미를 잃었다.

2021. 10. 8. 답글: 지방을 죽이는 ‘오염의 외주화’

국제적인 차원에서는 폐기물 수출도 같은 범주로 볼 수 있겠네요. 필요악을 감당할 사람들을 선택하는 문제는 경제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쓰신 글처럼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논의의 장을 여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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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을 죽이는 ‘오염의 외주화’

노동/인권/사회젠더/청년/교육

연키

연키·동물 해방을 꿈꾸는 초식 동물

2021/10/07

오늘 아침에는 한국일보의 기획기사 시리즈 ‘국가가 버린 주민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동안 총 8부작으로 연재된 기획기사였는데, 오늘 마침표를 찍었네요. 해당 시리즈는 소각로, 공장, 매립장과 같은 시설을 떠맡게 된 지역 주민들이 생명과 건강을 위협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어요. 이런 피해는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에 주민들이 피해를 입증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고요. 

어느 곳에 사느냐는 권력의 척도가 됐다. 문화 혜택과 높은 집값을 누리는 서울 등 대도시를 떠받치려, 소각로·공장·매립장은 인구가 적은 주변부로 떠넘겨진다.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은 살고 있고, 이들은 오염으로 병에 걸리고 목숨을 잃어간다. 

오늘 올라온 마지막 기사에서는 그간 한국일보가 만나온 지역 주민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많이 실렸어요. 환경부와 전문가들은 지역 주민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환경 검사 또한 대충한다는 대목에서는 마음이 정말 아팠습니다.

출처: pixabay

마을 주민 37명 중 12명이 암환자인데도 그런 태도를 취한다니… ‘그래서 어떻다는 겁니까. 어느 정도로 해가 간다는 건지 주민들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이래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주민은 어떤 심정일지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환경 오염으로 고통받는 지역 주민들은 떠나고 싶어도 집이 팔리지 않아 떠나지도 못하는 실정이래요.

결국 오염과 위험을 지방으로 외주줬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서울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지역 주민들의 고통이 떠받치고 있었던 거예요. 지방 문제라고 하면, 저는 안이하게 ‘인프라 부족’ 정도를 떠올리곤 했는데… 인프라에 앞서 아프지 않게, 죽지 않게 해주는 게 먼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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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새벽이면 마을에 보랏빛 오염 깔려… 왜 측정은 낮에만 하나”

◆국가가 버린 주민들 <2부>방치된 시스템 ⑧회한과 바람<끝> 어느 곳에 사느냐는 권력의 척도가 됐다. 문화 혜택과 높은 집값을 누리는 서울 등 대도시를 떠받치려, 소각로·공장·매립장은 인구가 적은 주변부로 떠넘겨진1명이 이야기 중이 뉴스에 관한 이야기 보기

천천히 기사들을 읽으면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생각나기도 했네요. 시간이 나시면 나머지 시리즈 기사들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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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8. 군인과 살인의 딜레마

“군인은 살인을 위해 존재한다.”

여러분은 이 말에 얼마나 공감하시나요? 어쩌면 거부감을 느끼는 분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을 바꾸어보죠.

“살인하지 못하는 군인은 군인이 아니다.”

이 말은 좀 납득할 수 있나요? 앞서 보여드린 두 문장은 사실 다르지 않습니다. ‘의자는 앉기 위해 존재한다’와 ‘앉을 수 없는 의자는 의자가 아니다’라는 말의 관계처럼요.

전쟁은 국가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폭력이고, 군인은 그 폭력의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군인이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겠지만, 그 평화도 결국에는 전쟁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투입된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군인은 살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직업입니다. 좋은 군인은 전투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살인이 수반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물론 손자병법에서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제일이라고 하지만요)

그런데 군인은 군인이기에 앞서 인간입니다. 문명인이라면, 인간은 평생동안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인간의 근원적인 양심을 형성하는 것이지요. 군인이 되어서도 이런 양심은 유지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군인으로 치면 20대의 청년들이 2년 미만의 훈련을 받고 전투에 투입되니 10분의 1도 안 되는 기간만에 양심을 바꾸기는 아주 어렵겠죠. (어떤 사람들은 기질상 살인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뉴스에 오르내리던 흉악범들 말이죠. 일단 이런 사람들은 예외로 둡시다)

전투에서 살상행위는 군인이기에 부여된 의무와 인간으로서 느끼는 거부감 사이에 애매하게 위치해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느 것도 선택하기에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군인이 어느 것이든 선택하더라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의무를 선택한 군인을 살인자로 매도하는 것이나 양심을 선택한 인간을 겁쟁이로 매도하는 것 둘 다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현상을 ‘살인의 딜레마’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당연히, 국가와 국민은 군인이 의무를 선택하기를 바랄 겁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제가 생각하는 명장면입니다. ‘살인의 딜레마’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거든요.

살인의 딜레마 앞에서 군인은 제복 입은 시민이자 한 명의 인간으로서 고뇌합니다. 군인이 존중받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군대를 바꾸기보다 먼저 사람들이 살인의 딜레마에 놓인 군인의 입장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은 ‘당연히’ 용감히 싸워야 한다” 혹은 “군인은 ‘당연히’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라는 생각들은 어쩌면 편견에 갇힌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용감히 싸우기나 국가를 위해 희생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군인들이 존중받지 못했던 이유는 당연한 일을 강요받았기 때문입니다. ‘여자라면 이렇게 해야지’라거나 ‘남자라면 저렇게 해야지’라는 표현이 당연했던 시절에 여자도 남자도 존중받지 못했던 것처럼요. 제가 보기에 존경심은 ‘당연하지 않은 어려운 일’을 탁월하게 해낼 때 나타납니다. 운동선수들이 탁월한 기량을 발휘할 때 그들을 존경하게 되는 것처럼요. 말하자면 군인에 대한 존중은, 시민들이 “군인은 양심의 가책을 무릅쓰고 희생한다”는 견해를 ‘당연히’ 갖게 될 때 나타나지 않을까요?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도 살인의 딜레마가 잘 나타납니다. 무수히 많은 적을 사살한 저격수도 결코 살인을 달가워하지는 않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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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8. 답글: 가족이자 친구를 쓰레기봉투에 버릴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 작가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테바이의 왕 크레온은 선왕의 아들 폴리케이네스가 죽자 장례를 지내지 못하도록 금지합니다. 폴리케이네스의 여동생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명령을 거역하고 오빠의 장례를 치르지만 결국 그로 인해 죽고 맙니다. (더 자세히 요약하면 스포가 되니 이만…) 안티고네는 살아생전 크레온 왕과 말다툼을 벌이는데 주된 논지는 ‘아무리 법이라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2000년도 넘는 이야기지만 시대를 초월해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군요. 인간과 법의 관계는 언제나 갈등에 놓인 것 같습니다. 특히나,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법이니 당연히 한계를 갖고 있겠지요. (그렇다고 법을 어기시라는 건 아닙니다, 하하…) 그래서 저는 가끔 뉴스에서 소위 ‘떼법’을 운운하는 분들을 두려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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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자 친구를 쓰레기봉투에 버릴 수 있을까?

노동/인권/사회생활/사건사고

최선영

최선영·To the MOONNNNNN

2021/10/07

제목이 자극적이지만, 자극적이어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어그로 아닌 어그로를 끌어봤습니다.

오늘 출근길에 강아지 2마리를 키우는 친구와 카톡을 하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강아지는 죽으면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뭐지? 저는 TV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키우던 강아지나 고양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울면서 동네 뒷산에 조그마한 무덤을 만들어주며 기리던 모습이 떠올랐는데, 현행법상으로는 죽은 동물의 사체를 마당이나 산에 묻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억 속에 미화가 됐었네요.;)

진짜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아래 글은 동물자유연대의 2021년 1월 6일자 글입니다.
https://www.animals.or.kr/campaign/policy/54839

글을 요약하자면,

현재 법에서 허용되어 있는 반려동물의 사체처리방법
1.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아 생활폐기물로 처리하는 방법
2. 동물병원에 위탁하여 의료폐기물 전용용기에 밀봉해 의료폐기물로 처리하는 방법
3. 동물보호법에 따른 동물장묘시설을 이용하는 방법 정도 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동물장묘시설은 ‘혐오시설’로 간주되어 설치를 하려고 해도 받아 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해마다 우리나라의 반려인구 수는 늘어만 갑니다.
[참고] 국내 반려동물 양육 가구 604만, 반려인 1448만명, 절반 이상 수도권 집중..반려견 보호자 1161만·반려묘 보호자 370만, https://www.dailyvet.co.kr/news/industry/144524  (2021.3.22 기사)

저는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지 않지만,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가족에게 그들은 친구이자 가족일텐데, 마지막 떠나보내는 과정이 처참하고 비극적이라 생각합니다.

반려동물을 보내는 마지막 과정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생각해볼 만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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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9. 양심적 병역거부, 비양심적 병역수행?

저는 군인의 양심을 철학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썼던 글에서처럼 군인은 전장에서 살인에 대한 양심의 딜레마를 겪습니다. 적을 살상하지 않으면 명령과 군인으로서 의무를 어기거나 나와 내 전우를 위험에 빠뜨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적을 살상하자니 평생 진리로 알고 살던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게 됩니다. 그래서 군인은 내면적인 난관에 빠지고, 그러한 난관을 탁월하게 극복한 사람들 즉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어떤 연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적 전투원에게 제대로 총을 쏘았던 전투원의 비율을 약 15퍼센트로 집계했습니다. 열에 한두 명만 적 전투원을 제압하는 데 ‘쓸모’가 있던 군인들이었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죠.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낮은 비율의 원인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가 죽을까봐 남도 못 죽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저 ‘남을 죽일 수 없어서 못 죽인다’는 겁니다. ‘공격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반응은 양심에서 비롯됩니다.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양심에 대해 법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철학자들이 말하는 바가 다소 다릅니다. 먼저 법학에서 말하는 양심부터 살펴봅시다.

우리는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현상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종교 때문에’ 혹은 ‘그냥 내 신념 때문에’ 살상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헌법에서 ‘양심의 자유’라는 것을 규정하고 있고 법원은 그것을 양심형성의 자유와 양심실현의 자유로 구분하여 해석합니다. 쉽게 말해 국민은 내키는대로 생각할 수 있고 국가는 그 생각에 관여할 수 없지만, 그 생각대로 국민이 행위에 옮기면 국가는 일정 수준 그 행위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고 우리나라 국방력이 사람 한 명 빠진다고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민은 양심에 따라 병역수행을 거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이 “진정한 양심”이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병역은 일반적으로 누구나 달가워하지 않는 의무니까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둘러대고 한두 명씩 전력에서 이탈하게 되면 언젠가는 아무도 군대에 가지 않게 될 겁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는 이러한 양심이 공개적으로 나타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바로 위선의 문제입니다. 양심이 드러나는 순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불일치’할 때인데, 내가 나와 일치하는지 아닌지는 나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원에서는 평소 행위가 어땠는지, 예컨대 전쟁 게임을 즐겼는지 아닌지 등을 면밀히 따져 개인의 양심을 판단합니다. 원래는 누구나 속마음이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말이나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내면의 양심을 행위의 근거로 제시하는 순간, ‘진짜 그래?’라고 묻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언제나 표리부동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지만, 양심이 문제가 되면 겉과 속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위선자’라는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죠. 역사적으로 위선자에게는 폭력이 정당화됐습니다. 그러니까 양심이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순간, 우리 사회는 그가 위선자인지 아닌지 밝히려 들고 언제든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태도로 돌변합니다. 거짓말은 ‘악하기’ 때문에 ‘선한’ 사람들은 그 거짓말을 사회로부터 제거하려 들기 때문이지요.

법학에서는 국민과 국가의 관계에 국한해 양심을 다룹니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특히 정치철학에서는 양심이 공개적으로 나타날 때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위선과 폭력의 위험을 다룹니다. 위선과 폭력은 재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철학적 문제입니다. ‘그럼 병역에 따르는 사람은 비양심적이라는 거냐?’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재판을 다룬 뉴스 기사에 많은 추천을 받았던 댓글들은 대체로 이런 뉘앙스를 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에서 위선자를 향한 적개심을 읽습니다. 나아가, 군인이 겪어야 하는 양심의 딜레마와 군인이었던, 군인이 될, 군인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딜레마도 읽습니다. 생각해보면, 군복무에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는 사람, 느끼지 않는 사람, 그걸 이용하려는 사람 모두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수학 문제처럼 해답이 있는 문제일까요? 그게 바로 제가 이 문제를 연구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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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9. 답글: 나를 괴롭히는 책들

그래서 저는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하하. 월급쟁이 시절에는 꼬박꼬박 책장을 채웠는데, 이제는 하나씩 소화하고 있어요. 뿌듯한 나날입니다.
엄두가 안 나는 책은 주로 독서모임에 가져가 읽자고 제안합니다. 눈이 활자 위를 헤맬 때 ‘나만 헤매는 게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훈련소에서 행군할 때 ‘쟤도 가는데 내가 퍼질 순 없지’ 하는 마음이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함께 헤맸던 책들 중 기억에 남는 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마르크스의 <자본>,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같은 굵직한 책이네요. 쉴러의 <미학 편지>도 읽었습니다. 읽고 난 소감은, 한 번 읽고는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이라는 절망이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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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히는 책들

생활/사건사고

신요조

신요조·노래를 부르고 글을 씁니다.

2021/10/08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보면 원없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겠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저도 사실은 그럴 줄 알고 책방을 시작했는데… 책방을 하고나서는 일을 하느라 읽고 싶은 책을 더 못읽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저 뿐 아니라 출판사든 방송국이든 책을 매일 만지고 다루는 분들은 어쩐지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시지 않을까 짐작해보는데요. 책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가혹한 물건 같습니다.
요즘 저를 괴롭히고 있는 책들을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너무 읽고 싶은데 바빠서 못읽고 있는 책이에요.

앤 카슨의 신간 <짧은 이야기들>,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이 얼마전 함께 선보였습니다. 서울에서 책방을 운영할 때 <남편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많이 영업(?)했는지 몰라요. 이렇게 두 권의 책이 한번에 나와주다니 너무 신나서 안절부절입니다. 그 뿐 아니라, 마음산책 출판사의 ‘말’ 시리즈에서는 <뒤라스의 말> 이 출간되었지요…! 흐어 나 어떡해…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혹시 괴롭히는 책들이 있으신가요? 읽고 싶은데 침만 꼴깍이고 있는 책들이 있다면 함께 댓글로 나누어주세요. ( 다 읽지도 못할거면서 이렇게 읽고 싶은 책 나누기만해도 전 왤케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런 사람 혹은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가 독어로 있을까요. 독일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말이 없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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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짧은 이야기들 – YES24

시인이자 고전학자인 앤 카슨의 첫 시집사실상 그 어떤 장르의 울타리에서도 벗어나 있는 책 1992년에 출판된 앤 카슨의 첫 시집 『짧은 이야기들』을 황유원 시인의 번역으로 난다에서 출간한다. 『짧은 이야기들』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선구적인 작품들을 …1명이 이야기 중이 뉴스에 관한 이야기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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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din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앤 카슨이『짧은 이야기들』에 이어 세상에 내놓았던 두번째 시집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을 난다에서 선보인다. 다섯 편의 장시와 한 편의 산문으로 이루어진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은 현대사회와 종…1명이 이야기 중이 뉴스에 관한 이야기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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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BOBOOK

뒤라스의 말 – 교보문고

중단된 열정,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 “뒤라스의 삶의 궤적은 언제나 나를 압도한다.” _백수린(소설가) “수년간, 여성의 위반은 시에 국한되어 표현돼왔어요. 내가 그걸 소설로 이동시켰죠. 내가 한 많은 것들은 혁신적이에요.” _마르그리트 뒤라스 “나는 오직 두 경우에만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 “뒤라스의 삶의 궤적은 언제나 나를 압도한다.” _백수린(소설가) “수년간, 여성의 위반은 시에 국한되어 표현돼왔어요. 내가 그걸 소설로 이동시켰죠. 내가 한 많은 것들은 혁신적이에요.” _마르그리트 뒤라스1명이 이야기 중이 뉴스에 관한 이야기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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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11. 답글: 기술 발전이 노동을 면제해준다면 참정권은 누구에게 가야할까요?

책이 아니라 공론장에서 아렌트를 만나니 반갑네요. 😃 제가 읽은 아렌트를 먼저 적고, 정치와 노동의 관계에 대한 제 의견을 적어볼게요.

아렌트의 노동-작업-행위 삼분법에는 각각에 대응하는 조건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혹은 『활동적 삶(Vita Activa)』이라고 책 제목을 지었어요. 아렌트가 조건과 활동을 강조했던 이유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Homo sapiens)’이라는 용어처럼 어떤 본성(nature)을 가졌다기보다는 ‘조건 지워진 존재(conditioned being)’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말씀하신 노동-작업-행위를 언급할 때 이 조건을 놓치면 의도치 않게 오독할 수 있어 주의해야 해요.

노동-작업-행위에 각각 대응하는 조건은 삶-세계-타인입니다. 먼저, 첫째 조건은 삶(life)입니다. 노동(labor)은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하는 일이에요.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일이 노동에 해당됩니다. 노동을 멈추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대신, 노동은 일시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특징을 갖습니다. 음식을 먹어치우더라도 돌아서면 배고프고, 내 배가 곯은 건 나만 안다는 거죠.

다음으로, 둘째 조건은 세계(혹은 세계성, worldliness)입니다. 물건을 만들어내거나 물건을 만드는 도구, 건축물 따위를 만드는 작업(work)은 세계에 관련된 활동입니다. 작업은 사물을 만들어내는 활동인데, 사물은 오래간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그래서 사물은 소비의 대상이라기보다 사용의 대상입니다. 작업은 지속적이고 대상적(objective)입니다. 제작된 물건은 심지어 내가 죽더라도 남아있을 것이고, 누구나 그 물건을 보고 만질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셋째 조건은 타인(혹은 다원성, 다수성, 복수성, plurality)입니다. 행위(action)는 아주 독특하고, 그래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인데요.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동이나 작업도 집단적으로 할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그런 집단은 사회(societas)라고 불러야지, 정치체(body politics)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행위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누며 공동의 세계를 만드는 정치적 활동입니다.  행위는 말과 몸짓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일시적이지만 정치체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영속적입니다. 또, 행위는 개인의 사유-판단-의지에 따라 시작된다는 점에서 개인적이지만 공통의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눈다는 점에서 객관적(objective)이기도 합니다.

정리해보면, 노동은 일시적-주관적이고, 작업은 지속적-대상적입니다. 노동과 작업은 주로 홀로 수행하는 활동이고 타인과 함께하더라도 사회적인 반면, 행위는 타인 없이는 수행할 수 없고 그래서 정치적입니다. 행위는 자신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이지만 타인과 소통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활동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렌트는 사적(private) 영역과 공적(public) 영역을 구분합니다. 사적 영역은 다른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거나 의견을 나누는 활동과는 무관한 활동들이 벌어지는 공간입니다. 대표적으로 노동과 같이 먹고 사는 일에 관한 활동들이 그렇습니다. (작업은 예술작품처럼 표현적인 활동도 포함하고 있어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공적 영역은 다른 사람 앞에서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영역입니다. 사회(society)는 경제에 대한 논의와 같이 공적 영역에서 사적인 내용을 논할 때 나타나므로 아렌트가 말하는 이상적인 정치가 불가능합니다. 정치는 의견의 영역이어서 어떤 지배적 기준이 등장할 수 없는데, 사회는 효용(utility)처럼 마치 진리와도 같은 지배적 기준이 널리 받아들여져 모든 관계를 목적-수단으로 나누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의로 보면, 아렌트는 정치 혹은 참정권의 근원을 경제적 여유나 경제적 의무 수행의 결과로 보지 않았습니다. 정치는 그냥 다른 사람이 있어서 나타나는 인간적인 현상이기 때문이죠. 『혁명론』에서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사회적인 논의에 휩쓸려 실패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정치는 노동과 결부되는 순간 의미를 잃습니다. 그렇다면 참정권은 천부인권과 같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여해야 할까요?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아렌트는 국가라는 정치적 공간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권’에 대해 논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없는 일인지도 지적했습니다.

아렌트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 제 의견을 살짝 보태보자면, 참정권은 정치적 공간을 걱정하고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공간에는 국가도, 지방자치단체도, 심지어는 내가 사는 동네도,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얼룩소도 해당됩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나름의 일을 하면서,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생각한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넓히고, 그래서 그 공간을 소중하게 여길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빛을 발할 테니까요. 물론 아렌트의 이론이 정답은 아니니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이 많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더욱 들어보아야 하겠지만,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렌트의 생각은 목적-수단의 연쇄를 넘어서 의미의 세계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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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발전이 노동을 면제해준다면 참정권은 누구에게 가야할까요?

산업/기술/IT생활/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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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39

2021/10/10

노동 면제 계급(아테네식 시민(자유민-성인-남성-비외국인)) vs 납세자정권(내돈내산 부르주아지 참정권)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여 소수의 기업 및 노동자가 전 사회가 굴러갈 만큼의 부를 창출하고 
절대 다수는 기본소득같은 사회보장제도로 그 이익을 공유받아 살아가는 구조가 된다면
정치적 의사결정권은 어느 집단에게 가야할까요? 권력 지형은 어떻게 형성될까요?

먼저 과거의 사례를 떠올려보았습니다.

A. 고대 아테네에서는 노동을 면제받은 계급이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아테네의 참정권자 ‘시민’은 비외국인+성인+남성+자유인들이었다고 하는데요. 이외 노예나 외국인 계급이 노동을 담당하여 ‘시민’들에게는 충분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B. 반면 모두에게 평등한 참정권이 보장되는 근대 민주주의를 열었던 건 경제활동인구인 부르지아지* 계급이었습니다. 납세를 근거로 참정권을 쟁취한, 즉 경제적 영향력이 정치적 영향력으로 이어진, 내돈내산 참정권이었습니다. 
*마르크스식 유산계급이라기 보다는 당시 왕정의 귀족 계급에 대응되는 자유인

아렌트는 인간의 행동은 노동(생계유지 활동), 작업(창작 등 생계유지와 무관한 활동), 행위(집단적, 사회적 활동)로 나눠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삶을 살아갈 여건-저는 안전망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이 마련된 사회에서 

실업자가 아닌 자유민들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요? 작업과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부를 창출하는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요?
이들이 시간적 여유를 근거로 사회 참여와 정치적 의사결정을 전담할 수 있을까요?
기업과 소수의 (고급)노동인력이 권력을 독점하려고 하지는 않을까요?

4차산업혁명 이후 언젠가는 도래할 미래, 권력 지형에 대한 얼룩커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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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15. 정치적 중립의 모범

에디터님 기사는 정치적 중립을 모범적으로 실현하시네요. 저는 정치적 중립이 사실과 판단을 균형 있게 제시하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정치적 중립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세계를 해석한다는 점과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벌어진 ‘모든’ 사실을 제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기계적 중립은 그 말에서부터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대신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의견과 관계된 사실을 담고, 또 각각의 한계를 명확히 밝힌다면 정치적 중립이 가능하겠지요. 저는 그걸 인간적 중립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나타나는 공론장은 그래서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상할 수 없던 의견들을 마주함으로써 낯선 경험을 하고, 그래서 내가 타인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지니까요. 한번 더 말하자면, 이때 객관은 기계적 객관이 아니라 인간적 객관일 겁니다.

반대 사례를 말하자면, 기만을 들 수 있겠습니다. 기만은 정치적 중립을 훼손합니다. 거짓말은 사실과 반대되는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짓말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실만 말하는 것 역시 기만에 속합니다. 기만을 비판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게 또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맞는 말이 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세계는 수학의 세계처럼 귀류법이 들어맞지 않는 공간이니까요. 사람이 판단을 해서 말을 했으면, 그 판단에 필요한 모든 사실을 제시해야 맞는 말이 되겠지요. 요즘 언론을 보면 유능한 기만자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맞지도 틀리지도 않은, 말 같지 않은 말들을 그럴듯하게 생산하니 말입니다.

나아가 군인의 정치적 중립 의무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묘한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제 정치적 입장과는 별개로, 군대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일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특급전사를 달기 위해 정신전력 교안을 열심히 외던 중에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아직 기억에 남아요.

“대한민국의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1인당 국민총소득 67달러의 대한민국을…”

그때가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는데요. 교안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다른 대통령은 그다지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연히 저는 제가 우리나라 국민이라는 사실과 우리나라 역사에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 왔습니다. 전현직 대통령 모두 공과를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군에서 역사 속 주요 지도자들의 공적을 말하고 싶다면 균형을 갖추어 사실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어렵다면 아예 빼는 게 낫고요. 그런데 군에서 이렇게 특정 역사를 조명하고 다른 역사를 조명하지 않는 것도 정치적 중립을 위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법원의 판단은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무튼… 여러가지 생각을 음미하게 하는 글다운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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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동 블루스 – 대장동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한국정치

천관율
alookso콘텐츠

천관율, alookso콘텐츠

2021/10/15

‘대장동’이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은 이제 없다. 하지만 대장동이 우리 모두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없다. 대장동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국민의힘 게이트’거나 ‘이재명 후보가 감옥에 갈 사건’ 둘 중 하나다. 정치적 응원구호일 뿐 내용이 텅 비었다. 그러나 대장동은 정치적 구호로 쓰고 버리기엔 아까울 만큼 흥미진진하고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심지어, 알고 보면 매우 쉽다.

여당 잘못이냐 야당 잘못이냐를 따지려면 이렇게 물어보면 된다. “그 돈, 누가 먹었나?” 지금은 이 질문만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 돈, 누가 만들었나? 대체 1조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은 어디서 솟았나? 누가 얼마를 어떻게 가져가는 게 적절한가? 이 질문이야말로, 복잡하고 지저분해서 들여다보기 싫은 대장동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이렇게 물어보는 순간, 대장동은 우리 시대의 과제를 보여주는 진정으로 중요한 이야기가 된다.

사진 한 장을 먼저 보자. 2013년께 인터넷에서 유행하여, 이제는 밈(계속 복제되어 퍼져 나가는 문화적 코드)이 된 이미지다. 이 중식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면, 우리 이야기의 절반은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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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 없는 골목이 있다. 어느 모험적인 주방장이 독특한 메뉴를 들고 식당을 연다. 점차 골목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를 따라서 독특한 식당도 모여든다. 평범하던 골목에는 어느새 ‘○○○길’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이 골목의 가치는 누가 만들었을까? 첫 번째 주방장의 공이 크기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골목을 찾는 사람들, 그들을 보고 장사하러 들어온 다른 식당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가치를 창출했다. 골목의 가치는 누구 것이라고 말하기 힘든 공동자산이다.

이 골목의 가치에 거의 확실하게 기여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건물주다. 하지만 골목의 가치가 높아지면 월세가 오른다. 어느 식당이 이 골목으로 옮기면 한 달에 500만원을 더 벌 수 있다. 그러면 건물주는 월세를 400만원씩 올려도 된다. 그 식당은 오른 월세를 내고도 100만원을 더 벌 수 있으니 옮겨올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공동의 부 중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건물주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위 사진에 등장하는 중식당의 건물주는 입지가 만들어내는 가치를 임대료로 한껏 빨아들였다.

우리의 관심사는 골목이 아니라 도시다. 도시는 공동의 부를 골목보다 훨씬 크게 창출한다. 특히 지식은 한곳에 모일수록 시너지가 나서, 도시는 모든 지식 노동자를 합친 것보다 더 생산적이 된다. 미국 IT 산업의 중심지 실리콘밸리가 그렇고,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판교가 그렇다. 대장동은 판교의 턱밑에 있다. 대장동의 가치는 판교에서 형성된 공동의 부가 흘러넘친 결과다.

ⓒalookso

2.

대장동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은 셋이다. 첫째, 부동산 개발업자가 있다. 화천대유나 남욱 변호사 같은 구체적 이름도 중요하지만 우리 이야기에서는 잊어도 좋다. 둘째, 정부가 있다. 대장동에서는 기초단위 지방정부인 성남시이지만, 여기서는 ‘정부’로만 생각하는 게 더 낫다. 셋째, 정부를 운영하는 사람, 그러니까 선출직 정치가가 있다. 여기서는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다. ‘정부’와 ‘정부 운영자’를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 왜 그런지는 나중에 나온다.

먼저 부동산 개발업자부터 무대에 세워보자.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부동산의 가치는 우리가 만듭니다. 첫째, 미래에 가치가 높아질 토지를 먼저 알아봅니다. 우리의 수익은 남들보다 먼저 잠재적 가치를 발견하는 능력 덕입니다. 둘째, 부동산 개발사업은 아주 위험합니다. 돈을 번 사업만 뉴스에 나와서 그렇지 사실은 쫄딱 망한 사업도 많죠. 우리의 큰 수익은 큰 위험을 감수한 대가입니다.

개발업자의 주장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있다. 대장동 이후 도시개발은 공공개발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졌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민간은 돈이 안 될 땅에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가더라도, 그 손해는 개발업자가 보고 끝난다. 공공은 돈이 안 될 땅에 다른 이유로 들어갈 수 있다. 특히 표가 걸려 있을 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손해는 납세자가 떠안는다. 민간개발의 실패는 시장이 처벌하지만, 공공개발은 이런 식으로 실패가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더 의미심장한 논거는 두 번째다. 위험 감수의 대가라니, 어떤 위험? 바로 여기에 도시개발의 본질이 담겨 있다.

성남판교대장 도시개발구역. 연합뉴스

부동산 개발의 핵심은 인허가다. 정부가 땅의 용도를 아파트로 정하는지 논밭으로 정하는지, 용적률은 얼마나 허용해 주는지에 따라 땅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진다. 개발업자가 놀라운 안목으로 가치가 오를 땅을 사 모았는가? 그래봤자 인허가가 없으면 돈은 못 번다. 개발업자는 우선 ‘인허가 리스크’를 진다.

더 큰 고비도 있다. 알박기다. 이름이 주는 인상과 달리, 알박기는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이다. 가상의 예를 들어보자. 여기 필지 1000개짜리 개발 후보지가 있다. 필지 하나의 시장가격은 2억원, 다 합치면 2000억원이다. 1000필지를 전부 사들여서 개발 허가만 받으면 가치가 1조원이 되지만, 하나라도 사는 데 실패하면 개발이 불가능한 땅이다. 당신은 이 필지 중 하나를 갖고 있다. 어느 개발업자가 999개를 사들이고, 마지막으로 당신과 협상을 한다. 당신은 얼마를 부를까? 정가대로, 2억원?

그럴 리 없다. 당신은 7000억원을 요구해도 된다. 개발업자는 당신의 땅을 2억원에 사는 순간, 땅값을 제외하고 8000억원을 번다. 땅을 사는 데 실패하면 8000억원은 고스란히 사라진다. 개발업자는 당신의 요구를 받아들여 1000억원이라도 벌거나 사업을 접거나 둘 중 하나다. 이것은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도시개발에서 토지 매입의 리스크를 잘 보여준다. 나중에 팔수록 협상이 엄청나게 유리해진다. 알박기에 웃돈을 주다 보면 개발업자의 수익은 0원에 가까워진다.

공공이 개입하면 토지 매입 리스크는 상당히 완화된다. 정부는 토지수용권이 있다. 당신에게 “7000억원은 너무 심하니 3억원 받고 파세요”라고 명령할 수 있다는 얘기다(이러다 보니 토지수용 보상액이 적다며 철거에 저항해 싸우는 상황이 자주 생긴다). 분쟁이 나도 시장이 아니라 정치가 해결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있는 토지수용위원회가 처리한다. 수용권이라는 정치적 힘이 없으면 부동산 개발 시장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3.

이제 두 번째 주인공인 ‘정부’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부동산의 가치는 우리가 만듭니다. 우리가 인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아무리 땅의 잠재가치가 높아져도 논밭은 계속 논밭입니다. 우리가 토지수용을 도와주지 않으면 민간은 수익을 내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개발수익이 낮아지면 개발업자가 줄어들 것이고, 결국 도시개발 자체가 멈추게 됩니다.

이 구조에서, 민간 개발업자의 계산법은 단순해진다. 정부가 쥔 인허가권과 수용권을 가져올 수 있다면 개발사업의 리스크는 극적으로 줄어든다. 대장동에서는 ‘민관 합동개발’이 그 역할을 해줬다. 공공이 발주한 사업이므로 가장 골치 아픈 두 리스크, 인허가 리스크와 토지 매입 리스크가 사라진다.

미분양 리스크도 거의 없었다. 이재명 현 민주당 대선후보가 경기도지사로 재직하던 2019년 10월, 경기도 산하 경기연구원은 ‘개발이익 공공환원 사례 심층연구’라는 155쪽짜리 보고서를 낸다. 보고서는 대장동 사업이 공공환원의 모범사례라는 취지로 썼다. 보고서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대장동 역시 주택건설 사업자들의 입장에서는 분양 리스크 없이 사업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이는 PF[프로젝트 파이낸싱(사업자금 조달)]를 담당하는 금융권도 마찬가지였다.”(보고서 113쪽)

민주당 일각에서는, 대장동 사업 기획 당시에는 부동산 경기가 나빠서 대장동도 수익성이 불투명했다고 주장한다. 이재명 경기지사 시절의 경기연구원 보고서만 봐도 이는 과장에 가깝다.

4.

여기까지만 보고 ‘대장동 사업은 민간 개발업자 특혜 사업이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아직 이르다. 분명 성남시는 민간 개발업자의 최대 골칫거리를 제거해줬다. 문제는 그 대가를 누가, 얼마나 받아냈느냐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장면에서 시장을 도입하는 걸 좋아한다. 우리도 잠시 경제학자 흉내를 내 보자. 개발업자는 인허가권과 토지수용권을 원한다. 이걸 사고파는 시장이 생긴다면, 개발업자는 낼 수 있는 최대 액수를 써낼 것이다. 1조원을 번다는 계산이 서면, 9000억원 정도는 써낼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더 비싸게 써낸 경쟁자에게 밀려난다.

더 유능한 개발업자가 더 유리할 것이다. 1조원을 벌 업자보다는 1조 2000억원을 벌 업자가 더 비싸게 써낼 수 있다. 따라서 개발권은 최고로 효율적인 민간업자에게 돌아가고(좋은 일이다), 정부가 버는 돈도 가장 많다(역시 좋은 일이다). 이것이 경매 시장이다. 한국 정부는 주파수를 경매에 부쳐 통신사들에게 판다. 같은 원리다.

그러나 개발업자는 9000억원이나 정부에 주고 싶지는 않아서, 가능하다면 암시장을 알아볼 것이다. 인허가권을 쥔 관료를 뇌물로 매수할 수 있다면 완전히 남는 장사다. 부산 해운대 엘시티 개발은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 엘시티는 인허가권과 토지 매입 리스크를 공공이 다 해결해준 후, 민간개발로 전환해 개발업자가 수익을 전부 가져갔다. 분양 수익만 3조원대로 추산된다. 이 과정에서 개발업자에게 뇌물을 받은 혐의로 부산시 공무원 9명이 기소돼 재판 중이다. 대장동 사업도 민간개발을 추진하던 2005년, 공무원 5명이 개발 정보를 유출하다 적발됐다.

대장동의 민관합동 개발 모델은 성남시가 약 4000억원을 확보하고 시작한 계약이다(이 액수는 추후 5500억원까지 늘어나고, 이 셈법에도 논란이 있다). 구도심 공단 땅을 사서 공원으로 바꾸는 사업에 민간 개발업자가 2600억원을 냈다. 대장동 임대주택 부지를 현금으로 받을 권리도 가져왔다. 이 가격은 공모 당시 약 1500억원이었고, 이후 1800억원으로 늘었다.

이것은 일종의 ‘초보적 경매’다. ‘공원 사업’과 ‘임대주택 부지’ 두 요구사항에 응하기만 하면 70점 만점을 줬다. 민간 사업자는 최고액을 써내려 경쟁할 필요는 없었지만 최저 입찰가는 맞춰야 했다. 이것만으로도 ‘암시장이 표준’이던 도시개발에서 공공성을 강화했다고 볼 수는 있다. 대장동 개발은 엘시티 개발보다는 확실히 낫다.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에 위치한 엘시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엘시티 개발보다 낫다’와 ‘최선이었다’는 같은 말이 아니다. 대장동 사업에서 민간 개발업자가 가져갈 세전 수익은 총 8500억원으로 추산된다. 이 결과는 누가 봐도 이상하다. 인허가 리스크, 토지 매입 리스크, 미분양 리스크가 모두 낮은 대장동에서 8500억원을 ‘위험 부담의 대가’로 볼 수는 없다. 남다른 안목의 대가도 아니다. 판교 턱밑 대장동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 대단한 안목이 필요하지는 않다. 부동산 상승으로만 설명하기엔 너무 큰 수익이다. (대장동은 누구 주머니로 들어가는가)

이재명 후보는 ‘공공이 가져온 5500억원’은 계속 강조하면서, ‘개발업자가 가져갈 8500억원’은 외면한다. 이 결과는 성남시의 최선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이 이상적인 경매 시장이었다면, 개발업자는 성남시에 낼 돈으로 5500억원보다 훨씬 비싼 값을 적어냈을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상적인 경매 시장만큼 환수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지금 이 배분이 현실에서 최선이었을 가능성 역시 별로 없다.

그렇다면 실제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째, 초보적 경매처럼 보였던 대장동 개발도 실은 암시장이었을 수 있다. 모종의 이유로 민간에 이익을 몰아주려고 성남시 관료들이 의도적으로 초과수익 배분 조항을 빼버렸을 수 있다.

‘대장동 개발 사업 특혜’ 의혹의 핵심인물로 꼽히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 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유동규’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대장동 개발사업을 추진할 때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으로 있었다. 성남도시개발공사 실무진은 민간의 이익이 과도하게 날 경우 초과수익을 시와 나누는 조항을 제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조항을 유동규 본부장이 주도한 전략사업팀이 빼버렸다고 검찰은 보고 있다. 유 전 본부장은 현재 구속돼 수사를 받고 있다. 화천대유는 유 전 본부장에게 예상 개발이익의 25%(약 700억원)를 약속했다고 검찰은 보고 있다. 이 가능성을 확인하는 건 검찰과 법원의 몫이다.

둘째, 뇌물이나 매수가 없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까? 그럴 리는 없다. ‘개발업자가 가져갈 8500억원’이 대체 어디서 왔는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5.

이제 우리의 세 번째 등장인물, ‘정부 운영자’를 만날 차례다. 선출직 정치인인 정부 운영자의 이익과 정부의 이익이 늘 같지는 않다. 이재명 후보 주변 인사들에게 “왜 초과수익 배분 조항을 넣지 않았나?”라고 물어보면 이런 답이 돌아온다. “이건 상대가 있는 협상이다. 초과수익 배분 조항을 넣으려 하면, 민간도 처음에 성남시에 줄 돈을 줄이자고 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 성남시에 더 유리한지, 정책적 판단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선불로 확실한 현찰을 받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성남시의 관점에서 보면 그 반대가 정석이다. 처음에 받을 돈을 줄여서라도 초과수익 배분 조항을 넣는 게 이득이다. 이건 부동산 폭등을 예측할 수 있었는지와는 무관하다. 초과수익을 민간이 지나치게 가져가는 결과도 성남시에게는 일종의 리스크이므로, 약간의 현찰을 들여서 리스크를 회피하는 계약이 더 낫다. 공공이 발주하는 민간투자사업에서는 기본으로 정착된 원리다.

지난 28일 중앙보훈회관에서 열린 개발이익 환수 법제화 긴급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이재명 후보. 연합뉴스

그러나, 선거를 치르는 정치인인 성남시장의 관점에서는 셈법이 다를 수 있다. 임기 중에 치적으로 쓸 확정수익이 미래의 더 큰 수익보다 요긴하다. 2018년 1월, 임기 종료를 6개월 앞둔 이재명 성남시장은 1800억원을 성남시민 모두에게 나눠주는 ‘시민배당’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장동 임대주택 부지에서 나올 그 돈이다. 이때는 그가 경기도지사 출마 결심을 굳힌 시기다. 시민배당은 후임인 은수미 시장 때 없던 일이 됐지만, 이재명 시장은 이 선언으로 ‘이재명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여기가 바로 대장동에 대한 평가가 근본적으로 갈리는 대목이다. 이재명 시장은 당장 쓸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려고 성남시의 미래 수익에 해를 끼쳤는가? 그렇다고 판단한다면 이것은, 묽은 의미로, 부패다. 부패 연구의 권위자인 경제학자 요한 람스도르프는 책 《부패와 개혁의 제도주의 경제학》에서 이렇게 썼다. “부패란 사적 이익을 위하여 공적 권력을 오용하는 것이다. ‘사적 이익’에는 돈이나 값진 자산 외에, 권력이나 지위의 향상도 포함된다.” 즉, 선출직 정치가가 자신의 정치적 전망을 위하여 맡은 정부의 미래 수익을 희생시켰다면 그것은, 일상 용법과는 다르지만, 넓은 의미로 부패의 정의에 들어온다.

반대로, 이재명 시장은 주어진 제도적 조건과 제약 안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결과를 냈지만 결과가 부족했을 뿐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인허가권과 토지수용권을 제대로 경매하는 제도는 없다. 기초단체장이 만들 수 있는 제도도 아니다. 따라서 ‘초보적 경매’에 그쳤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미래의 불확실한 수익보다 현재의 확실한 수익이 성남시를 위해서도 더 낫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시민배당은, 자신의 정치적 전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동산 개발 수익은 시민 모두의 것이라는 철학의 산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실제로 일어난 일은 부패가 아니라 ‘선의의 오판’에 가까워진다.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대장동 개발사업은 인허가권과 토지수용권을 암시장에서 거래했던 과거의 개발사업과 비교한다면 진일보했다. 땅의 잠재가치 중에 일부는 공공이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이재명 후보가 대장동 사업을 ‘치적’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장동 개발사업에 암시장적 요소가 없었다고 단언하기 이르다. 수의계약으로 화천대유를 밀어줬다는 의혹이 사실인지, 유동규 전 본부장이 700억원을 약속받은 혐의가 사실인지, 초과수익 배분 조항을 유동규 전 본부장이 빼버렸다는 의혹이 사실인지 등이 문제다.

셋째, 만약 암시장적 요소가 없었다는 결론이 난다면, ‘개발업자가 가져갈 8500억원’은 대체 무엇일까? 둘 중 하나다. 정부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거나, 정부 운영자의 이익과 정부의 이익이 달랐을 때, 정부 운영자가 제 이익을 먼저 챙겼거나. 이것은 보는 사람의 판단 문제다. 후자라고 해도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선출직 정치가가 비판받을 이유로는 충분하다.

6.

대장동은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만든 공동의 부’를 어떤 식으로 다룰 것이냐는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이런 공동의 부는 땅에 고이는 경향이 있어서, 사회가 원칙을 세우지 않으면 어느 순간 지주와 부동산 개발업자의 손에 공동의 부를 쥐여주는 사유화가 일어난다.

관료들은 뇌물을 받고 인허가를 내준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검찰에 고발당할 위험이 생기므로, 개발업자는 법조계 인맥에도 넉넉히 투자한다. 화천대유가 권순일 전 대법관을 고문으로 앉힌 사례는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언론도 리스크 관리 대상이다. 신문을 뒤덮는 분양 광고의 목적이 분양 홍보만은 아니다. 엘시티 개발 과정에서 보도를 무기로 광고비를 뜯어낸 지역 신문사 사장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조 단위의 개발수익을 놓고, 도시개발 자본과 관료‧법률가‧언론이 연합해 팀을 꾸린다. 이것은 한때 ‘개발 동맹’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도시개발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사유화 동맹’이 더 적절한 이름이다. 골목 레벨의 건물주와 도시 레벨의 개발자본‧엘리트 연합은 본질이 같다. 둘 다 공동의 부를 사유화한다. 도시개발 스캔들은 이런 식으로 한국 사회의 어떤 작동 원리를 드러낸다. 이것이야말로 대장동이 우리에게 던진 진짜 과제다. 

by 천관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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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13. 연애의 조건

연말이라 술자리가 많습니다. 서른 즈음 20대 후반 남자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는 비슷비슷할 겁니다. 이미 취업해 안정을 꿈꾸는 친구, 꿈을 좇아 일상을 바친 친구, 방황하는 친구… 사람마다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사랑 이야기에는 모두가 눈을 반짝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어떻게 만나느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 하는 대화는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습니다.

요새 연애하는 사람 보기가 꽤 어렵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서는요. 저는 고등학교 선배를 대학시절에 꾀어 7년째 만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결혼까지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 중 대부분은 연애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연애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쉬이 알리지 않습니다. 확신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여자친구가 있느냐 물어보면, 처음에는 연애하지 않는다고 답하다가, 결국 나중에 털어놓습니다. 사귀긴 사귀는데 아직 공개하기에는 부담스럽다는 겁니다. 왜 부담스러운지는 더 캐묻지 않았습니다. 우정을 위해서는 이 정도 거리가 적당하니까요. 그런데 굳이 묻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은 말을, 친구가 꺼냈습니다.

어렸을 때 만나는 게 참 좋은 것 같아. 다 커서 사람을 만나면 조건부터 보여. 순수한 사랑은 어려울 것 같아.

무슨 조건이냐 물어보니 여러 가지를 늘어놓습니다. 직업, 연봉, 재산, 가족, 학벌, 외모, 취미, 나이 등등… 취하지만 않았다면 밤새도록 말하겠다 싶었습니다. 친구는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마음보다 이런 조건들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조건 중에서 어느 정도만 만족하면, 사랑하지 않아도 일단 만남을 시작해볼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만나면서 알아가다 아니다 싶으면 멈추는, 그런 방식의 관계가 꽤나 흔하게 보입니다.

이제 더는 첫눈에 반하지 못할 것만 같다고도,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불 같은 사랑을 해본 적 없던 것도 아닙니다. 제가 압니다. 뜨겁게 사랑했고 아프게 헤어졌던 그 연애의 역사를 저는 옆에서 지켜봤거든요. 그래서 달리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던 지상렬의 건배사를 처음 듣던 때처럼, 저는 입을 다물기로 했습니다. 조건을 따지는 사랑을 해본 적이, 제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조건을 따지게 됐지만, 한때 조건 없는 사랑도 해봤으니까요.

물론 앞날은 모를 일입니다. 모든 걸 잊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그런 사람이,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이라도 있나요? 그 친구를 인생 다 산 사람처럼 후려치기는 싫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됐다는 것, 다시 말해 조건을 따지지 않는 사랑을 이제 다시 하기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 않았느냐는, 자조 섞인 질문은 충분히 존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조건을 앞세우며 사람을 만나다 보면 오던 사랑도 도망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숨길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흠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작정하고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을 하면 콩깍지가 쓰인다는데, 그 말이 딱 맞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으면 흠도 먼지도 안 보이는 법입니다. 아니, 보여도 안 털기로 한다는 말이 더 맞겠습니다. 모든 관계에는 사실보다 믿음이 먼저라는 겁니다. 모든 사실은 믿는 대로 보입니다. 반드시 믿음을 갖게 하는 무언가는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먼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그 안에 들어설 수 없으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연애에 조건을 앞세우기 시작했다는 말을, 다른 친구들도 꽤나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다들 한 번쯤은 결혼을 꿈꾸던 사람을 만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하나같이 꼽은 결별 사유는, 바로 불가항력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사람은 참 좋은데, 결혼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근무지가 달라서, 여자친구 가족과 다퉈서, 아직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해서, 일에 집중해야 해서, 모아둔 돈이 없어서, 이러해서, 저러해서, 결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몇몇 친구는 아직도 그때의 연인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과 예전의 그 사람을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 이건 마음처럼 쉽게 멈추기가 힘들다고도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조건을 방패처럼 앞세워 오히려 사랑을 피하는 듯한 요즘의 태도가, 사랑하는데도 헤어져야만 했던 과거의 사건을 반복하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냐는 거죠. 그런데 하나 더 있습니다. 요즘 친구들에게서 느껴지는 일관적인 태도는 ‘위험 피하기’입니다. 과거의 사랑과 헤어졌던 이유도, 지금의 사랑을 마다하는 이유도 모두 불확실한 상황에 삶을 내던지지 않으려는 의지에 뿌리를 내린 듯합니다. 연애란, 사랑이란, 더 나아가 삶이란, 기본적으로 모험일진대 그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친구들이 제 주변에 많이 보인다는 겁니다. 과거의 아픔을 피하기 위해 철저히 계산해서 위험을 피하려는 태도 말입니다.

혹자는 조건을 따지는 사랑을 어른의 사랑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에도 우리는 매우 많은 조건을 따졌습니다. 교복을 입고 뿜어내는 생기, 내게만 보이는 미소, 다정한 눈빛, 수업시간에서 보이는 태도, 친구를 대하는 말투, 옆을 지나칠 때 나는 비누향기, 이런 모든 조건들이 첫사랑이라는 이상을 만들어냅니다. 그 중에 하나라도 모자라면 우리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때로 그때의 사랑을 동경하는 건, 무모한 사랑에 겁 없이 뛰어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창시절이야말로 가장 두터운 보호를 받던 시절이었다고, 그래서 그런 사랑이 가능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몇몇 친구들을 보면 보호받는 환경이 꼭 사랑의 용기를 길러주는 건 아닌 듯합니다. 학창시절에도 여전히 사랑을 주저하는 친구들은 있었습니다. 흔히들 불안정하다고 평가하는 삶을 사는 친구들이 깊은 사랑을 나누기도 합니다. 사랑의 용기에 또 다른 조건을 들이미는 태도는 왠지 비겁해 보입니다.

사랑 앞에 계산기를 두드리는 건 성장의 증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은 이상한 겁니다 / 전지적 관찰자 시점, 최재천 유튜브 ‘최재천의 아마존’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은 이상한 겁니다 / 전지적 관찰자 시점, 최재천 유튜브 ‘최재천의 아마존’

저는 최재천 교수님의 유튜브 영상을 즐겨보는데요. 우리 사회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일은 손해라고 인정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 출산율과 혼인율이 낮아지는 이유도 우리 세대 사람들이 계산을 많이 하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주장도 흥미로웠습니다. 헛소리로 볼 게 아닌 것이, 사랑과 삶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태도는 제 친구들에게서도 자주 보였던 모습입니다. 게임을 해도 최적화된 진행방식인 공략이나 테크트리를 찾아봅니다. 데이트를 해도 맛집 검색을 하고 가고요, 물건을 사면 비교검색과 후기영상이 필수인 세대입니다. 시험공부를 하더라도 무슨 쌤 강의가 좋다더라, 무슨 교재가 좋다더라. 진로도 안정성을 위한 최단경로에 맞추는 세대가 제가 속한 세대입니다.

당연히 이런 전형적인 모습에 한두 가지씩은 어긋난 모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저도 MZ니 뭐니 하면서 여러 사람을 단일한 형상으로 후려치는 태도를 참 싫어합니다. 그래도 여러 친구들의 개별적인 모습을 겹쳐 그려보면, 이런 가상의 인간형이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적어도 제가 주변에서 지켜본, 서울에서 중산층 가정에 태어나 공교육과 사교육을 경험하고 대학에 들어가 취업준비에 2-3년을 쓰고 마침내 입사해 30살을 앞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모습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선후배를 보자 하니 앞뒤로 몇 살을 더하고 빼도 아마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닐 겁니다.

삶이 수능의 연장선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제 또래 사람들은 모두가 평생에 걸쳐 고시공부를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미래의 실패한 나를 떠올리고 그가 되지 않기 위해 극도로 경계하는 태도… 삶의 모든 순간을 이익과 손해로 계량하는 모습, 사회의 규칙에 순응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모습, 평준화된 인간을 목표로 삼고 새로운 도전은 꺼리는 모습이 아마 이런 태도와 연결될 겁니다. 여기서 패배자에 대한 모욕과 승리자에 대한 동경이 팽배해지면, 흔히 능력주의의 부작용이라 일컫는 모습이 나올 겁니다. 그런 모습을 저는 ‘연애의 조건’이라는 표현에서 보았습니다.

사랑은 계산이 될까요? 저는 현대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서 답을 찾아봅니다. 아주 오래된 서사시인 헤시오도스가 쓴 <신통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맨 처음에 생긴 것은 카오스이고,
그 다음이 눈 덮인 올륌포스의 봉우리들에 사시는 모든 불사신들의
영원토록 안전한 거처인 넓은 가슴의 가이아와
불사신들 가운데 가장 잘생긴 에로스였으니,
사지를 나른하게 하는 그는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가슴속에서 이성과 의도를 제압한다
.”

사랑은 다른 무언가를 낳게 하는 힘입니다. 세상에 처음 나타난 건 아무 존재도 질서도 없는 카오스, 공허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발붙여 살아가는 땅,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가이아가 나타납니다. 세상에 그 둘뿐이었다면 아마 아무것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 에로스가 나타납니다. 에로스가 나타나고 나서야 우리가 익히 아는 제우스와 같은 다른 신들이 나타납니다. 사랑으로 카오스가 에레보스(어둠)와, 가이아가 우라노스(하늘)와 맺어져 다른 신들을 낳거든요.

에로스는 신 중에 가장 잘생겼습니다. 여기서 ‘잘생겼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칼로스(καλός)는 ‘고귀하다’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고귀함은 “불운을 침착하게 견뎌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어떤 이성과 의도도 무력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 앞에서는 불멸자인 신도 필멸자인 인간도 바보가 됩니다. 여기에 사랑의 본질이 있습니다. 바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계산할 수 없는 운명을 견뎌낼 힘도 줍니다. 물론 콩깍지가 씌여 예측 가능한 쉬운 문제도 못 보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삶에 예측 가능한 일만 발생하던가요? 우리는 모두가 불운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불운 속에서 살아남게 해줍니다.

사랑을 바보 같은 욕망으로 폄하하는 태도를 가장 널리 퍼뜨린 건 아마 플라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제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욕정(에로스)을 크게 비판했거든요. 그렇지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플라톤의 말은 ‘사랑이 계산 불가능하니 나쁘다’는 비판이 아니라, ‘계산 불가능한 사랑도 최대한 절제해보라’는 권고에 가까웠으니까요. 심지어 플라톤은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게 된 것에 대해서 어쨌든 제일 마음을 쓴다”는 점도 인정했답니다.

핀트가 약간 안 맞긴 하지만, 십 년도 넘은 가요 중에 <사랑의 바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여기서 바보는 열심히 돌본 상대방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풍차에 돌진하는 돈키호테가 되기를 주저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사랑 앞에서 ‘플러스’ 버튼이 빠진 계산기만 두드리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어쩌면 더 바보같이 보이지는 않을까요? 운에는 불행만큼 행운도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요. 사랑이라는 바보 같은 게임에 뛰어든 모든 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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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19. 재영 씨는 왜 이렇게 사내정치엔 둔해요?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정치에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왜 사내정치에는 둔해요?”

얼마 안 되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들은 말이었습니다. 작은 스타트업에 다니던 시절, 같은 팀에서 일하던 팀원 한 분(아마 직급체계가 잡힌 대기업이었으면 쳐다도 못 볼 대선배였을 겁니다)께서 제게 핀잔 아닌 핀잔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회사생활을 하면 좋은 회사원이 될 수 없으리라는, 저를 생각하는 마음에 부러 꺼내신, 쓴소리였을 겁니다.

실제로 저는 정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한 정치까지 지켜볼 만큼 ‘정치’라는 현상을 저는 흥미롭게 여기고, 심지어는 ‘정치’철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까지 받았죠. 그런데 유독, 사내정치에는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근무시간에 웃으며 함께하는 분들을 위선, 모략, 암투, 모함으로 얼룩진 시각으로 보다니! 예의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 자기 이익을 좇는 게 썩 쿨해 보이지도 않았고요.

사내정치가 뭐 대수라고? 으아아아!

 곧 죽어도 바른 말, 옳은 소리,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제 판단과 얽힌 수많은 이해관계자의 반응은 봐도 못 본 척하곤 했지요. 심지어 결정권자의 의중도 제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 데이터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 입사 전후 대표의 설명으로 제가 이해한 회사의 비전, 스타트업의 초기 멤버라는 자부심이 저를 움직이는 힘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요소를 고려해 회사의 이익보다 제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으로 동료들에게 ‘비칠’ 것을 저는 두려워했습니다. 저의 유별난 도덕관이 사회초년생의 비장함과 뒤섞여 매일 아침 순교하는 마음으로 출근하기도 했습니다. ‘여긴 스타트업이다! 나는 회사의 기둥이다! 나의 선택이 회사와 모든 동료들의 미래를 좌우한다! 으아아아아!’ 당시의 제 마음가짐을 묘사하면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요? XD

사내정치가 대수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몇 년이 흐른 요즈음도 같은 마음가짐을 갖고 사냐 물으신다면, 저는 이른바 ‘속물’이 됐습니다. 현실에서 순수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순수한 악행만큼이나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이제 저는 잘 새기고 삽니다. 물론 이 교훈은 경험으로 얻었고요. 제가 아무리 선을 추구하더라도 제가 한 일이 다른 사람이 한 일과 뒤섞여 나쁜 결과를 낳는 모습을 보았거든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삽니다. 살아가는 사람의 수만큼 수많은 시각이 세계를 비추고, 그만큼 많은 선과 악이 세계에 공존합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수많은 해석을 낳는 것처럼, 우리의 손을 떠난 모든 일은 우리의 목적과 다르게 움직입니다. 이 자명한 사실을 저는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정치철학을 업으로 삼다가 한 발짝 물러서 취미로 삼으니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사내정치는 정치만큼 중요합니다. 우리가 정치인을 보고 응원하거나 욕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거나 분에 넘친 사람들을 나무라고, 내 뜻에 맞는 사람들과 연대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맞서는 일만큼, 사내정치는 중요합니다.

행위로 비친 의도는 우리가 품은 목적과 다르게 해석됩니다. 여기서 겉과 속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한데요. 겉모습은 누구에게나 드러나지만 속마음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습니다. 행위, 의도, 목적 중에 겉에 드러나는 건 행위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행위를 하기 전에 속마음으로 목적을 세웁니다. 목적에 따라 한 행위는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제 행위를 보고 속마음으로 제 의도를 파악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종의 불일치가 발생합니다. 제 마음속에 세운 ‘제 행위의 목적’과 타인 마음속에 떠오른 ‘제 행위의 의도’는 대체로 일치하지 않거든요. ‘이심전심’이나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는 말은 신화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이 제 목적을 이상한 의도로 오해하기 십상이니까요. 오히려 마음이 통하는 상황이 더 기적 같은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최종보스에게 잘 보이면 이기는 게임

사내정치가 발생하는 이유는, 바로 이 불일치, 즉 목적과 의도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속마음은 결코 겉모습이 될 수 없다는 진리 때문이지요.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의도로 비춰질지 염려합니다. 더군다나 제 이익이 타인에 달려 있다면, 이 염려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 될 겁니다. 제 목적은 이미 중요하지 않죠. 제가 아무리 좋은 뜻으로 일한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다른 사람이 제 의도를 나쁘게 해석하면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걸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위선은 기본, 사기는 옵션이 됩니다. 목적과 의도가 어긋나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모종의 게임처럼 대합니다. 타인으로 하여금 내 의도를 좋게 해석하도록 만들면 좋은 점수를 얻는 게임이지요. 우리의 목적과 의도를 완전히 일치시킬 수 없으니,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위선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목적이 아무리 악한들 타인이 좋게 해석하도록 만들면 되니 사기도 능력으로 인정받을 여지가 생기는 것이고요. 이 게임에 심취한 사람은 내 이익에 대한 영향력을 덜 가진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됩니다. 소위 깍두기에게는 민낯을 드러내더라도 이 게임의 핵심 플레이어, 알파 메일, 최종 보스에게 잘 보이려는(우리가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말로 ‘잘 보이려 한다’는 말을 괜히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거죠. 이른바 속물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함께 살면 꼭 일어나야만 하는 일들

속물, 위선, 사기를 나쁘게만 보아야 할까요? 물론 사기범죄를 무작정 옹호하자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 그래도 시사점은 있습니다. 형법상 고의는 목적이 아니라 의도입니다. 공정한 재판을 통해 결론이 난 사건이라도 피의자의 고의는 실제 피의자가 마음속에 가졌던 목적이라기보다는 법관이 해석한 피의자의 의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해석하는 타인의 의도는 모두 우리 나름의 해석이지 그의 목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겉모습을 보고 의도를 추론하는 법관과도 같다는 것이지요. 누군가의 행위를 두고 위선이라 덮어놓고 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애초에 위선은 인간의 행위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이기도 하고요.

이제 우리는 사내정치를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내정치도 정치의 일종이니까요. 정치는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서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여러 사람이 서로 교류하는 이상 겉과 속 사이에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스튁스 강처럼 결코 건널 수 없는, 경계가 버티고 있을 테고요. 한자어 회사(會社)에 담긴 뜻처럼,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서 정치는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순수한 이념을 실현해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하는 일을 정치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타인이 해석한 내 의도를 내 속마음에 간직한 목적과 완전히 일치시키려는 태도로 회사생활에 임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살아가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빗발치거든요. 타인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사내정치는 바로 이 문제와 직결된 현상이고요.

여러분의 회사생활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정치 문제만큼이나 사내정치 문제에 적절하게 관심을 갖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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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26. 더러운 정치, 깨끗한 세상이라는 유토피아

여러 사람의 말싸움으로 정치적 사실은 지리멸렬한 누더기가 되기도 합니다. 새벽 두 시 넘어서도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칼퇴근을 했겠죠.

사슴이 말이 되는 기적

세월호가 침몰하던 2014년, 교수신문 연말호에서는 그 해의 사자성어로 ‘지록위마(指鹿爲馬)’가 꼽혔습니다. 지록위마는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말인데, 사슴을 말이라 부른다는 뜻입니다.

고대 중국 진나라의 내시 조고의 이야기입니다. 조고는 위대한 폭군 진시황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비선실세의 원조 격인 인물입니다. 조고는 진시황이 죽자 그의 유서를 조작해 장남이 아닌 막내 아들 호해를 황제로 세웁니다. 황제의 적통이던 장남은 바른 말을 해서 미움을 샀거든요. 호해는 어린 시절부터 조고에게 가르침을 받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진시황을 모시던 신하들은 의문스러운 황제 호해의 말을 안 들을 게 뻔했습니다. 조고는 신하들을 시험합니다. 황제 앞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한 겁니다. 황제는 조고에게 실수로 사슴을 말이라 부른 것이냐며 웃었습니다. 조고는 주변을 돌아보며 재차 물었습니다. 말 아니냐? 줄 잘 서라는 뜻이겠죠. 신하들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침묵했지만 몇몇 신하들은 사슴을 말이라 부르면서 조고에게 아부했습니다. 바지 사장보다 실세 임원 밑으로 가겠다는 거죠. 물론 그렇지 않은 신하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슴을 사슴이라 부르며 소신껏 말했겠지요. 조고는 이들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법을 빌려 모조리 죽입니다. 조고가 휘두르고 황제가 묵인한 사법살인이지요. 정치적으로는 의도가 뻔히 보이나, 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그런 죽음.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무거운 압력. 침묵하거나 아부해 살아남은 신하들은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습니다. 왕보다 더 왕 같은 실세가, 그것도 아주 두려운 실세가 탄생한 겁니다.

믿음이 사실에 앞선다

조고의 사슴은 사슴일까요, 말일까요? 당연히 사슴입니다. 그런데 사슴이라 한들 아무도 확인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슴을 사슴이라 부르면 모두가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게 뻔합니다. 사슴의 시옷이라도 입에 올리면 저를 위한다며 입을 막으려 들 겁니다. 확인해주는 이 없는 외로운 길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모든 인간이 순교자는 아니니까요.

조고의 사슴을 심리학 실험으로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솔로몬 애쉬(Solomon Asch)입니다. 애쉬는 1952년에 「판단의 수정과 왜곡에 대한 집단 압력의 효과(Effects of Group Pressure upon the Modification and Distortion of Judgments)」라는 논문을 발표합니다. 다들 잘 아는 실험인데요. 왼쪽에 선분 하나를 그리고, 오른쪽에 세 선분을 제시합니다. 세 선분은 각각 길이가 다른데, 그 중 하나가 왼쪽 선분과 수학적 길이가 일치합니다. “이 중에 어떤 선분이 왼쪽 선분과 길이가 똑같습니까?”

애쉬는 아홉 명의 남성 대학생을 모아두고 선분을 고르게 합니다. 피험자는 그 중에 한 명입니다. 피험자를 제외한 여덟 명은 애쉬의 지시를 받아 일부러 틀리게 말합니다. 18번의 질문 중 처음 몇 번과 중간에 몇 번은 맞게 말하지만 대부분 틀린 답을 모두가 동일하게 말합니다. “아마 생애 최초로 맞았을, 만장일치로 감각 증거를 부정하는 상황.” 애쉬는 피험자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8대 1의 싸움을 택한 사람도 있었지만, 9대 0의 평화를 선택한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실험 결과 통계적으로 약 25%의 사람들이 모든 질문에서 싸움을 택했으나, 33% 가량의 사람들이 절반 이상의 질문에서 다수의 답을 따랐거든요. 물론 순응을 택한 사람들이 손바닥 뒤집듯 내면까지 바꾼 건 아닙니다. 다들 속으로 혼란을 느끼며 ‘뭐지?’ 싶었던 거죠. 그러나 겉으로는 사람들의 답을 따랐습니다. 애쉬는 이 현상을 집단 압력이라 불렀습니다. 집단 압력은 논문의 제목처럼 수학적으로 명백한 사실에 대한 판단도 수정하고 왜곡시킵니다. 자기 말에 어떤 불이익도 따르지 않는 실험 상황에서도 이런 결과가 나왔는데, 바른 말을 하면 목숨을 잃던 시대에는 오죽했을까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집단 압력으로 사실이 왜곡됐다고 볼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사실이라고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에는, 감각으로 접하고 이성으로 추론해 알 수 있는 사실 이외에,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그런 사실을 정치적 사실이라 부르겠습니다. 물론 “바르게 다스린다”는 한자어 정치(政治)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πόλις)에서 유래된 영어 폴리틱스(politics)를 생각하면, 정치적 사실은 꽤 말이 됩니다.

8대 1이 아니라 7대 2만 돼도 싸움은 해볼 만합니다. 단 한 명이라도 내 말을 확인해주니 순응을 택한 비율은 10% 대로 떨어졌습니다. 이 점을 보면 이성적 사실과 정치적 사실이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면서도 묘한 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성적 사실은 이성적인 추론에 따라 결정되는 반면, 정치적 사실은 타인의 확인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성적 사실은 정치적 사실이 되어야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성적 사실과 정치적 사실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사는 이상, 어떤 타인의 확인도 요구하지 않는 ‘순수한’ 이성적 사실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이성적 사실은 정치적 사실이 될 때 인간에게 사실이 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라도 사람들의 인정이 없으면 흙 속의 진주로 묻히기 십상이잖아요. 방사능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는데도 노벨상을 받지 못할 뻔했던 마리 퀴리를 생각해보세요. 유전자 도약을 발견했지만 역사 속에 묻힐 수도 있었던 노벨상 수상자 바바라 매클린톡도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사실은 믿음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실에 앞섭니다. 동료 인간의 말을 믿음으로 먼저 받아들이고 난 이후, 홀로 이성을 통해 검증하는 것이지요.

여러 인간이 모이면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그 세계는 여러 인간의 행위로 구성됩니다. 겉으로 드러낸 행위는 말 그대로 잘 보이고, 속으로만 하는 생각은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세계에서 명예와 돈 같은 이익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는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이익을 위해 사람들은 열심히 일합니다. 생각을 하려면 멈추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주저합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멈춤은 손해거든요.

그런 세계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세 사람이 말하면 일단 호랑이가 나타난 겁니다. 다수의 사람이 사슴을 말이라 부르면, 우선은 사슴이 말입니다. 검증은 타인에게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검증을 위해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오랜 시간 생각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검증은 언제나 나중 일이 됩니다. 셈이 빠른 사람이라면, 일을 멈춰 입게 되는 손해를, 더 나아가 이성적 사실을 말했을 때 당하게 될 불이익까지 모두, 고려할 겁니다.

조고의 사슴은 기적이자 상식입니다. 사슴을 말로 만드는 일은 다섯 덩이 빵으로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일만큼이나 기적 같은 일이니까요. 특히, 사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건 더 기적 같은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상식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믿음이 깨지는 사건을 말도 안 된다 여깁니다. 그러나 기적이 상식을 깨뜨릴 때, 그리고 그 기적이 새로운 상식의 자리를 꿰찰 때, 비선실세는 탄생합니다. 살아남기의 전문가들인 엘리트는 그렇게 비선실세를 탄생시킵니다.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겠다는 건, 강아지가 싼 똥을 손으로 집겠다는 의지의 다른 말입니다. 잘 싼 똥은 따뜻하고 차집니다.

깨끗한 세상이라는 유토피아

우리는 지금까지 정치적 사실을 폄하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순수한 이성적 사실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닿기 어려운 무지개 같은 것입니다. 정치적 사실은 인간이 처한 현실이자 한계입니다. 회사에서 모든 역할과 이익이 공정하게 배분되던가요? 정치판에서 위대한 사람만 대통령으로 선출되던가요? 사람 사는 세상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지난 글 “재영 씨는 왜 이렇게 사내정치엔 둔해요?“에 답글을 보내주신 분께서는 이런 현실을 더러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표현하시지요. 정치는 더러운 것이고 이성은 깨끗한 것이라는 표현에 반대할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성적 세계인 학문은 일종의 무균상태입니다. 애쉬의 실험에서 피험자가 골라야 했던 수학적 선분에는 어떤 곰팡이도 미생물도 없습니다. 조고의 사슴에 저항했던 신하들은 죽음이라는 영원한 무균실에 격리됐습니다. 신체는 부패하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다는 데카르트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몸을 가진 인간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없이 많은 생물을 삼키고 똥오줌을 갈기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가진 몸은 변기보다 많은 미생물이 사는 터전이자, 피, 땀, 눈물, 침, 콧물, 가래, 고름이 흘러나오는 구멍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 어딘가에서는 암세포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백혈구가 감염인자와 싸우고 있습니다. 완벽히 표준적인 신체를 가진 인간은 어디에도 없고, 누구나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 일종의 장애를 갖고 삽니다. 위생도 결국에는 믿음입니다. 손씻기는 손에 묻은 오염자들을 박멸하지 못하고 통계적으로 완화할 뿐입니다. 바이러스를 막아준다는 KF94 마스크도 모든 크기의 입자를 100% 걸러내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더러운 몸을 가진 인간입니다.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이 무엇이든 타인이 확인해주지 않으면 세상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가진 생각은 다른 이들의 의견으로 오염되지 않으면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겁니다. 선악은 어떤가요? 세상에 선과 악 둘 중 하나로 무 자르듯 동강낼 수 있는 게 몇 개나 되던가요? 아마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신속하게 성과를 냈을 겁니다. “바이든”이 “날리면”과 음성학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검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습니다. 이렇게나 복잡하고 애매하고 모호한 세상, 재밌지 않나요? 세상은 더럽고 지저분해서 인간적입니다. 저는 이런 세상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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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연봉은 비밀에 부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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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법률판] 인사팀 막내의 대형사고…”전 직원 연봉이 공개됐어요” – 머니투데이

모 회사의 인사팀 막내 직원 A씨는 최근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전 직원 대상으로 보내는 메일에 그만 직원 연봉 리스트를 첨부해버린 건데요. 직원 모두가 동…1명이 이야기 중이 뉴스에 관한 이야기 보기

여러분의 회사는 안녕하신가요? 위에 인용된 기사처럼, 모든 사람의 연봉이 공개된 회사를 상상해봅시다. 누구는 얼마 받고, 누구는 얼마 받고 속속들이 다 아는 그런 회사 말입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도시괴담인가 싶겠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닙니다. 우선 회계부서에서 급여를 담당하는 분은 모든 사람의 연봉을 알고 있습니다. 회계부서장 또는 운영 임원도 직원들의 연봉을 알아야 할 것이고요. 사장은 누가 얼마를 받는지 반드시 알고 있을 겁니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실수를 하면 누가 얼마를 받고 다닌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됩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도 타인의 연봉을 알게 되어 한바탕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냥 괴담만은 아닌 일인 거죠.

연봉이 속속들이 공개된 회사는 천국일까요, 지옥일까요?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타인의 평가가 수반됩니다.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인 회사에서는, 사람들의 평가를 수단 삼아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도록 닦달합니다. 평가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돈과 인정입니다. 돈과 인정은 가치와 우정을 교환하는 공통분모입니다. 사업자는 직원의 실적에 따라 이익을 나누어줍니다. 회사의 구성원은 서로를 보고 평판을 형성합니다. 만약 연봉이 공개된다면 연봉을 둘러싸고 그와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평판이 형성될 겁니다. 이렇게 일하는데 저렇게 주는 사장, 저렇게 일하면서 이렇게 받아가는 동료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겠지요. 이런 회사에서 우정이 제대로 꽃필 수 있을까요?

여기서, 왜 갑자기 우정이냐 싶은 분도 계실 겁니다. 어떤 분께서는 아마 회사는 학교가 아니라고 핀잔을 주실 분도 계실 거고요. 그러나 모든 팀워크는 우정을 전제합니다. ‘도둑질을 해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는 속담이 바로 이 점을 지적합니다. 우정은 복수의 인간 사이에 관계를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필리아(φιλία)라고 불렀던 사랑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지요.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는 이 독특한 사랑인 우정이 필요합니다.

비밀 없는 우정이라는 신화

비밀이 없어야 우정이 싹튼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우정은 철저한 비밀을 기초로 합니다. 우정은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입니다. 관계를 유지하기에 가장 좋은 태도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결코 네가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는 네가 원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상대방은 불쾌해지기 십상입니다. 나의 욕망과 충동을 잠시 접어두고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절제가 배려의 첫걸음입니다.

배려는 침묵에서 비롯됩니다. 침묵은 비밀을 만들고요. 비밀의 다른 모습은 절제라고도 불립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란 두 아이를 생각해볼까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와 찢어지게 가난한 집 자식은 친구가 되기 매우 어렵습니다. 서로가 수다스럽게 모든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면 둘 중 하나는 불쾌해질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두 아이는 물려받게 될 재산만큼이나 다른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밥상머리 예절부터 부모가 주로 쓰는 말을 따라 배운 말투까지 모든 면에서 다를 겁니다. 이렇게 다른 두 아이가 오랜 친구로 남기 위해서는 서로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부모에게서 배운 예절과 말투 말고, 친구를 위한 예의와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 예의와 언어를 사용하는 목적은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조금이라도 망가지면 우정은 사라집니다.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보이지 않게 볼일을 보는 배변문화 안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급하다고 누가 있든 거리낌없이 싸버리면, 상대방은 배려받지 않았다고 느낄 겁니다. 당장 제 앞에 누가 똥을 싸면 저는 그렇게 느낄 테니까요. 그런 관계에서 우정은 없습니다. 속의 일은 속의 일로 제한해야 겉의 일을 침범하지 않습니다. 그 핵심은 분별 있는 비밀입니다.

물론 배려와 위선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내 마음을 숨기고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에서 위선과 다를 게 없거든요. 배려를 두고 위선이라 하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왜 똥오줌을 지리지 않느냐고, 지금 하는 짓은 위선이라고 나무란다면, 반박하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누구나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기도 합니다. 우리 머릿속은 생각보다 불결하고, 불경하고, 추잡하고, 추악합니다. 솔직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런 것들을 모두가 보는 앞에 드러내야만 할까요? 저는 그런 세상이 싫습니다. 차라리 위선을 택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세상은 인간의 세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회사가 각자의 연봉을 비밀의 영역에 두는 건 배려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정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드러내지 않는 속마음

사람들이 가장 솔직해지는 때가 언제일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 고해성사를 위해 고해소에 들어가 있을 때? 제 생각에는 인터넷 검색을 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검색기록은 잘 드러내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 같거든요.

2022년 올해의 검색어. 구글트렌드 캡쳐.

구글트렌드에서는 올해의 검색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태원 사고”라는 키워드가 종합 5위에 올랐네요. 확실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검색했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싶어서 구글 검색창에 “이태원 사고”를 입력한 것일까요?

“이태원 압사” 키워드에 대한 관련 검색어. 구글트렌드 캡쳐.

사람들은 참사의 현장이 궁금했나 봅니다. 그런데 관련 검색어를 보니, 참사라는 사건보다 그 현장의 충격적인 이미지가 더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호기심은 아주 깊은 이성적 추론을 통해 도출해낸 호기심이 아닙니다. 단지 생명이 사라지는 희귀한 장면을 보고싶은 원초적인 호기심입니다. 실제로 참사현장이 적나라하게 유포되어 문제가 크다는 지적도 언론에서 다수 제기됐습니다. 인물검색 1위를 차지했던 아베 신조의 경우에서도, 가장 관련이 깊은 검색어는 “아베 총격 영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광경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이 마음은 음란물을 시청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음란물을 애청합니다.

“porn”, “philosophy”, “politics”, “biden” 키워드에 대한 검색어 비교. 구글트렌드 캡쳐.
“야동”, “철학”, “정치”, “윤석열” 키워드에 대한 검색어 비교. 구글트렌드 캡쳐.

솔직한 면모는 성과 관련된 검색어에서 더욱 적나라합니다. 시간 흐름에 따른 관심도 변화 그래프에서 세로축의 숫자는 검색 빈도를 의미합니다. 50이 평균이고, 100이면 가장 많이 검색했다는 뜻입니다. 음란물을 의미하는 “porn”과 “야동”은 365일 내내 검색 빈도가 평균 이상에 위치해 있습니다. 심심치 않게 100도 기록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반면, “철학(philosophy)”, “정치(politics)”, 유력 정치 지도자(전세계 기준 “Biden”, 국내 기준 “윤석열”) 검색어는 연중무휴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윤석열” 키워드는 대통령이 당선되던 시기인 3월에 반짝 23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야동”의 3분의 1 수준입니다. 그 후로는 별 볼일 없습니다.

사람들의 솔직한 마음은 이렇습니다. 지난 글 “더러운 정치, 깨끗한 세상이라는 유토피아“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 삶은 생각보다 지저분합니다. 홀로 있는 우리에게는, 남 눈 앞에 고상해보이는 철학보다, 정치보다, “야동”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밖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주제 중에 음란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많던가요? 오히려 저는 철학, 정치, 윤석열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눕니다. 아, 물론, 제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을 더 많이 하는지는 비밀로 두겠습니다. 여러분과 저와의 우정을 위해서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구글트렌드는 왜 2022 올해의 검색어에 “야동”을 올리지 않았을까요? 공정한 기준에 따르면 “야동”은 단연 1위를 차지했어야 마땅할 텐데요. “야동”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10월에도, 이태원 참사보다 더 많이 검색된 키워드입니다. 정말로 구글이 이른바 ‘공정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올해의 검색어 1위는 단연 “야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구글의 처사를 불공정한 검열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태원 압사”와 “야동” 키워드에 대한 검색어 비교. 구글트렌드 제공.

안과 겉

구글이 “야동”을 비밀에 부친 이유는, 회사에서 연봉을 비밀에 부친 이유와 비슷할 겁니다. 모든 걸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인간은 천박하고, 함께 살기 어려운 세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는 다른 인간을 배려해 적당히 비밀에 부치는 태도가 인간의 태도입니다. 침묵과 수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것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사람은 깊게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문제를 깊이 고민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입니다.

프랑스의 자랑 알베르 까뮈는 1937년 『안과 겉(L’Envers et l’endroit)』이라는 에세이집을 출간합니다. 그 안에는 동명의 짧은 에세이가 한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내용 일부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성격이 유별난 할머니 한 명이 살았습니다. 가족이 죽어 꽤나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습니다. 그 돈을 어디에 투자할까, 하다가 스스로 조만간 들어가게 될 무덤 하나를 계약합니다. 할머니는 인부를 불러 자기 이름을 새기고 무덤을 꾸밉니다. 처음에는 그 무덤이 잘 꾸며지나 확인하러 가보다가, 나중에는 습관처럼 무덤에 갑니다. 시끄러운 바깥보다 고요한 무덤에서 더 큰 기쁨을 느낀 것이지요. 할머니는 그 안에 들어가 기도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그런데 한날 기도를 마치고 무덤 밖으로 나오는데, 입구에 꽃 몇 송이가 놓인 게 아니겠어요? 그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이름 없는 무덤인 줄 알고 연민을 느껴 헌화까지 하고 간 겁니다.

할머니의 무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헌화를 받다니, 기묘하지 않나요? 까뮈는 이렇게 씁니다.

한 사람은 관조하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무덤을 판다. [중략] 나는 나의 모든 몸짓을 통해서 세계에 연결되어 있으며 나의 모든 연민과 감사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연결되어 있다. 세계의 이 안(裏面)과 저 겉(表面) 중에서 나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고 또 남이 선택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까뮈의 생각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두 세계가 있습니다. 안과 겉이지요. 속마음(관조)은 죽음과 같아서 타인과 결코 공유할 수 없습니다. 반면, 겉은 몸짓과 연민, 감사로 타인과 연결된 공간입니다. 모든 것을 공개하자는 주장은 이 안을 저버리고 저 겉을 선택하자는 주장입니다. 그런 선택은 아무리 합리적인 듯이 보여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저 겉을 버리고 이 안만 선택한 할머니의 이야기처럼요. 이성적으로, 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옳게 보이는 것들은 인간이 처한 두 세계 사이에서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속마음과 겉모습의 경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속마음을 속에만 두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주워 들은 비밀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은 충동이 얼마나 강한지는 우리 모두가 알잖아요. 게다가 나의 유불리에 관한 일이라면 그걸 속마음에만 묻고 숨기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내 안에만 담아두어야 할 이야기만큼 중요한,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 이익을 과도하게 추구하거나 타인의 속사정에 너무 깊은 관심을 가지면, 다시 말해 내가 나밖에 모르면,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를 할 기회를 잃고 맙니다.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게 되거든요. 사람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결국 제 이익을 증대하거나 고통을 경감하는 데에만 의도가 있다고 믿을 겁니다. 그 믿음이 한번 들어서면,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절하게 침묵을 지키지 않으면 꼭 필요한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적절한 침묵, 분별 있는 비밀은 용기입니다. 속마음이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겉모습이 아무리 죽음에 취약하다고 하더라도, 이 안과 저 겉에서 동시에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는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시 굴러떨어질 걸 알면서도, 행복한 마음으로 돌을 굴려 올라가는 시지프의 마음이지요.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속마음과 겉모습 사이를, 비밀과 공유 사이를 갈팡질팡하더라도 고통스럽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 생각을 우리나라 언론에도 적용해볼 수 있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 언론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경고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습니다. 까뮈의 「안과 밖」 역시 그 경고와 유사한 듯합니다. 회사에서 모두의 연봉을 공개하면 아마 모두가 그에 대해 떠들어 대느라 어떤 일도 완성되지 못할 겁니다. 대중 매체가 어떤 심의나 검열도 없이 인간의 속마음을 겨냥한다면, 결국 매스컴은 거대한 포르노그라피로 전락하고 말 것이고요.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밀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슈를 공중에 드러낼지, 어느 이슈를 감출지 결정하는 역할은 언론이 담당합니다. 그래서 언론이 중요합니다. 이건 중립성이나 공정성의 문제 이전의 문제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언론은 용기를 잃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여러분의 회사는 안녕하신가요? 여러분은 누가 얼마를 받느냐에 혈안이 되어 해야 할 일을 멀리하고 계시지는 않은가요? 배려에 필요한 적절한 비밀을 지켜주시나요? 우리나라 언론은 과연 드러나야 마땅한 것들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안과 겉의 경계를 생각해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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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답글들이 달렸다.


배려와 위선의 경계

최서우

최서우 북독일 엘베강가의이야기

예전엔 친구사이엔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숨기는것을 아주 비열한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친한사이이거나 애정있는 단체에서는 솔직한 내 속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러자 평화는 커녕 분란과 원망이 일었습니다.
겉으로야 솔직해서 좋다고 했지만 이후 분열이 생겨
다른사람을 통해 들은 말로는 충격적이게도 기분 나빳다
라는 겉과 속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배려없는 내가 싫어서 떠난다라는 말을 들었을때
저는 절대이해불가 였습니다.
숨기는 것은 위선이지 배려가 아니지않나 라는 생각이었죠.

“모르는게 약이다” 이말은 어쩜 가장 원초적이고 노골적인
정치적인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깨닫습니다.
솔직하게 말한다는게 폭력적일수있는것도 있다는것을요.

배려와 위선은 그 경게가 모호할때도 있습니다.
배려란 타인을 위해 하고싶은말을 참는것이고 
위선 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고하는 이기심에서 나온것이라고
어느정도 분류를 하면 구분이 가능할까 고민도 해봅니다.

지금의 정치뿐 아니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우린 얼마나 배려하고있는 걸까요?


비밀의 기준이 뭘까요?

미미패밀리

미미패밀리 한 아이의 아빠이자 고양이 형아입니다

누군가 말해주기 전까지 항상 고민이 되던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듣고 본 것을 남에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기준이 뭔가?’ 즉, 비밀로 해야하는 것의 기준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번에 A사원이 연봉을 동기들보다 많이 받았다는걸 A사원에게 들었다면 전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야하는걸까요?
나한테 A사원이 B사원을 엄청 욕하던데 전 B사원에게 비밀로 해야하는걸까요?
연봉의 경우 기사와 같이 개인정보유출과도 같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연봉계약서 상에 내용으로도 내규로 외부발설 금지에 대한 항목이 들어가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비밀을 유지해야합니다.
그런데 예를 든것처럼 법이나 내규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말아달란 요청을 받은 것이 아니라도 비밀로 해야하는걸까요?

눈치껏 판단해라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람마다 남에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의 수위가 다르고 판단기준이 다른데 어떻게 눈치껏 판단해야할까요.
이런 경우 눈치없고 배려심없고 센스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전 처음 말을 할 때부터 퍼지는게 싫었다면 미리 이야기를 해줬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밀로 해달라고해도 어쩌다보면 퍼지는 마당에 상대방이 알아서 지켜주겠지라는 생각만으로 이야기를 했다면 반드시 발설하면 안 되는 비밀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다보면 이래저래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곤합니다. 걔 중에는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일도 있을 것 입니다. 비밀은 나만 알고 있을 때 비밀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알게되는 순간 비밀로써의 가치는 사라지며, 결국 여기저기 퍼져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고 내 약점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지켜야할 비밀이라면 혼자만 알고 있던지 다른 사람에게 말하더라도 발설금지조건을 달고 책임을 느끼게 해야할 것입니다.

2023. 1. 3. 이성적 사실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만요.

1년이 흐르고 나서야 글을 봤습니다. 민수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 글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주셨습니다.

제가 ‘이성적 사실’이라 표현한 것을 두고 우리가 이렇게 떠드는 순간 그것은 ‘정치적 사실’이 되어버립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정치사상가가 1968년에 발표한 「진리와 정치(Truth and Politics)」라는 짧은 논문에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철학적 진리는, 시중에 들어서는 순간, 그 본성을 바꾸고 의견이 된다.” 이 현상에는 정치의 독특한 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서로의 속을 알 수 없고 겉으로만 마주한 복수의 인간은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하더라도 입에 담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 글에서는 이성적 사실과 정치적 사실이라는 간단한 이분법으로 변주를 했습니다만, 아렌트는 진리(truth, ἀλήθεια), 의견(opinion, δόξα), 사실(fact), 진실(truthfulness), 수학적 진리(mathematical truth), 이성적 진리(rational truth), 철학적 진리(philosophical truth), 사실적 진리(factual truth)를 세세하게 구분합니다. 철학 수업시간이 아니니 각각의 개념에 대해 논하는 건 부적절할 듯합니다. 간단하게 후려치자면 (아렌트 선생님 죄송합니다…) 진리와 의견이라는 대립쌍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겉으로 드러내면 의견이 되고요, 아무리 증명되지 않은 의견이라도 내 마음속에 울림을 주면 ‘1+1=2’보다 더한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더러운 정치, 깨끗한 세상이라는 유토피아“라는 글에서 저는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근사의 문제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상력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이성적 사실을 입에 담으면 정치적 사실로 변한다’는 ‘정치’라는 현상과는 별개로, ‘근사’는 이성적 사실 내에서만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데카르트는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이라는 책에서 상상력과 추론의 차이를 지적합니다. 상상력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여야 하는데, 추론은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점입니다. “눈을 감고 삼각형을 그려보세요”라는 말에 우리는 금방 삼각형을 떠올릴 수 있지만, “천각형을 그려보세요”라는 말에는 어리둥절해집니다. 이성적으로는 추론 가능하지만 상상으로 쉽게 그려볼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거죠. 우리가 4차원 시공간에 살고 있지만 그보다 고차원의 도형을 연역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점을 뒷받침합니다.

언급해주신 원자 모형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상상하기 쉬운 구 형태였다가, 쿠키에 건포도가 박힌 듯한 모양이 되고, 궤도를 공전하는 구들의 집합이 되었다가, 확률적 세계관이 자리를 잡으면서 둥근 구름같은 모양으로 변한 뒤에, 오비탈이라는 독특한 모양으로 우리가 아는 원자의 형태가 변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오비탈도 원자의 ‘정확한’ 모습은 아니겠지만, 물리학자들은 근사를 통해 이성적 사실의 해상도를 높여나가는 작업을 해온 것이지요. 가설을 수립해 공식을 만들고, 실험을 반복해 실험값을 찾아 교정해 나가면, 소위 ‘더럽다’고 표현하는 계수가 나타나겠지만 진리값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공식이 만들어지는 이유가 상상력과 이성의 차이 때문입니다. 근사는 상상입니다. 상상을 통해 애매모호한 진리를 가시화하는 작업이 말씀해주신 ‘근사’ 개념에 부합한다면요.

이 점에서 이성적 사실은 있습니다. 제가 언급하고자 했던 이성적 사실은, 상상을 거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상상(근사) 이전의 믿음입니다. 상상력도 거치기 전의 가시화되지 않은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이라는 존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 영혼불멸도 포함될 테고요. 상상(imagination)을 거치지 않아 이미지(image)가 없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 진리입니다. 민상 님의 글에서 “결국 이것도 참값이 아니라 근사값에 불과합니다”라는 문장은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의견을 덧붙이자면, 유한한 인간에게 진리는 너무나 멀고, 이성적 사실은 너무 단순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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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 9. 표류하는 말, 난파된 정치 ① | 우리가 바이든을 날리면 안 되는 이유

봄바람 휘바이든

2022년 9월 22일, MBC는 뉴스 한 꼭지를 보도합니다. 미국 순방 중이던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촬영한 영상이었습니다. 영상은 현재 616만이라는 조회수를 올리고 있습니다. ‘MBCNEWS’ 유튜브 채널에서 전체 14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순위권에 오른 대부분의 영상이 게시된 지 몇 년 된 영상인 점을 감안하면, 불과 3개월 된 동영상 치고는 꽤나 폭발적인 반응입니다.

윤 대통령은 동행하던 사람들에게 뭐라 말했을까요? MBC뉴스 제작진은 이렇게 들은 듯합니다.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때마침 직전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연설을 마친 뒤였습니다. 저개발국의 질병 치료를 지원하기 위해 조성된 ‘글로벌펀드’에 미국이 10억 달러를 먼저 기부하고, 의회의 승인을 받아 60억 달러를 더 기여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백악관 공식 미국 대통령 발언 속기록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뉴스]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2022.09.22./MBC뉴스 갈무리)

MBC뉴스의 보도를 기반으로, 윤 대통령의 말을 정황에 맞게 그리고 무례하지 않게 다시 풀어보면 이런 말일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몇십 억을 기부하겠다고 저렇게 호언장담해도, 미국 대통령제에서는 의회가 승인 안 해주면 그렇게 못할 텐데. 그럼 거짓말한 꼴이 돼 부끄럽겠다.’ 윤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 요지와 미국 대통령제를 정확히 이해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친 표현이 문제였습니다. 외신의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도전문채널 폭스 뉴스(Fox News)에서는 MBC뉴스와 대동소이하게 윤 대통령의 발언을 보도했습니다. “새끼들”을 “f—ers”로, “쪽팔려서”를 “lose damn face”라고 옮긴 겁니다. 2022년 기준, Fox 뉴스는 20년 연속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최대 뉴스 채널이었습니다. 같은 뉴스를 비슷한 논조로 CNN에서도 보도했습니다. “새끼들”을 “f***ers”로, “쪽팔려서”를 “embarrassing”으로 옮겼습니다. CNN은 폭스 뉴스 다음으로 시청률 순위 2위를 기록한 언론사입니다.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에서도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새끼들”을 “idiots”로 번역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2022년 기준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이어 전세계 디지털 구독자 수 3위로 추정되는 유력 일간지입니다.

옥스포드 사전에 따르면, “fuckers”와 “idiots” 모두 모욕적인(offensive)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fuckers”는 금기시되는(taboo) 비속어(slang)입니다. 물론 폭스 뉴스와 CNN의 검열로 인해 “f—ers”와 “f***ers”가 “fuckers”를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요.

외교적 부담이 우려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실은 15시간 만에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해명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새끼들”이라는 욕설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 의회를 향한 게 아니라, 우리나라 국회를 향한 욕설이었다고 둘러댔습니다. 특히, 바이든은 언급도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실의 주장에 따라 윤 대통령의 발언을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대한민국이 1억 달러를 기여하겠다는 정부안을) 승인 안 해주고 날리면 (내가) 쪽팔려서 어떡하나” 그 근거로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대한민국이 글로벌펀드에 1억 달러를 기여할 것이라고 윤 대통령이 발표한 점을 제시합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대통령실이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속기록을 공개하지 않고 있어 그 근거가 적절한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실, 윤 대통령 발언 해명…”‘바이든’ 아닌 ‘날리면'” / JTBC 아침& (2022. 9. 23./JTBC 갈무리)

윤 대통령의 표현에서 논란이 되는 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이 새끼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였고, 다른 하나는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였습니다. 첫 번째 논점에 대해서는 MBC의 해석도, 대통령실의 해석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던 듯합니다. 물론 어느 방식으로 해석하더라도 대통령이 해외 순방이라는 공적 행사에서 욕설을 사용한 건 부적절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지만요.

그러나 두 번째 논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대통령실의 해명 이후 ‘날리면’으로 들린다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MBC의 보도와 대통령실의 해명 이후 실시된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3분의 2가량의 사람들이 ‘바이든이 맞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날리면이 맞다’고 응답했습니다. 여론조사 응답으로만 보면 2대 1이니 “바이든”으로 결정해야 할까요? 사람의 발화를 다수결로 해석하는 꼴이 우습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전문가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음성학 권위자들은 응답을 거부했습니다. 선입견이 형성된 상태에서 정확한 음성 해석은 어렵다는 겁니다. 소음도 제거해보고 여러 번 돌려보고, 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써봤습니다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embed/mPC10JZWJ9E?rel=0https://www.youtube.com/watch?v=mPC10JZWJ9E

바이든? 날리면?…전문가에게 ‘소음제거 영상’ 묻자 / SBS (2022. 9. 23./SBS)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이든’이 맞을까요, ‘날리면’이 맞을까요? 그보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왜 일어난 걸까요?

무지개에서 빨간색을 고르시오

철학적으로 윤 대통령의 말을 둘러싼 사건은 꽤나 중요합니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반언어학’이라는 이름의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에서 소쉬르는 언어를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바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입니다.

랑그는 사회적인 언어입니다. 어휘나 문법이 대표적인 랑그의 예입니다. 반면, 파롤은 개인적인 언어입니다. 랑그에 따라 개인이 내는 소리가 파롤입니다. 말로 사과를 가리키려면 ‘사과’라는 소리를 내야 한다는 게 랑그이고, 제가 실제로 목소리를 내서 ‘사과’라고 발음하면 그게 파롤입니다. ‘사과’라는 발음을 들으면, 상대방은 사과를 떠올립니다. 송신자와 수신자가 동일한 랑그를 공유한다는 전제 아래 그렇습니다. 아무리 같은 랑그를 공유한다 하더라도, ‘사가’라든지 ‘서과’처럼 발음하면 상대방은 사과 말고 다른 생각을 떠올릴 겁니다. 마찬가지로, 영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apple’을 들으면 사과를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의 파롤에는 ‘apple’이 포함될 겁니다. 랑그와 파롤은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언어를 구성합니다.

‘사과’를 발음하는 이상적인 발음이 있을까요? 파롤은 개인적인 언어입니다. 모든 사람의 생김새가 서로 다른 것처럼, 모든 사람의 발성기관은 다를 것이고, 이로 인해 사람마다 발음하는 ‘사과’라는 소리는 모두 다를 것입니다. ‘apple’과 ‘사과’의 차이 못지 않게 사람마다 발음하는 ‘사과’는 서로 다릅니다. 저의 ‘사과’는 시옷에 가까운 발음으로 시작하는 ‘사과’겠지만, 노홍철 씨의 사과는 쎄타(θ, th)에 가까운 발음으로 시작하는 ‘사과’일 테니까요. 우리는 저마다 이상적인 ‘사과’를 떠올리지만, 그런 발음을 실제로 들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언어활동을 하는 모두의 정신에는 이상적인 ‘사과’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사과’의 이상적인 발음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소리가 끊임없이 겹쳐 들리는 자연의 소음으로부터 누군가 ‘사과’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구분해냅니다. 우리는 ‘사과’를 들을 뿐만 아니라 ‘사과’라는 지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찾아나섭니다. 사과의 이상적인 모습은 가장 비현실적이지만 가장 정신적이며 가장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소쉬르는 자신의 강의에서 랑그의 언어학만 다루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일반언어학 강의’이라는 이름으로는 일반적이지 않은 파롤을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나 봅니다.

그런데 파롤은 그렇게 무시할 수만은 없는 현상입니다. 언어는 파롤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랑그가 머릿속에 떠올린 삼각형이라면, 파롤은 실제로 우리가 그린 삼각형 비스무리한 모양에 해당합니다. 랑그가 빨간색이라면, 파롤은 무지개와 같습니다. 스펙트럼에서 빨간색을 가리키라고 하면, 저마다 다른 색을 고를 겁니다. ‘하늘 아래 같은 핑크는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다만, 빨간색을 가리키라는 요청에 수많은 사람이 가리키는 색은 대동소이할 겁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빨간색은, 사람마다 다르게 가리키는 바알간색, 검붉은색, 시뻘건색 등등으로밖에 세상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순수한 빨간색은 허구이자 상상일 뿐입니다. 현실에서 ‘빨간색’이라는 말에 대응되는 색은 빨갛다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색들의 집합, 즉 스펙트럼입니다.

여기서 빨간색은 어디 있을까요?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파롤로서의 빨간색은 상대방의 동의로 확인됩니다. ‘저는 이 색도 빨간색으로 보이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이 색은요?’ ‘그것도 빨간색이지요.’ 이 세상에서 빨간색은 나와 상대방 사이의 무한한 확인 과정으로 만들어집니다. 만약 파란색을 가리켜 빨간색이라 일컬으면 어떻게 될까요? ‘혹시 잘못 고르셨나요?’ 사람들은 그 색이 빨간색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줍니다. 거부함으로써 교정해주는 것이지요. 줄타기 장인이 양 팔을 흔들어 균형을 잡는 것처럼, 나의 무지개와 상대방의 무지개는 끝없는 긍정과 부정으로 균형을 잡으며 빨간색을 찾아 나갑니다. 다시 말해, 나의 머릿속의 빨간색은 너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의 빨간색으로 실현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습니다. 무지개 안에서 빨간색이 모호한 만큼, 사람들과의 확인 과정도 모호합니다. 주황색과 빨간색 사이의 묘한 색을 빨간색이라 가리키면, 몇몇은 동의하고 몇몇은 반대할 겁니다. 반대하는 몇몇 중에도 몇은 교양있을 테지만 몇은 무례할 겁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그 모호한 경계에서 발생합니다. 나는 분명 이게 빨갛게 보이는데, 상대방은 그게 아니랍니다. 외려 상대가 빨간색이랍시고 가리키는 색은 가관입니다. 도저히 빨간색이라고 할 수 없는 색이 빨갛답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 논쟁도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바이든 파와 날리면 파 둘 중 하나가 허튼 소리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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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표류한다니, 무슨 소리야?

문제는, 대통령실의 ‘날리면’이라는 해명이 등장하기 전까지, ‘날리면’으로 들었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겁니다. 그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이든’이라 들었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서는요. MBC뉴스가 가장 처음 그렇게 듣고 대중에 보도했습니다. 그 보도를 접한 사람들은 ‘바이든’이 맞다고 확인했습니다. 눈에 띄는 오보나 왜곡, 날조 논란은 대통령실의 반응이 나오기 전까지 없었거든요. 국내 다른 언론도, 외신도 ‘바이든’이 맞다고 확인했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국가를 대표해 국제 행사에 참석한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가장 강력한 동맹인 미국의 의회를 모욕한 사건이 적절했는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실이 MBC뉴스의 보도를 부정하자 상황이 반전됐습니다. 윤 대통령이 한 말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었다고 누군가 주장하자마자, 대통령의 언어를 둘러싼 맥락이 모두 사라지고, 언어 그 자체만 남은 겁니다. 공론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왜 그 말을 했는지에 대한 논의가 사라진 채 무엇을 말했는지에 대한 논의만 남았습니다. 놀랍게도, ‘날리면’으로 들린다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여당 국회의원과 같이 윤 대통령과 이익을 공유하는 소수가 먼저 자신이 들은 바를 공론장에 보고했습니다. 다음은 KBS뉴스에서 인터뷰한 국민의힘 이용호 의원의 발언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에는 바이든, 이렇게 들었어요. 그런데 또 해명 이후에 또 날리면, 이렇게 들어가지고 계속 그 생각으로 들으니까 또 비슷해요. 그래서 역시 사람은 듣고 싶은 대로 듣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저는 뭐 거기에 잘잘못을 얘기하고 싶지는 않고, 따지고 싶지 않고, 어떤 게 맞는지를.

물론 이용호 의원은 ‘바이든’과 ‘날리면’ 중에 무엇이 맞는지 따지고 싶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날리면’을 공개적으로 긍정했다는 점에서 ‘봄바람 휘바이든’이 기타 모든 논의를 삼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이어서,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도 ‘바이든’이 아니라 ‘아 말리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나 ‘이 새끼들이’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였다는 주장이 인상적입니다. 적어도 대통령실에서는 ‘이 새끼들이’가 대한민국 국회를 가리킨 말이었다고 인정했는데도 말이죠.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이렇게 몇몇 주요 인물이 공개적으로 대통령실의 주장을 거들자 상황은 급격하게 반전됐습니다.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다수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를 두고 실시된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날리면’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응답자의 약 30%에 달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리얼미터가 집계한 2022년 9월 3주차 대통령 지지율은 31.4%였습니다. 윤 대통령의 문제적 발언이 보도된 9월 22일 당시에는 ‘날리면’으로 들었다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다가, 고작 일주일만에 무려 셋 중 하나에 버금가는 다수가 ‘날리면’이라고 듣기 시작한 겁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들었다고 보고하기 시작한 겁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사안입니다. 이 사건은, 내가 들은 바대로 듣지 않은 사람들을 부정하고 속 편하게 끝낼 사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치적 이해관계는 사실을 호도한다’거나 ‘감각은 의지의 영향을 받는다’는 식으로 끝내야 할까요? 정치와 감각은 진리에 비해 열등한 것이라고 끝내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현상은 표류하는 말이 의견의 바다에 난파된 과정입니다. 지난 가을, 우리는 철학적으로 아주 독특한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도했던 겁니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듣기와 말하기 사이를 표류하는 언어

‘봄바람 휘바이든’ 사건은, 말하자면 마치 이런 상황입니다. A가 무슨 말을 했습니다. B는 “사과가 떨어졌다”고 들었다 보고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과’로 듣고 사과가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C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닌데? ‘사과’가 아니라 ‘바다’라고 한 건데?” 그리고 그 맥락에는 이런 말이 숨겨져 있습니다. “A를 지지한다면 모두 ‘바다’로 들어!” 그랬더니 A를 지지하는 3분의 1가량이 “어, 맞네, 사과가 아니라 바다였네, ‘사과가 떨어졌다’가 아니라 ‘바다에 떨어졌다’였네~”라며 마음을 돌린 겁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들었는지, 겉으로만 그렇게 보고한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A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모종의 규칙이 생긴 겁니다. 바로 ‘A를 지지한다면 “A는 ‘바다’를 말했다”고 말해야 한다’는 규칙입니다.

누군가를 지지한다면 이렇게 들었다고 해라! 그리고 반대한다면, 그 반대로 해라! 이 규칙은 음차된 외국의 이름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도 보입니다. 미국은 왜 미국일까요? 태초에 미국인은 중국인을 만났습니다. ‘니총날리라이?(你从哪里来?)’ 어디서 왔느냐는 중국인의 질문에 미국인은 이렇게 답했을 겁니다. ‘어메-뤼커(ǝmérikǝ).’ 대답을 들은 중국인은 ‘어메-뤼커’를 ‘미리견(美利堅)’으로 옮겼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오랜 기간 중국에서 미국은 미리견국으로 불렸습니다.

우리나라 기록물에서 미국의 국호가 처음 등장한 건 1853년 1월 6일입니다. 부산에서 봉화꾼 곽돌쇠(郭突釗)가 이상하게 생긴 큰 배 한 척이 표류한 채 둥둥 떠있다고 보고한 때입니다. 통역사를 대동한 관리들이 배에 올라 마흔세 명의 선원들을 만납니다. 미국인과의 조우가 기록된 첫 사례입니다. 그런데 관리들이 보자 하니, 사람 모양이긴 한데 머리는 덥수룩 고슴도치같고 코는 높고 괴상하게 생겼습니다. 누구는 눈이 퍼렇고 누구는 누렇고, 누구는 푸르고, 아주 신기했나 봅니다. 다행히 미국 선원들은 조선의 관리들을 기쁘게 웃으며 맞이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관리들은 통역사를 대동했음에도 그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나라 이름이 뭐냐, 여기는 어쩌다 왔냐 물으니 선원들은 배를 가리키면서 ‘며리계, 며리계(旀里界)’ 할 뿐이었습니다. 배의 이름이 ‘사우스 아메리카(South America)‘ 호였거든요.

난파된 사우스 아메리카 호는 고래잡이배였습니다. 1800년대는 포경산업이 활발했던 시대였거든요. (사진=뉴 베드포드 포경박물관)

그렇다면 조선에서 미국은 ‘며리계’로 불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며리계’가 아니라 ‘미리견’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곽돌쇠가 사우스 아메리카 호를 발견한지 20년이 채 흐르지 않은 때에도 ‘며리계’는 쓰이지 않았습니다. 고종이 재임하던 1871년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미리견’만 기록됐습니다. 조정의 사관은 조선 사람이 들은 명칭보다 중국 사람이 들은 명칭이 더 옳다고 여긴 듯합니다.

개화기 조선, 미리견국은 짧게 미(美)국으로 불렸습니다. 아름다운 나라가 된 거죠. 일본에서는 미국을 ‘아미리가’라 불렀습니다. 아미리가(亞米利加)도 짧게 미국이 됐는데, 일본이 쌀 미(米)자를 쓰는 바람에 쌀의 나라라는 뜻을 품게 됐습니다. 조선에 중국이 미치는 영향이 줄고 일제가 본격적으로 식민화 사업에 돌입하자, 미(美)국보다 미(米)국이 더 쓰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미국은 얼마간 쌀의 나라로 불렸습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나서야 미국은 다시 아름다운 나라가 됐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반일감정을 드러내는 북한은 미국을 어떻게 부를까요? 북한은 2017년 조선중앙통신에서, 우리나라로 치면 KBS를 통해, 일본에 “간악한 쪽바리”라고 공개 모욕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북한은 당연히 중국발 용어인 미(美)국이라 부르지 않을까요? 놀랍게도 북한은 미국을 일본식 명칭인 미(米)국으로 부릅니다. 하긴, 미국과 다른 모든 나라를 왕따시키는 북한이, 미국을 아름다운 나라라 부르는 건 뭔가 우스워 보입니다. 어쨌든 과거의 적보다 현재의 적이 더 싫다는 걸까요?

이렇게 언어는 표류합니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든을 ‘바이든’으로 부르든 ‘날리면’으로 부르든 상관이 없습니다. 미국이 ‘며리계’로 불리든 ‘미리견’으로 불리든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미국에 쌀이 많냐’, ‘미국이 아름답냐’는 논쟁도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언어의 실제 모습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언어는 파롤로 나타나고, 인간은 누구의 파롤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 ‘정확하게’라는 의미가 ‘인간과 독립하여’이라거나 ‘정치에 오염되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라면요.

우리는 꽤나 편파적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번에 두 공간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각도 그렇습니다. 한꺼번에 여러 생각을 할 수는 없고 순차적으로 한 가지 생각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처하지 못하는 어딘가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편파적인 이유입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인 한, 인간은 결코 불편부당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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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 16. 표류하는 말, 난파된 정치 ③ | 표류자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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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는 말하기보다 공정한가

말하기는 대표적인 선택 행위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사전과 같은 랑그가 있습니다. 말문을 열 때, 우리는 랑그에서 적절한 단어들을 선택해 내뱉습니다. 물론 첫 머리만 고르고 나머지는 습관처럼 연상해내지만요. 말하기의 모든 과정이 완전히 선택적인 것은 아니지만, 선택이 말하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뱉을 단어를 선택했다는 건, 그 외의 나머지 말들을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선택한 것과 같으니까요. 인간은 한번에 두 가지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듣기는 어떨까요? 듣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흘려듣기(hearing)과 경청(listening)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수많은 소음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모든 소리를 우리는 실제로 듣는다 할 수 있습니다. 흘려듣기는 음파가 고막을 때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경청은 소리와 잡소리를, 말과 헛소리를 구분합니다. 흘려듣기는 아무런 선택도 수반하지 않지만, 경청은 적극적인 선택작용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1915년에 출간된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 실린 유명한 그림

특히,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이 경청하는 데 애를 먹는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압니다. 외국어가 대표적입니다. 외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외국사람이 하는 말은 소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외국어를 내뱉을 줄 모르는 사람은 들을 줄도 모릅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준 높은 언어는 지적인 언어습관을 가진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련된 단어와 정치한 구조, 풍부한 인용과 은밀히 녹인 코드로 상대에게 말을 걸어도, 듣는 사람이 말을 단지 생활을 영위하는 도구 중의 하나로만 여긴다면, 그 말은 헛소리에 가깝게 들릴 겁니다. 경청은 흘려들은 음파를 내 의식 안에 의미를 가진 말로 재구성하는 과정입니다. 그 해독과정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오직 홀로 진행하는 고독한 과정입니다. 경청으로 재구성한 말은 상대방이 그렇게 말했으리라 믿는 나의 믿음입니다.

‘언어는 말하기와 듣기의 연합으로 구성된다.’ 이 생각은 현대의 뇌과학도 동의하는 생각입니다. 1861년 파울 브로카(Paul Broca)가 뇌의 한 부분을 언어활동을 담당하는 영역으로 지목한 이후로 언어에 대한 신경해부학적 접근이 시작됐습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이후 1874년 칼 베르니케(Carl Wernicke)가 또 다른 영역을 언어 이해를 담당하는 영역으로 지목하고, ‘브로카 영역’을 언어 운동의 영역으로 해석함으로써 널리 알려졌습니다. ‘브로카 영역’을 다쳐 발성기관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실어증의 한 종류이지만, ‘베르니케 영역’이 손상돼 스스로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실어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루트비히 리히트하임(Lutwig Lichtheim)이 제3의 영역을 제시하고 각각의 연결관계가 단절되는 경우 실어증이 발생한다고 주장한 이후로 실어증의 여러 가지 양상이 정식화됐습니다. 물론 현대에는 각각의 영역을 규정하는 해부학적 기준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비판받고 있지만, 이렇게 고전적인 뇌과학적 도식이 아주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라는 점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말하기와 듣기가 아주 밀접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말하기는, 단지 발성기관을 움직이는 운동이 아니라 스스로 말한 것을 실시간으로 이해하며 계속해서 교정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이와 동시에 듣기도 누군가 말한 것을 계속해서 재구성하는 과정입니다.

Pascale Tremblay and Anthony Steven Dick (2016), “Broca and Wernicke are dead, or moving past the classic model of language neurobiology”에 수록된 뇌의 언어영역들 표시한 그림. 좌측은 베르니케의 주장이고, 우측은 활꼴신경다발 등을 추가해 베르니케의 주장을 고도화한 다니엘 게슈윈드(Daniel H. Geschwind)의 주장입니다.
남기춘 외 3명 (2010), 「실어증에 대한 다양한 접근」에 수록된 리히트하임의 도식. 리히트하임은 이 일곱 가지 연결 중 하나라도 끊기면 실어증이 나타난다고 주장했습니다.

뇌과학뿐만이 아닙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1896년 발표한 『물질과 기억』이라는 책에서 “정신적인 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귀를 갖고 있다고 다 들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마치 어떤 소리에 기타 줄이 공명하듯이, 감각에 정신이 공명해야 우리는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베르그송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지각이라는 작용은 겉에서 받아들인 사물을 그대로 정신에 투사하는 과정이 아닐 겁니다. 우리의 정신이 기억에 근거하여 특정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외의 소리를 무시할 때 우리의 지각은 완성됩니다. 인간에게 흘려듣기와는 전혀 다른 경청이라는 행위가 가능한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요?

결국 인간은 이중의 말하기를 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지칭하는 말하기, 즉 내가 생각한 것을 남에게 말하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경청, 다시 말해 남이 말했다고 믿는 바를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하기입니다. 경청도 말하기에 해당하므로 파롤 안에 놓입니다. 랑그 속의 인간은 언제나 파롤로 언어를 실현하니까요. 송신자의 음성을 들은 수신자가 의미를 해독하는 과정 역시, 음성을 내뱉는 것만큼 독특한 파롤입니다. 그 과정에서, 언어는 계속해서 ‘며리계’와 ‘미리견’ 사이를 표류합니다. 인간은 마이크처럼 단지 듣기만 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고막을 두드리는 음파가 뇌에 곧바로 새겨지는 기계처럼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듣는 행위는 스스로에게 말하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신과 같이 중립적이고 공명정대한 듣기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하기에 발화자의 의도가 포함된 정도로, 듣기에도 청취자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바이든’과 ‘날리면’ 중에 윤석열 대통령이 무엇을 말했느냐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듣고 싶은 것을 말하는 마음입니다.

표류자들이 사는 세상

1653년,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네덜란드 배 스뻬르베르(Sperwer) 호는 풍랑을 만나 난파했습니다. 그 배에는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이라는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낯선 땅에 떨어진 하멜과 동료 선원들은 정신없이 생존자를 찾고 떠밀려온 표류물에서 유용한 물건들을 모았으며 피난처를 마련했습니다. 몇몇 원주민이 그들을 발견하기는 했으나 구조 신호를 보내도 원주민들은 도망갔습니다. 결국 선원 중 한 명이 원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해 생존에 꼭 필요한 불을 얻었습니다.

다음 날 정오 무렵 천 명은 넘어 보이는 군인들이 텐트 주위로 들이닥쳤습니다. 군인들은 선원 중 몇 명을 데려가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나머지 선원들과 하멜에게는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이때 하멜은 꼼짝없이 죽는구나 생각했다고 적었습니다. 원주민의 지휘관은 그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으나 하멜과 동료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멜과 동료들은 일본에 있는 나가사키에 가고 싶다고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손짓 발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멜이 보기에는 서로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던 듯합니다. 포도주로 지휘관의 마음을 사기 전까지 하멜과 동료들은 아마 절망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주 남쪽 대정(大靜)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었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헨드릭 하멜은 우리가 잘 아는 하멜 표류기의 그 하멜이고요. 이 사건이 유럽에 알려진 건 하멜의 직업 덕분이었습니다.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서기로 일했거든요. 하멜이 이 사건을 기록으로 남긴 이유에는 당연히 진실을 기록으로 남겨 알리기 위함이었겠지만, 조선에 억류되었던 13년 동안의 월급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함도 아주 큰 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1668년에 출간된 『스뻬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 일지(Journal van de Ongeluckige Voyagie van ‘t Jacht de Sperwer)』였습니다. 유럽 사회에서는 이 이야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몇 년도 안 되어 여러 언어로 번역됐다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유럽에서만 기록된 건 아닙니다.

『스뻬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 일지(Journal van de Ongeluckige Voyagie van ‘t Jacht de Sperwer)』 표지 (사진=https://www.wiedenis.nl/gorinchem-en-de-voc/hendrick-hamel-en-het-vergaan-van-de-sperwer/)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하멜과 최초로 소통한 지휘관은 대정현감 권극중(權克中)이었습니다. 권극중의 보고를 받고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은 조정에 급히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서신에 따르면 권극중은 하멜 일행과 나름대로 의사소통에 성공한 듯 보입니다. 하멜 일행이 ‘낭가삭기(郞可朔其)’, 즉 나가사키에 가려 했다고 정확히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권극중은 일본어 통역관을 데려갔는데, 다행히 하멜 일행 중에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던 덕분에 릴레이 통역으로 조선인과 네덜란드인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멜이 거짓말을 했다고 보아야 할까요? 분명 하멜은 권극중과 의사소통에 실패했다고 적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정반대로 적었으니까요. 아니면, 하멜의 기록이 13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작성한 것이라 조선왕조실록보다 열등하다고 보아야 할까요? 더군다나 하멜은 밀린 임금을 돌려받기 위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자신이 조선 땅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려야 동정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과장된 표현이라 봐야 할까요?

이 문제는 정확히 반대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권극중과 하멜 일행이 나눈 대화가 꽤나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기엔 너무나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는 듯이 기록됐기 때문입니다. 권극중이 하멜 일행에게 크리스천을 의미하는 ‘길리시단(吉利是段)’이냐 묻자 그들이 ‘야야(耶耶)’ 하고 대답했다 적혀 있습니다.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 묻자 아마 하멜 일행이 ‘꼬레아(Korea)’라 대답했던 듯합니다. 실록에는 ‘고려(高麗)’라 써있거든요. 이 섬이 어딘지 아느냐 묻자 ‘오질도(吾叱島)’라 대답했나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권극중과의 대화가 끝나고 저녁이 되어서야 선원들은 위도를 측정해 조난지가 ‘껠빠에르츠(제주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질도가 제주도를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권길중과 선원들이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하멜의 이야기가 실린 효종실록의 원문. (사진=국사편찬위원회)

게다가 하멜 역시 기록 전문가인 서기였습니다. 13년 동안 부지런히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하멜 표류기’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요. 하멜의 기록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적지 않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관리들이 빼앗아간 물건들, 학대에 가까운 조선의 외국인 정책, 외국인만큼 차별받은 하층민과 소수자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왕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학문을 공부했는지는 상세히 기록되었지만 백성이 어떻게 사는지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풍속과 제도, 생활상에 대해서는 하멜의 기록이 좀 더 자세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누군가의 손을 통해서만 기록되니까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손을 거친 이상 그가 남긴 기록에는 그의 관점이 녹아들기 마련입니다. 기록뿐만 아니라 말과 몸짓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행위는 행위자의 관점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말하기도, 듣기도, 읽기도, 쓰기도 모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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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 16. 가짜뉴스의 철학

왜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에 진실이 승리한다고 믿을까요? 제가 보기에 이런 믿음은 신화이자 신앙입니다.

가짜뉴스는 우선 가짜인 뉴스입니다. 뉴스의 형식을 띠면서도 헛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뉴스를 읽을 때 검증하지 않습니다. 뉴스를 작성한 기자를 믿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자기 신뢰를 팔아먹는 것이고, 독자는 뉴스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만 빌리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여기가 가짜뉴스의 공급과 수요가 맞닿는 지점입니다.

거짓말은 상대를 속이기 위해 사실과 다른 말을 정교하게 짜맞춘 구조입니다. 그냥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모두 거짓말인 것은 아닙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나 윤석열 대통령의 보좌직원들이 둘러대는 소리가 거짓말이라기보다 헛소리로 들리는 이유입니다. 그저 사실과 다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헛소리(bullshit)입니다. 곤경을 벗어나기 위한 의도로 했든, 진심으로 믿어 꺼냈든, 별 생각없이 던졌든 관계없이 사실과 다르면 헛소리입니다.

반면, 거짓말은 상대를 속이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합니다.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결정적으로 속이고 싶은 딱 한 문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문장을 철저히 사실에 맞게 말할수록 상대가 속아넘어갈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더군다나, 상대를 속이려는 그 한 문장은 오히려 상대가 듣고 싶어하는 문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자주 느끼는 바이지만, 우리 주변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실은 우리의 기호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사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짓말은 더 그럴듯합니다. 소설은 거짓말이지만 가족의 하소연보다 더 공감될 때가 있습니다. 요즘의 웹소설이 그러하듯이, 현실성을 다소 결여하더라도 킹왕짱 주인공이 딱히 고난과 역경이랄 것 없이 모든 사건을 척척 해결해 나가면 이야기는 잘 팔립니다. 거짓말쟁이도 바로 그 점을 노립니다. 뻗을 자리를 보고 눕는 거죠. 영 안 속을 것 같은 말과 대상은 거짓말에 그다지 노출되지 않습니다. 그럴 듯한 말을 그렇게 잘 믿을 법한 사람에게 정교하게 전개하는 것, 그것이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은 함께 사는 인간의 근원적인 능력입니다. 유발 하라리가 인지혁명으로 지적했던 상상력이 거짓말을 만듭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능력이 종교와 정치를 가능케 했습니다. 거짓말이 인간을 인간처럼 만든 겁니다. 사실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도 엄밀히 따지면 거짓말입니다. 세상에 같은 핑크는 없듯이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모습과 능력을 타고납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평등하다니요? 더구나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회색인간들이 있습니다. 갓 태어난 태아는 돌고래보다 지능이 낮습니다. 우리집 강아지가 재수없는 상사보다 더 인간다워 보일 때가 있고요. 그러나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감각을 부정합니다. 거짓말은 고도의 정신능력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정신능력을 공동체를 위해 발휘하느냐, 일신의 영달을 위해 사용하느냐에서 비롯되는
듯합니다. 저는 과거 ‘1박2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참 재밌게 봤는데요. 거기에서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을 유행시킨 게 이제보니 참 위험하게 보입니다. 물론 1박2일의 출연진은 서로 깊은 우정으로 묶여 있음을 잘 알기에, 그런 말을 농으로 던질 수 있었을 테지만요. 그걸 보는 수많은 익명의 시청자들은 정말 자기만 아니면 된다고 결심했는지도 모릅니다. 거짓말과 참말 사이에서, 모두를 생각하면 참말을 해야 하는 순간에서조차 ‘나만 아니면 돼’라고 외치는 기자들이 많아졌을 수도 있으니까요. 가짜뉴스가 본격적으로 사회 문제로 거론되기 시작한 건 2016년, 박근혜 정부 시기입니다. 전성기를 누리던 1박2일 시즌1이 종영한지 4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짜뉴스는 2016년을 기점으로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출처: 구글트렌드)

뉴스는 우리 모두를 위해 접하고 싶지 않은 것을 접하도록 돕습니다. 위대할 것만 같던 정치인의 실책, 끔찍한 사망사건과 이를 처리하는 정부의 대응, 아직도 횡행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 이 모든 것들이 뉴스감입니다. 그러나 가짜뉴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자 본인을 위해, 혹은 그 거짓말을 듣고 싶어하는 몇몇을 위해 정교히 가다듬은 말이 뉴스의 권위를 빌려 퍼져갑니다. 가짜뉴스는 동료 기자들의 신뢰를 빌리면서도 갚지 않는 악성채무자입니다. 가짜뉴스 전성시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비슷합니다. 김어준이라는 아이콘을 보면서, 저는 이 거품이 이미 깨졌다고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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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래 글에 대한 답글이었다.


가짜 뉴스 관련 영상 공유 – 안될과학

언론/미디어

몬스

몬스·네트워크 과학을 공부/연구합니다.

2023/01/14

가짜 뉴스에 대한 짧고 유익한 영상이 있어 공유해봅니다.

https://www.youtube.com/embed/aJWVGy5jMK4?rel=0https://youtu.be/aJWVGy5jMK4

영상 중반 즈음에 다음과 같은 실험 결과를 소개하는데요.

어떤 정치 후보가 중범죄자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가짜 뉴스를 보여줬더니, 정정기사를 보여준 것과 상관 없이 해당 후보를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의 비율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이런 실험 결과들이 모이면 가짜뉴스에 대처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 과학적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보도 기사보다 정정기사를 더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노출시킬 의무가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죠. 원 기사에도 정정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어 보이구요.

 누구 한 명 죽일놈 만들어 놓고 아니면 말고 식의, 혹은 그걸 유도하는 식의 뉴스에 너무나 많이 당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안된다는 과학적 증거들을 쌓아나가고 이를 반영하는 식의 피드백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2023. 1. 29. 표류하는 말, 난파된 정치 ④ | 칼로 물 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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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자연, 분할하는 정신

우리는 참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의 ‘봄바람 휘바이든’ 사건에서, 1853년 조선 부산에 표류한 ‘사우스 아메리카 호’와, 1653년 조선 제주에 표류한 헨드릭 하멜 이야기까지. 이렇게 시공간적으로 먼 사건이 서로 유사한 이유는 바로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포착하는 방식이 바로, 표류하는 자연을, 정신이 분할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연 그 자체는 무지개와 같습니다. 무지개는 경계를 확정할 수 없는 연속체(continuum)입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말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정신 현상이지만, 입을 떠나 상대방의 귀에 닿기 전까지는 경계를 획정하기 힘든 파동, 즉 자연 현상입니다.

연속체인 자연에서 모든 사물은 끊임없는 변화 아래 놓입니다. 대표적으로 브라운 운동(Brownian Motion)이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1827년,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이 최초로 보고한 현상입니다. 브라운은 현미경으로 꽃가루를 관찰하던 중, 입자의 모양과 생사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미세입자들이 끊임없이 불규칙하게 움직인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끝없는 표류가 브라운 운동입니다.

https://www.youtube.com/embed/R5t-oA796to?rel=0https://www.youtube.com/watch?v=R5t-oA796to

브라운 운동의 실제 모습 (출처: Pollen Grains in Water – Brownian Motion)

브라운 운동의 궤적은 이렇게나 불규칙합니다. (출처: Ahmed El Kaffas (2008), Measuring the mechanical properties of apoptotic cells using particle tracking microrheology)
로버트 브라운은 아마 이런 현미경으로 브라운 운동을 관찰했을 테죠. (출처: https://www.fleaglass.com/ads/a-berge-late-ramsden-compound-microscope/)

브라운 운동의 원인은 사물들 사이의 상호작용입니다. 꽃가루가 표류하는 이유는 꽃가루가 너무 작았기 때문입니다. 현미경으로 작은 입자를 관찰할 때에는 도말법(smear method)을 사용합니다. 도말법은 얇은 유리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관찰하고자 하는 입자들을 그 위에 떨어뜨려 얇게 펴는 방법입니다. 꽃가루는 도말을 위해 떨어뜨린 바로 그 물방울 때문에 움직였습니다. 수많은 물 분자들과 충돌했기 때문에 꽃가루가 움직이게 된 겁니다. 세상은 사물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세상 만물은 주변의 만물과 끊임없이 부딪힙니다. 그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만물은 표류합니다.

모든 사물은 다른 사물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표류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수많은 공기 분자들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기로 인한 우리의 표류는 너무나 미세해서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 분자와의 충돌로 우리가 표류하기에는, 우리 몸이 너무 크고 공기 분자가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강물의 거대한 흐름이나, 사람이 가득 찬 지하철에서나 표류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 수준으로 관점을 확대해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세포가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우리 몸을 단단히 구성하지만, 수명을 다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표류하는 먼지가 됩니다. 세포를 구성하는 단백질을 볼까요? 아미노산, 호르몬, 신경전달물질과 같은 수많은 분자들이 세포와 세포 사이를 표류합니다. 분자들이 다양한 반응으로 분해되고 합성되면서 우리의 안과 밖을 표류합니다. 분자를 이루는 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이 우리 몸을 이루고, 우리 몸을 이루던 물질이 몸 밖으로 떠납니다. 숨만 쉬어도 바깥의 공기가 들어오고 몸 안의 물과 공기가 나갑니다. 80일이면 우리 몸을 이루는 대부분(약 30조 개)의 세포가 교체되고1년이면 우리 몸을 이루던 거의 모든(약 98%) 원자가 교체됩니다.

표류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습니다. 일정하다는 말은 경계를 전제합니다. 특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일정한 것이니까요. 자연은 그런 기준이나 경계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경계는 오직 생물의 정신이 자연을 도려낸 결과입니다. 실제 자연을 관찰하면 어떤 경계도 발견할 수 없지만, 생물은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를 설정합니다. 우리의 정신도 이해되는 것과 이해되지 않는 것을 경계 짓습니다. 브라운 운동도 사실 브라운이 처음 발견한 게 아닙니다. 브라운도 논문에서 밝혔듯이, 이미 60년쯤 전에 Stiles와 Gleichen이라는 학자가 브라운 운동을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운동이 꽃가루의 생식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짐작했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견해를 비판적으로 계승해 학술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건 브라운이 처음입니다.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 (Robert Brown, 1773년 12월 21일 ~ 1858년 6월 10일)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B2%84%ED%8A%B8_%EB%B8%8C%EB%9D%BC%EC%9A%B4_(%EC%8B%9D%EB%AC%BC%ED%95%99%EC%9E%90))

브라운 운동은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열의 분자-운동 이론이 요구하는 비유동 액체에 떠있는 작은 입자의 움직임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일반화한 방정식을 도출한 이후부터 물리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현상이 됐습니다. 미세입자의 진동은 고전역학적으로는 무질서해 보이나 열역학적으로는 쉽게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이 연구는 모든 사물이 파동일 수 있다는 양자역학적 세계관이 태동하던 시기에 발표됐습니다. 미세입자들의 충돌이라는 현상은, 모든 원자는 입자여야 한다는 고전역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던 아인슈타인에게 더없이 알맞은 사례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연구가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전쟁 한가운데 위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한 세기 전의 브라운은 알았을까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B%B2%A0%EB%A5%B4%ED%8A%B8_%EC%95%84%EC%9D%B8%EC%8A%88%ED%83%80%EC%9D%B8#/media/%ED%8C%8C%EC%9D%BC:Einstein_1921_by_F_Schmutzer_-_restoration.jpg)

자연은 이렇게나 무질서하고 무작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연속되어 있습니다. 브라운 운동에서 궤적을 그리듯이, 브라운 운동에 대한 연구의 역사에서 로버트 브라운과 아인슈타인을 꼽는 일은, 자연의 무한한 흐름에서 특정한 사례들을 선별하는 일입니다. 말 알아듣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공기의 파동에서 우리가 들을 소리만 선별해 듣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리에는 잡음(noise)이 섞여 있습니다. 잡음의 파도 속에서 표류하던 의미를 건져 올리는 게 바로 정신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말해왔다

정신은 자연을 나누고 쪼개고 분할하고 해체합니다. ‘생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디아노이아(διάνοια)는 ‘가로질러-‘라는 뜻의 디아(διά)와 ‘정신’을 뜻하는 누스(νοῦς)의 합성어로 보입니다. 그런데 디아는 ‘둘로 나눈다’는 디카제인(διχάζειν)에서 비롯된 듯합니다. 디카제인은 ‘둘’이라는 수를 뜻하는 뒤오(δύο)에서 왔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사유하는 우리의 정신은 스스로 묻고 답합니다. 단일한 정신이 질문자와 답변자 둘로 나뉘어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고 답하며 더 나은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변증법’, 즉 디알렉토스(διάλεκτος)라 부릅니다. 변증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둘을 알기 위해서는 경계를 지어야 합니다. 경계는 정신의 활동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계’를 의미하는 호로스(ὅρος)는 말과 사물의 ‘정의(定義)’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합니다. 인간의 정신이 자연을 나누는 행위는 ‘분석’이라 합니다. 분석(分析)이라는 한자어가 ‘나눌 분’ 자와 ‘쪼갤 석’ 자로 이루어진 이유입니다. 같은 뜻의 영어 어낼러시스(analysis)는 그리스어 아날뤼에인(ἀναλύειν)에서 왔습니다. 아날뤼에인은 ‘완전히-‘를 의미하는 아나(ἀνά)와 ‘풀다’를 의미하는 뤼에인(λύειν)의 합성어라 합니다. 사물에 경계를 지으면 자연히 풀어지고 쪼개지기 때문입니다.

‘쪼갠다’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로 템네인(τέμνειν)인데, 부정어 아(ἀ)가 붙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상의 상태’를 의미하는 아토모스(ἄτομος)가 됩니다. 바로 ‘원자’를 의미하는 영어 아톰(atom)의 어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결코 쪼갤 수 없는 무언가가 있던가요? 모든 것은 쪼개져 다른 것을 낳기 마련입니다.

세상 만물은 미세한 것들로 쪼갤 수 있습니다. 달리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원자들로 구성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미세한 것들은 끊임없이 날리고 흘러갑니다. 우리 눈에는 동일하게 보여도 만물의 구성요소는 흐르고 있습니다. ‘흐른다’는 뜻의 플레인(φλεῖν)이 라틴어 플루에레(fluere)가 되고, ‘이미 흘러간 것’을 뜻하는 플룩수스(flūxus)가 ‘끝없는 변화’를 뜻하는 영어 플럭스(flux)로 쓰입니다. 표류하는 자연이 끝없는 변화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석’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아날뤼에인(ἀναλύειν)의 숨은 뜻을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알뤼에인(ἀλύειν)은 ‘헤맨다’는 뜻입니다. 알뤼에인에 부정어 아(ἀ, ἀν)가 붙어 표류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지 않았느냐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 정신은 자연을 분할해 더 이상 표류하지 않을 때, 자연을 올바로 분석했다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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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27. 다이몬(δαίμων): 사이, 행위, 행복

세줄요약
1.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다이몬은 ‘사이’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2. 플라톤은 『향연』에서 다이몬을 이용해 ‘사이’ 영역을 보여주었다.
3.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에 이르는 행위의 단초를 ‘사이’에서 찾았다.

들어가기
데몬의 개념과 정치적 함의까지 연결지은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이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시는 듯해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다이몬(δαίμων)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자 글 적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헤시오도스는 다이몬을 인간의 수호자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다이몬은 ‘신’과는 다소 다른 존재입니다. 신에게는 테오스(θεός)라는 단어가 따로 있었거든요. 다이몬은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묘한 존재입니다. 다이몬을 그렇게 보는 그런 경향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까지 이어지는 듯합니다.

플라톤의 다이몬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다이몬이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디오티마라는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인데요.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에게 호되게 당합니다. 바로 이분법적 시각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냐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디오티마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물어봅니다.

“무슨 뜻인가요, 디오티마?”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에로스(사랑)가 추하고 나쁘다는 것인가요?”

이런 시각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 그럼 추한 것이지. 세상을 둘(δυάς)로 나누는 것(διχάζειν)이 정의(δίκη)입니다. 이런 설명은 헤시오도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초에 카오스(Χάος)가 있었는데, 가이아(Γαία)가 나고 나서야 사랑이 나타납니다. 땅이 있어야 공간이 하늘로 나뉜다는 점이 바로 이 신화가 시사하는 바입니다. 특히, 존재는 이분법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모든 존재는 있는 것입니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당연한 시각을 디오티마는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무슨 소리세요?” 그녀가 대답했네. “무엇이든 아름답지 않으면 추해야 한다고 상상하는 건가요? [중략] 옳은 의견은 이해와 무지 사이 그런 위치에 있어요. [중략] 그러니 아름답지 않은 것을 추하다 하지 마세요.” 그녀가 말했네. “혹은 좋음이 아니면 나쁨이라고도 마세요. 마찬가지로 에로스도, 좋은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니라고 인정하신다면, 추하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지 마시되 그 둘 사이의 무언가로 여기세요.” (『향연』, 202a)

사랑은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μεταξύ)에 위치합니다. 어떤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 좋음과 나쁨 모두 사이에 중간의 영역이 있습니다. 사랑과 의견, 즉 인간의 행위가 일어나는 영역이 바로 그 중간 영역입니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도 짚어볼 만합니다.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은 언제나 신이고,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미 존재한 것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할 뿐입니다. 인간이 무얼 없앤다고 해도, 예컨대 음식을 먹어 치운다고 해도 그것은 비존재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모습을 바꾸는 것입니다. 인간의 활동은 존재와 비존재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가사자(可死者)입니까?” 내가 물었네.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가사자와 불사자 사이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디오티마?”
“위대한 다이몬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리고 모든 다이몬은 신과 가사자 사이에 있습니다.”
(『향연』 202e)

다이몬은 신과 인간 사이의 무언가입니다. 사랑이 인간의 활동이라면, 어떻게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 즉 ‘인간에게서 멀어지며 동시에 신에 가까워지는 것’일까요? 바로 타인 때문입니다. 디오티마가 이후에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랑은 정신적인 출산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듯이, 위대한 행위를 해낸 인간은 모방자를 낳기 때문입니다. 위대하다는 건 신에 가깝다는 뜻입니다. 아무런 모방자도 낳지 못한 인간은 결코 위대하다 할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의 행위가 얽히고설켜 인간의 행위를 신에 가깝게 만듭니다. 홀로 행위하는 인간은 결코 위대해질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이몬
플라톤의 다이몬은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플라톤에게 다이몬은 인간의 행위로 닿을 수 있는 ‘사이’의 무언가였습니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 차례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행복이 에우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 즉 좋은(εὖ) 다이몬들(δαιμόνια)로 불렸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 전체와 행위의 영역에서 행복을 조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행복이라 많은 사람들과 교양있는 사람들이 말하는데, 그들은 잘 삶(εὖ ζῆν)과 잘 함(εὖ πράττειν)을 행복한 것과 같다고 여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5a20)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잘 삶이나 잘 함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 해석입니다. 삶은 함으로 구성됩니다. 뭐든 잘 하다 보면 잘 살아질 겁니다. 반대로, 삶은 함의 조건입니다. 잘 살아온 사람만 뭐든 잘 하게 될 겁니다. 삶과 함, 인격과 행위는 이렇게 선순환을 형성합니다. 중요한 건 그 시작입니다. 새로운 행위를 시작하는 능력인 자발성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인 불행은 나쁜(κακός) 다이몬일까요? 맞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카코다이모니아(κακοδαιμονία)는 불행을 가리켰습니다. steinsein님께서 지적하셨다시피 다이몬은 인간을 돕습니다. 다이몬이 인간을 좋게 도우면 행복, 나쁘게 도우면 불행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다이몬의 도움은 운을 의미하는 튀케(τύχη)라는 단어로 나타납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 튕카네인(τυγχάνει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에우다이모니아나 튀케 모두 인간의 능력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튀케와 같이 운을 뜻하는 라틴어 포르투나(fortuna)도 인간의 능력인 비르투(virtu)와 대립쌍을 이루는 단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한 삶에 운이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했듯이 행위가 삶을 조절하기 때문에 축복받지 않은 자도 비참해지지 않는다. 그가 결코 미워하거나 비열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진정 좋고 현명한 사람은 그가 가진 능력으로 언제든 알맞게 행위하여 운의 공격을 적절히 견디리라고 우리가 여기기 때문에.  (『니코마코스 윤리학』, 1101a1)

인간이란, 삶이 함을 낳고 함이 삶을 쌓는 순환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무력합니다. 잘 살아와도 실수할 수 있고, 하지 않은 짓으로도 삶이 망가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행복은 ‘무엇’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능력과 운의 종합체라고 하면 가장 가까울까요?

그러니 인간은 여러 ‘사이’들에 놓인 것입니다. 삶과 함, 탁월함과 열등함, 행운과 불운… 세상의 여러 ‘사이’들에서 적절한 것을 택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중용(μεσότης)입니다. 양 극단을 떠올리고 그 사이에서 가장 상황에 어울리는 행위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적절한 행위는 어떻게 판별할까요? 바로 여러 인간들의 의견입니다. 행위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도 역시 여러 타인들 사이에 놓인 존재이므로, 행위는 타인을 벗어나서는 온전히 평가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에서 열거한 여러 덕목들을 아무리 외워도 ‘어느 상황에나 딱 들어맞는 행위의 왕도’가 수학 공식처럼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진리는 신에게만 허락된 것이고, 인간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여러 의견을 내놓으니까요.

정리: 다이몬은 좀 더 연구되어야 한다
플라톤의 다이몬이 ‘사이’라는 영역을 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이몬은 그 영역에서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두 철학자의 다이몬에 공통점이 있다면 복수의 인간을 전제한다는 점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πόλις)가 많은 수를 의미하는 폴뤼스(πολύς)와 비슷한 발음으로 불리는 점과 라틴어에서 다수를 의미하는 물투스(multus)의 비교급이 플루스(plus)라는 점, 물투스의 최상급인 플루리무스(plurimus)는 복수를 의미하는 플루랄리스(pluralis)를 낳고 같은 뜻의 영어 플루럴(plural)이 여기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이몬 개념이 정치철학적으로 좀 더 주목됐으면 하고 바랍니다.

흔히 서구정신사는 철학으로 대표되는 ‘헬레니즘’과 크리스트교로 대표되는 ‘헤브라이즘’의 두 축으로 서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는 헬레니즘은 ‘사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사이는 그 자체로 모호합니다. 딱 떨어지지 않거든요. 그래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그 영역에서 인간의 행위가 가진 특별함을 발견하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았습니다. 반면 제가 보기에 크리스트교는 사이보다 진리를 좀 더 추구한 듯합니다. 신의 절대성 앞에 인간의 상대성은 언제나 악의 가능성을 품고 있으니까요. 현대 철학에서 사이와 모호함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튼 슈타인자인 님의 글을 잘 읽었다는 장광설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연구 계속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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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7. 26. 책임지고 사퇴하기란 무엇인가

사고친 공직자가 “책임지고 사퇴하겠다”고 하면 “똥 싸질러 치우지도 않고 내뺀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리석은 소리다. 사퇴는 공직자가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행위다. 첫째는 그것이 내 잘못이라 인정하는 행위요, 둘째는 그러므로 나는 여기 더는 있으면 안 될 놈이라고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격 없는 놈이 자리를 지키는 게 더 큰 문제다. 어떤 잘못을 했는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합법적으로’ 방해할 테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기 잘못을 축소시키려 든다. 우리 법에서 범죄자가 스스로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는 범죄가 아니다. 증거인멸죄도 타인의 증거인멸을 도운 자에게만 해당된다. 그러니 공직자가 사고를 쳤다면 한시라도 빨리 권한을 중지해야 한다.

평등만큼 중요한 차등

공직자의 책임과 사퇴의 관계를 말하려면, 평등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문자 그대로 ‘평등하다’고 믿나? 그렇게 믿으면 순진한 거다. 대한민국은 합법적 차등을 인정하는 국가다. 대한민국이 평등하다는 말은 기본권이나 참정권처럼 헌법과 법률로 정한 일부 사안에 대해서만 타당한 이야기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니까. 우리 법체계에는 평등보다 차등을 규정한 조항이 더 많다.

여기서 잠깐. 차등과 차별은 다르다. 법으로 평등하게 하라고 정한 사안에 대해서까지 차등을 두면, 그때부터는 차별이다. 차등은 사회에 질서를 깃들게 한다. 질서 있는 사회야말로 정체(政體)다. 질서는 모종의 제한이고, 수직적 차등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세계에서 무한자는 악이다. 마치 데이트 코스를 수십 번 제안해도 “글쎄”만 반복하는 연인처럼.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어떤 질서도 용납지 않으려는, 머리에 꽃만 들어찬 이상주의자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말이다.

권리와 의무는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이 수직적 차등이다. 헌법에서부터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차등을 둔다. 국회 밖의 국민에게는 입법권이 없다는 말이다. 국민은 법안을 발의할 수 없고 단지 국회의원에게 “청원”할 뿐이다. 합법적인 차등 대우를 받는 사람은 그에 걸맞은 의무를 이행하고, 권리를 누린다. 법에 명시된 수많은 직위가, 수직적 차등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질서를 이룬다. 관료제라 부르는 차등의 피라미드는, 물론 사회의 전부라 해서는 안 되지만,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임에는 틀림없다.

공직자의 책임은 지위에서 온다

문제는 자리와 사람의 불일치이다. “책임지고 사퇴하라”는 구호가 등장하는 모든 사고에는 담당자의 판단미스가 있다. 모든 공직자가 자리에 걸맞게 처신했다면 사고는 나지 않을 것이다. 천재지변은 못 피하더라도, 적어도 인재는 피할 테다.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 높은 사람이 할 법한 결정을 하리라는 믿음이 그를 그 자리에 앉혔기 때문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우리 사회는 일단 사람을 앉히면 그에 맞게 인적 물적 인프라를 제공한다. ‘자, 멍석 깔았어,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좋은 세상을 만들어 봐!’ 책임은 여기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면? 어떤 행정조치로도 결코 회복할 수 없는 피해, 사망사고였다면? 담당자가 적절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면? 알고도 무마했다면? 내 탓 아니라며 면피에만 급급하다면?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의지도 없다면?

결자해지라는 가스라이팅

모든 피해에는 가해자가 있다. 설사 그 피해가 우연의 산물이어도 가해자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결부됐다면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공직자는 자기 소관에 책임을 져야 한다. 모든 공직자는 적어도 그 자리를 수락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용서받을 유일한 길은 피해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일이다. 그런데 형법은 처벌을 아주 좁게 제한한다. 가해에 엮여 들어간 공직자는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정치적으로 처벌해야 한다. 수직적 질서에서 배제해야 한다. 어떤 처벌로도 피해를 갚을 수 없는 범죄라면, 가해자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피해자가 스스로를 해칠 만큼 도탄에 빠졌다면, 공직자는 반드시 사퇴해야 한다. 사퇴하지 않는다면 쫓아내기라도 해야 한다.

사퇴보다 문제 해결이 먼저라고? 우리 이제 솔직해지자. 그건 인치주의다.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고. 결자해지만 외치는 사람은 사실 가스라이팅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쟤 아니면 안 돼.” 그럴 리가 있나? 그것도 일종의 신격화다. 우리 대한민국은 생각보다 더 질서잡힌 사회다. 문제 해결은 다른 사람이 해도 된다. 아니, 더 잘한다. 길 한복판에 똥 쌀 정신을 가진 놈이 자기 손으로 치울 정신은 있을까? 똥쟁이는 빨리 화장실로 보내 버려야 한다. 똥을 숨기겠답시고 더 흩뿌리기 전에.

추모와 죽음 방지라는 사퇴의 의미

사실 사퇴는 무력하다. “내 탓이오” 인정해도 죽은 가족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진다. 중요한 건 사퇴 이후다. “제발 다른 사람이 제 가족처럼 죽지 않게만 해주세요.” 수많은 유가족들이 비슷한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추모(매장)와 살인 금지는 인류의 본질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모를 방해하고 거듭 사람을 죽게 하면 그보다 모욕적인 일이 없다.

그래서 책임자의 사퇴가 중요하다. 사퇴는 재발방지를 위한 첫걸음이다. 내 임기 중에 이런 일이 났으니 물러나겠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사퇴는 이만저만한 뜻을 전하는 사과, 혹은 재발하지 않기를 기원하는 제사와 유사하다.

책임은 짐이다. 등에 지는 짐처럼 무거운 것이다. 관직에 오르려는 자, 관모의 무게를 견뎌라. 자리에서 물러나 견디는 체라도 하라. 사퇴 요구를 정치적이라 비난하는 자만큼 정치에 몰두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 자들에게는 정치라는 단어도 아깝다. 우리말에는 거짓말, 억지, 권모술수처럼 적확한 단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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