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여진석 님(필명 ‘반달돌칼’, 이하 필명으로 지칭)께서 쓰신 시 「시냇물」, 「Time machine」에 대해 비평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작가와 독자가 구성하는 공동체의 윤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내재적 선(internal good)’이라는 개념을 경유하여 다음 네 가지 사안에 주목했습니다.
먼저, ‘작품을 발표하는 행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반달돌칼의 특징은 왕성한 작품 ‘발표’ 활동입니다. 이러한 활동이 작가-독자 공동체에서 윤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둘째로, ‘비평가의 자격’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단지 작가-독자 공동체에서 독자는 적극적인 비평가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어느 때 독자는 비평가가 될 수 있는지, 제 자신은 그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셋째로, ‘작품 그 자체’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반달돌칼의 작품에서 독자는 어떤 의미를 길어낼 수 있는지 가능한 정교하게 철학적으로 논증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시를 읽을 때 어떤 과정으로 읽는지도 함께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모임은 ‘취미 철학 독서모임’으로, 철학책 읽기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러한 모임에서 지켜야 할 윤리가 무엇인지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 모임 구성원 모두가 ‘책을 읽는다’는 행위와 ‘글을 쓴다’ 혹은 ‘작품을 만들어 발표한다’는 행위의 의미를 되새기기를 바랍니다. 급하게 쓴 글이라 논지가 부실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의견을 수렴해 더 좋은 글로 발전하고자 하니, 질문이든 비판이든 자유롭게 제기해주시면 성실히 답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넘어가기 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당부합니다. 비판은 친애가 전제된 상태에서만 가능한 활동입니다. 저는 비판 대상을 아끼지 않는다면 결코 비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글을 단지 인신공격으로 치부한다면, 그래서 제가 누군가를 몰아내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면, 제 글을 전적으로 오독한 것이고, 제가 한 행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비판의 대상과 계속해서 생각을 나누고 싶기 때문에 비판을 합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공들여 작품을 읽고 글을 써서 제 생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반달돌칼이 더 나은 작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사무적인 친절함으로 가장했을 것입니다.
2. 내재적 선과 부끄러움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은 매우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사람들에게 내 작품을 보여주고, 마음껏 해석할 여지를 열어놓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내 작품에 대해 좋은 평가만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작가로서는, 작품에 대한 나쁜 평가가 작가 자신에 대한 공격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작품을 발표하는 일이란 작가에게는 꽤나 위험한 일입니다. 이러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작품을 공개한다는 점에서, 반달돌칼의 왕성한 작품활동은 탁월한 용기에 따른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행위는 반드시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작품에 대해 좋다(good)거나, 혹은 나쁘다(bad)고 평가합니다. 이 점에 착안해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내재적 선(internal good)’이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사회적 명예나 지위, 돈처럼 나 자신의 외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선의 한 종류겠지만, 어떤 행위를 많이 연습해 잘 해내는 것 자체도 일종의 선, 그 중에서도 특히 내 안에 있는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의 이성으로 도출되는 보편적인 명령인 도덕적 선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으로, 굳이 이름 붙이자면 윤리적 선의 한 종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은 작품 자체가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 작품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분투했는지, 그러한 경지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범접할 수 없는 것인지까지 판단 기준에 포함됩니다.
내재적 선은 정말로 탁월해지려는 경쟁에 따른 결과이지만, 그러한 선의 성취는 실천(practics)에 참여하는 공동체 전체에 좋은 것이라는 점이 내재적 선의 특징이다.
Alasdair MacIntyre, After Virtue, p.190.
그렇다면 작품을 발표하는 행위란 윤리적으로 어떻게 해석될까요? 나의 작품을 감상해달라는 요청은, 당연히 그러한 기준에 따라 내 작품을 평가해달라는 요청이 될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만든 나 자신까지 평가해달라는 요청이 됩니다. 작품을 발표하는 대상이나 공간도 중요합니다. 작가는 아무에게나 아무데서나 작품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작품 감상을 요청한다는 행위는, 이 작품을 감상할 당신이 작품과 작가의 성숙도를 판단하고 평가하기에 적절한 독자라는 인정이자, 작가 자신이 앞으로 감상자가 하는 판단에 순종하겠다는 약속으로도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실천은 탁월함의 기준에, 그리고 선의 성취뿐만 아니라 규칙에 대한 순종에 관여한다. 실천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러한 기준들의 권위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기준들에 의한 판단에 따라 내 수행(performance)의 미숙함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MacIntyre, After Virtue, p.190.
내재적 선의 목적은 늘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경험 많은 타인의 판단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늘 양가적인 감정에 시달립니다. 내가 보기엔 꽤 괜찮아서 사람들에게 발표하고 싶은데, 어디선가 노숙한 독자가 나타나 내 작품을 가차없이 까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작품을 발표해야 성장하겠지만,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작가는 발표를 주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신중하게, 독자를 상상해 작품을 끝없이 퇴고하는 것입니다. 그 토대는 부끄러움에 있습니다.
요컨대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에게는 작품을 숨기고자 하는 부끄러움이, 그러면서도 동시에 발표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런 욕망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두 갈래로 쪼개진 내가 싸우며 작가는 작품과 씨름합니다. 그 과정에서 작품은 성숙합니다.
반달돌칼에게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이 작가의 특징은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빈번한 발표가 이를 입증합니다. 시라는 형식의 작품은 단 두 건 올렸지만, 그 외에 그림도 수 차례 올렸으며, ‘사유’라거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생각을 자주 발표합니다. 그래서 작품은 너무나 미숙합니다. (작품의 수준에 대해서는 이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적극적인 의견 표출은 공동체의 활성화에 기여합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구성원은 자신의 의견이 소음이 되지는 않을지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침묵만큼이나 소음도 공동체를 쇠약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 없는 작가의 윤리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분노와 모욕감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작품은 경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작품입니다. (물론 천재라면 아주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천재가 아니라는 전제로 쓰겠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요즘은 <반짝반짝 캐치! 티니핑>이라는 만화가 어린 아이들 사이에 유행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대통령 탄핵 집회가 여의도에서 크게 열렸습니다. 어른들이 이에 대한 뉴스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는 티니핑이 중요한 나머지 대화에 자꾸 끼어듭니다. 처음 몇 번은 봐주겠지만, 그게 반복되면 어른은 아이를 혼냅니다. 혼내는 일은 분노의 한 모습입니다. <티니핑>에 관한 아이의 의견(작품이라 해도 무방합니다)은 탄핵을 앞둔 어른과의 공동체에서 끝내 환영받지 못한 것입니다.
어른-아이 사이니 혼내기라는 작은 수준의 분노가 가능합니다. 어른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곧잘 발생합니다. 작가-독자 관계입니다. 실천의 원숙함이 한참 모자라는 사람이 자꾸만 시, 철학, 그림 따위의 작품을 발표합니다. 그렇다면 시에, 철학에, 그림에 인생을 바쳐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분노를 느낍니다. 나아가 그런 수준 낮은 작품들이 외재적 선을 강탈한다면, 다시 말해 명예나 돈을 얻는다면, 그러한 공동체에서 작가 지망생은 모욕감을 느낍니다. 내재적 선이 오염됐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반달돌칼은 어떤 경계에 서있는 듯합니다. 그건 퇴보와 발전의 경계일 수도, 찬사와 모욕의 경계일 수도 있습니다.
3. 작품과 작가에 대한 독자의 윤리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될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서툴기 때문입니다. 저는 철학 고전 읽기를 취미로 몇 년 동안 하고 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시도 취미로 몇 편 조잡하게 써봤을 따름입니다. 시 읽기는 쓰기보다 더 못합니다. 그림은 아예 그리지도 보지도 못하고요.
관련된 경험이 결여된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내재적 선을 판단할 수 없다.
MacIntyre, After Virtue, p.189.
그래서 지금까지는 크게 비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반달돌칼은 어쨌거나 작품활동을 통해 우리 모임을 활발히 하는 데 기여하고, 저는 그러한 작품활동을 판단할 자격도 불충분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말할 수 있는 구석이 몇 가지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반달돌칼의 작품세계에서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퇴고하지 않음’과 ‘답보‘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반달돌칼의 작품을 통해 무엇인가 ‘없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힘든 길을 나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정교하게 논증해보겠습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작품을 마치 기관총을 갈기듯이 발표하는 태도입니다. 모든 작품은 독자에게 감상의 윤리를 묻습니다. 작품을 대하는 독자의 마땅한 태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이지요. 그 매개는 시간과 크기입니다. 작품이란 기본적으로, ‘작가가 그것을 공들여 만들었음’ 즉 시간이 많이 들었음을 의미하거나,아니면 ‘어마어마한 재능 혹은 직관으로 만들었음’ 즉 크기가 매우 큼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독자도 시간을 오래 들이거나 가치 또는 중요도를 무겁게 두고 작품을 감상해야 합니다. 정중한 독자라면, 작품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적절했는지를 감상 과정에서 끊임없이 되묻습니다.
중요한 점은, ‘작품’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타난 모든 것들이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시덥잖은 작품, 그러니까 대충 퇴고도 없이 휘갈긴 글이나 어떤 재능도 탁월함도 발견되지 않는 작품을 대할 때에도 독자는 ‘어쨌든 작품이니까’ 정중하게 대하려 노력합니다. 결국 독자가 작가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반달돌칼의 과도한 발표는 ‘취미 철학 독서모임’이라는 공동체에서 그러한 독자의 윤리를 문란케 하고 있습니다. 어떤 작품을 시간을 들여 감상하고자 하는 정중한 독자의 윤리에서, 시간도 재능도 없이 작품을 발표하는 반달돌칼의 행위는 악이라고밖에 해석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악은 도덕적인 악이 아니니, 마치 하나님이 악마들을 무찌르듯이 축출되어야 한다거나 그런 극악한 무엇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나쁘다(bad)고 평가할 수 있는 무엇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윤리적으로 나쁜 것은 얼마든지 좋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니까요.
비평가라면, 단지 작품에 대해서만 감상을 남기는 것을 넘어 작가의 윤리적 의미에 대해서도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섬세한 분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4. ‘작품’을 참칭한 활자의 덩어리
제가 작품을 분석하기에 앞서 작가에 대해 좀 더 주목한 이유는, 작품 자체에서 사실 분석할 만한 것을 그다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 「Time machine」
좀 더 최근의 작품인 「Time machine」을 먼저 보겠습니다. 화자는 더운 여름 버스를 타고 도로를 지나 익숙한 집 앞에 돌아옵니다. 반달돌칼은 누구나 살면서 경험하는, 아주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사건을 그렸습니다.
버스에 쏟아지는
열기의 정체는 태양의 광선(狂sun)
광속(光速)으로 치닫는
무쇠는 버터처럼 녹아내리고,
고철덩어리를 응원하는
앰뷸런스의 함성소리
시간을 거슬러 버렸다
돌아온 곳은 익숙한 그 집 앞
반달돌칼, Time Machine
2024. 2. 17. 씀.
2024. 12. 16. 발표.
그런데 이 시를 다른 글과 구분되게 하는 것은 시간입니다. 시간이라는 의미심장한 시어가 등장함으로 인해, 독자는 다른 일상적인 시어들의 근원적 의미를 해석하지 못하고 넘어간 게 아니냐고 스스로 묻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윤동주의 「새로운 길」을 들 수 있겠습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새로운 길
1938. 5. 10. 씀.
1947. 12. 28. 발표.
1938년의 길 걷기를 요즘으로 상상해보면, ‘횡단보도를 건너 학교로/ 버스를 타고 회사로’ 정도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반달돌칼의 시보다 더욱 담백합니다. “태양의 광선(狂sun)”이니, “광속(光速)으로 치닫는”이라느니 의미심장한 듯 하나 결국은 아무 의미도 길어낼 수 없는, 그런 공허한 시어가 윤동주의 시에는 없습니다. 단지,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이 “새로운 길”이라는 점에서, 매번 반복되면서도 어떻게 새로울 수 있는지 독자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합니다. 왜지? 왤까? 민들레와 까치와 아가씨와 바람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지루한 반복에도 새로움을 잃지 않으려는 화자의 겸손한 태도 덕분에 민들레와 까치와 아가씨와 바람을 보게 된 것일까? 무한한 상상이 독자를 즐겁게 합니다.
다시 반달돌칼의 시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무쇠를 녹일 듯이 뜨거운 태양이 시간을 되돌린 것일까요? 앰뷸런스는 뜬금없습니다. 차라리 버스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서 화자가 구급차에 호송되었다고, 실려간 병원에서 예전에 다쳤던 기억을 되새기게 됐다고 해석해야 할까요? 이 해석은 억지스럽습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버리면, 앰뷸런스의 응원이라든지, 그 집 앞이라든지 하는 표현들이 무의미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 말고는 달리 읽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 시는 독자에게 억지해석을 강요합니다. 그 이유는 이 시가 억지스럽게 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에 주목해 반달돌칼이 2022년 2월 24일에 쓴 「미래는 이미 존재한다」라는 글을 단서로 삼아볼 수 있겠습니다. 「Time machine」의 제목인 “타임머신”을 소재로 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다면 과거의 나는 그 순간을 현재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로 온다면 그것은 미래의 나에게 과거가 될 것이므로 미래는 이미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시간여행자 주위세계의 시간은 타임머신에 종속되지만 시간여행자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은”이라는 대명사가 너무나 모호하게 쓰여 ‘철학’적 논증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는 하찮은 글이라는 점은 잠시 접어두겠습니다. 철학적 논증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언어를 가장 명료하고 정교하게 써야만 겨우 첫 문턱을 넘는 고도의 지적 작업입니다. 그 외의 것이 ‘철학’이라는 이름을 참칭한다면, 그것은 하찮다고밖에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주장을 이해하는 게 「Time machine」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적어도 저는 실패했습니다. 그건 제가 아직 지적 수준이 한참 모자라거나, 반달돌칼의 작품세계가 아직 구성되지도 못한 조야한 수준이거나, 이 둘 중에 하나는 분명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반달돌칼은 「미래는 이미 존재한다」 이후 2년이 지나 「Time machine」을 썼고, 10개월 뒤에는 2024년 12월 9일에 ‘오늘의 사유’라며 「대과거, 대미래」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대과거란 표현이 존재한다.
한마디로 과거의 과거다.
예문: 나는 어제 후회했다. 그제 과식을 한 것을…
하지만 대미래 즉, 미래의 미래 문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왤까?
예문: 나는 내일 걱정할 것이다. 모레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물론 「대과거, 대미래」가 주목하는 지점은 철학적으로 흥미롭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 텍스트를 비교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3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사유의 수준이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달돌칼은 자연의 흐름인 단선적 시간에서 3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과거, 대미래」를 읽고, 반달돌칼이 언급한 ‘대미래’라는 개념이 하이데거의 ‘시간성’ 개념으로 제시되었다고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의 함의는 결국, 대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단지 문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존재론적으로는 이미 하이데거가 깊이 연구한 바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를 제대로 읽어 보시라, 만일 하이데거를 읽었다면 엉터리로 읽은 것이 아니냐는, 권고이자 비판이었습니다. 반달돌칼은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변호하면서, 앎과 상상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앎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는 이 대화도 결국 한갓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자기 사유의 기반조차 구성하지 못한 상대와는 논의가 진행되지 않을 것 같아서 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Time machine」에서 시간이라는 의미심장한 시어가 등장함에도 그저 그런 시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반달돌칼은 일상적 시간을 초월한 시간성을 모릅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시에 썼을 리는 만무합니다. 「Time machine」의 화자는 앎도 상상도 아닌 무엇을 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화자가 언급한 “시간”이라는 것도 결국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상적인 것에서 어떤 근원적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는 언어는 결코 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반달돌칼의 「Time machine」은 ‘시’라는 이름은 달고 있으나 좋게 해석해 봐야 ‘실패한 시’, 제대로 말하면 ‘시’의 이름을 참칭한 글입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시 짓기"이며, "시 짓기의 본질은 진리의 수립(Stiftung)"이다. … 시 짓기로서의 "모든 예술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진리의 도래가 일어나게 함(Geschehen lassen der Ankunft der Wahrheit)"이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로고스(λόγος)는 진리의 시원적인 ‘자리’(Ort)라고 지칭되어서는 안 된다. […] ‘참’이란 그리스적 의미로, 게다가 언급된 로고스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로, 아이스테시스(αἴσθησις), 즉 그 무엇을 순연히(schlicht) 감각적으로 받아들임(Vernehmen)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로고스는 일종의 보게 함(Sehenlassen)이기 때문에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그렇다면 로고스가 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탈은폐된 것(Unverborgenes)로서의 존재자이다. 즉, 로고스는 근원적으로 "발견함"이며, 그 무엇을 존재자의 드러남으로서 보게 함이다.
한상연, 「시, 예술, 그리고 죽음: 죽음의 선구성과 일상성의 존재론적 관계에 대한 성찰」, 『현대유럽철학연구』 제53집, 271-300쪽.
마지막으로,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광선(狂sun)”입니다. 이 표현이 없더라도 이 글을 과연 시로 읽어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고민해야 할 지경인데, 자격 미달의 언어유희를 사용함으로써 이 글은 시라기보다는 차라리 역겨움을 일으키는 활자의 뭉치가 되어버렸습니다. 언어유희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 첫 문단처럼 말입니다.
상훈이가 오늘 또 좀 아니꼽게 굴었다. 찌개 냄비를 열자 두부 점 위에 하필 커다란 멸치란 놈이 올라와 있었고, 그걸 본 상훈이는 허연 멸치 눈깔 징그럽다고 대가리는 좀 따고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점잖게 눈살까지 찌푸리며 그런 소리를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여봐란듯이 대가리를 따서 입속에 넣고 자근자근 씹으며 대가리에 영양분이 더 많은 것도 모르느냐고 대거리를 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박완서를 알았다면 아마도 반드시 인용했을 첫문단입니다. 눈깔-눈살과 대가리-대거리를 통한 언어유희가 나와 상훈의 아비투스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리고 유달리 쌍자음 초성을 많이 사용하는 기교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좀[쫌], 아니꼽게, 찌개, 눈깔, 따고, 눈살[눈쌀], 찌푸리며, 따서, 씹으며. 이것도 이른바 ‘상[쌍]스러운’ 나의 아비투스를 넌지시 드러내려는 작가의 장치가 아니었을까요?) 아울러,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정체성으로 포섭하는 나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상훈은 멸치 대가리를 혐오스럽게 볼 뿐이고, 나는 멸치 대가리를 입속에 넣습니다. 언어유희는 이렇게 써야 합니다. 이런 치밀한 설계가 없다면 모든 언어유희는 역겨워집니다. 문학에서 역겨움이란 마치 삼킬 수 없는 음식처럼, ‘도저히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입니다.
2) 「시냇물」
이제 「시냇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그나마 「Time machine」보다는 읽기에 좋습니다.
시냇물에 내 모습을 비추어본다
여울져 흐르는 탓에
내 모습이 조각조각 부서진다
그 모습 참 예쁘다
난 아름다운 사람이 아닌데…
시냇물이 내 모습을 멋지게 만든다
흐르는 물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 사람에 나를 비추어
조각난 내 모습을 만나보고 싶다
그 사람은 나를 다채롭게 만든다
그 사람은 시냇물처럼 발랄한 사람이다
반달돌칼, 시냇물
2021. 2. 19. 씀.
2024. 12. 12. 발표.
이 작품에서 화자는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여기며 시냇물처럼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어줄 이상적인 사람을 그립니다. 표면과 이면, 나와 너의 관계에 주목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Time machine」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의미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길어낼 수 없는 작품입니다.
「시냇물」을 완성한지 나흘 뒤인 2021년 2월 23일 반달돌칼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융통성있는 도덕」을 발표합니다. 이 글에서 반달돌칼은 도덕의 의미를 탐구합니다. 명령의 적용이 아니라 명령을 타인에게 곧이곧대로 적용하기를 주저하는 마음이 도덕의 본래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를 쳐 죽이려한다.
예수가 말한다.
"죄 없는 자, 이 여자를 치라."
내가 생각하는 도덕: 간음한 여자를 쳐 죽이는 것이 도덕이 아니다. 죄 없는 자여 이 여자를 치라 하는 예수의 말, 나는 그것이야말로 도덕이라 생각한다.
융통성있는 도덕.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매우 동의합니다. 신약성경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점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텍스트가 이상한 점은 「시냇물」에 나타난 의미와 전혀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냇물」에서 화자는 아름답지 못한 자기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시냇물에 비친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시냇물에 비친 모습은 조각난 모습이지만, 시냇물을 바라보는 화자의 모습은 통합된 모습이라는 점에서 독자는 역설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우 친절하게 해석해본다면, 자기 자신을 반성하지 못한 채 모순이 없다고 여기는 태도보다 반성을 통해 자신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발견하는 태도가 더욱 아름다운 것이라는 주장을 도출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곧바로 불가능해집니다. 자기반성은 내가 나를 마주해야 하는 일이므로 능동적인 일이어야 할 텐데, 화자는 “흐르는 물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조각난 자기 모습을 아름답게 여기게 된 계기도 “발랄한” 시냇물을 우연히 만났기 때문이지, 자신이 적극적으로 시냇물을 찾아갔거나 쳐다봤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화자는 수동적 자기반성이라는 어불성설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고, 그 결과로 나타난 다채로움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융통성있는 도덕」에서도 이러한 모순이 발견됩니다. 반달돌칼은 타인에게 규칙을 적용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는 태도를 ‘융통성 있는 도덕’이라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예외 없이 명령을 적용하는 태도를 ‘융통성 없는 도덕’이라고 규정한 셈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자기반성 없이 타인에게 엄격한 명령을 들이대는 태도는 다시 말해 자신에게만 무한한 예외를 두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융통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반달돌칼이 ‘융통성없는 도덕’이라 일컬은 태도가 거의 무한한 수준으로 달성한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예외로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달돌칼이 ‘융통성있는 도덕’은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예외 없는 도덕이 됩니다. 텍스트 자체가 모순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시냇물」과 「융통성있는 도덕」을 비교해보겠습니다. 「시냇물」의 화자가 기다리는 “흐르는 물 같은 사람”은 「융동성있는 도덕」에서 예수가 보호하려 했던 “간음한 여자”에 대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흐르는 물 같은 사람”은 자기반성의 계기가 되면서도 바라보는 사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런 존재, 그래서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존재가 아니던가요? 하지만 “간음한 여자”처럼 실수하고 죄 짓는 사람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예수가 말한 “간음한 여자”와 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니 자기반성은 “간음한 여자”를 수동적으로 마주쳐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를 만나든지 능동적으로 시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반성이란 결코 타인에 의존할 수 없는, 수동적일 수 없는, 무한한 능동성을 가진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반달돌칼이 「시냇물」과 「융통성있는 도덕」을 연관지으려 시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독자는 작가가 발표한 작품들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추측하게 됩니다. (그게 싫다면 작가는 침묵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달돌칼은 세심하게 작품을 해석하고 작가를 존중하려는 태도를 지닌 독자에게 어떤 작품세계도 설득하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그건 작품을 만드는 기본적인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반달돌칼의 또 다른 텍스트를 보겠습니다. 거의 4년이 지나 2024년 12월 10일에는 「한 밤의 사유」라는 이름으로 이런 글을 발표합니다.
우리는 혼잣말을 할 때에, 자기자신을 '나'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너'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기존의 다른 텍스트에서 괄목할 만한 사유를 발견했다면, 아마 이 짧은 아포리즘에서도 의미를 길어내고자 시도했을 것입니다. 니체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반달돌칼의 텍스트는 아무리 깊게 읽어 봐야 개념을 다루는 미숙함과 텍스트 분석에 대한 불성실함, 자신의 배움을 막는 오만함만 길어낼 수 있는 마른 우물일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가 계속해서 발표하는 이른바 ‘시’, ‘철학’, ‘사유’, ‘그림’이라 이름 붙인 것들은 한 마디로, ‘소음’입니다. 소음은 무의미한 것, 해석하는 인간의 시간을 빼앗는 것, 그래서 인간의 존재를 쪼그라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작가-독자의 공동체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소음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작품을 발표하더라도 독자에게 무시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난스레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다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에게 무시당한 양치기 소년처럼 말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작가가 소음을 피해야 한다는 윤리는, 작가-독자의 공동체에서뿐만 아니라 작가-작품 관계에서도 더없이 중요합니다. 양치기 소년이 결국 늑대에게 모든 양들을 잃고 말았듯이, 소음을 내는 작가는 모든 작품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취미 철학 독서모임’의 말로
좋지 않은 글에도 “좋다”라고 평가하는 모임은 좋은 모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텍스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러면서 아주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공표하는 사람에게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답변하는 모임은 좋은 독서모임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외재적 선만 인정하는 사회에서는 경쟁심이 지배할 것이며, 심지어 그 외의 것들을 배제할 것이다.
MacIntyre, After Virtue, p. 196.
매킨타이어는 내재적 선이 결여된 공동체가 어떻게 윤리적으로 무너지는지 경고합니다. 껍데기만 남은 칭찬들이 난무하면, 말 그대로 원숭이들의 털고르기에 지나지 않는 스킨쉽으로서의 언어만 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임에서도 이런 텅 빈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겠지만,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반달돌칼입니다. 텅 빈 작품을 난사하기 때문에 반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오직 텅 빈 언어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지난 12월 11일 반달돌칼이 발표한 아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몬드리안의 아류”라거나 “부동산 정보” 같다는 평가를 했습니다. 반달돌칼이 헤겔의 절대정신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그림에는 “심형래 영화”, 들뢰즈 『천 개의 고원』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그림에는 “후지산” 같다는 평가가 주어졌습니다. 모두 그림이 올라오자마자 반작용처럼 곧바로 올라온 ‘반응들’이었습니다. 반달돌칼이 올린 그림들은 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제가 보기에도 조악합니다. 발표된 그림을 보고, 작성하는 텍스트만큼이나 그림에도 퇴고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난삽한 색상의 배치와 서로 다른 여백의 두께들이 어떤 의미를 담았다기보다 그냥 컴퓨터 그림판에서 손 가는 대로 그렸다고밖에 해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상자의 윤리를 되새기면서, 이 작품에 대해 뭐라 평가해야 하나, 평가를 하지 않고 넘기면 무례한 일이 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장난스럽게, 누군가는 비꼬는 마음을 담아, 무책임하게 작품을 난사하는 작가에게 무책임하게 반응을 난사했습니다. 이에 대해 반달돌칼은 이렇게 다시금 반응했습니다.
그간 철학적인 글들만 올린 터라 시 한 편 올려 봅니다. 돌 던지지 마세요.
작품은 독자가 평가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말없이 만들 뿐이고, 독자는 자유롭게 말하지만 작품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작가가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독자의 평가마저 빼앗아버리면 독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반응뿐입니다. 그런 반응은 아무리 정중해 봐야 조롱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글이 철학적인지 아닌지는 독자가 결정할 일입니다. 작가가 철학적이라는 평가를 바라고 썼음에도 독자가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면 작가는 실패한 것입니다. 반달돌칼이 스스로 독자들에게서 “돌을 맞고 있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작품이 별로인데, 독자가 해야 할 판단까지 빼앗아버렸습니다. 작가의 태도가 돌을 맞아도 쌉니다.
작품이 별로인데 “좋다”는 평가만 이어진다면 우리 모임은 망가질 것입니다. 이건 매달 2회, 저와 함께 책을 읽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취미라도 철학책을 읽는 모임에서 철학책을 엉터리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철학을 취미로 즐기는 사람입니다. 제가 글을 잘못 읽는다면 여러분은 아주 강력하게(그러면서도 애정을 담아) 저를 질책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취미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제보다 좀 더 발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전거 타기나 등산, 바둑처럼 조금씩 연습이 쌓여 다음번에는 더욱 멋지게 실천해낼 수 있는 것들을 취미라 부르지, 배설이나 수면, 흡연처럼 그냥 해소해버리고 마는 제자리걸음들을 취미라고 부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임은 내재적 선을 추구해야 할 윤리적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결함은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개선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 공동체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참 사랑입니다.
그런 내재적 선이 사라진 공동체의 대표적인 모습을 2019년 10월 22일 청와대 앞 집회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전광훈 목사는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앞으로 10년동안의 대한민국은 전광훈 내가 무슨 정치를 하고 그런 건 안 해요, 저도. 안 해도, 대한민국은 전광훈 목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다니까? 왜 그런지 알아요? 나에게 기름 부음이 임했기 때문에! (아멘!)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보좌를 딱 잡고 살기 때문에! 난 하나님의 보좌를 딱 잡고 살아요, 딱 잡고! 하나님, 꼼짝 마~! 하나님~!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내가 이렇게 하나님하고 친하단 말이예요, 친해. 나는 하나님의 보좌를 딱 잡고 산단 말이여! 여러분도 하나님 보좌 한번 잡아보실래요? (아멘!) 진짜로요? (아멘!) 그러려면 여러분들 기름 부음을 세게 받아야 돼요. 세게. 그럼 여기까지 정돈이 됐으면 기름 부음을 받아야 돼, 안 받아야 돼? (아멘!) 욕심나요? (아멘!) 확실해요? (아멘!) 오늘 내일 모레 10월 25일까지 세계적 기름 부음이 임할 지어다!
이 발언은, 종교인이라면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내재적 선을 철저히 망가뜨린 발언입니다. 전광훈은 이 발언에서 교묘하게 자신을 신보다 높입니다. ‘기름 부음(χρίεσθαι, ungi)’이란 인간을 지켜주는 신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전광훈은 처음에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마지막에서는 교활하게도 사람들이 자신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어디 그따위 말을 하나님 앞에 올리냐며 ‘전광훈 까불면 죽어’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광화문에서 거리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일장기를 들고 하나님을 부르짖는 종교인들을 보고 좋은 평가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내재적 선을 상실한 공동체에 몸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별로인 작품에 별로라는 평가가 자유롭지 않은 공동체의 말로는 전광훈과 그 추종자의 추한 모습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광훈의 ‘기름 부음’에 ‘철학’을 대입해 볼까요? 인간은 신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작가는 독자로부터 작품에 대한 평가를 받습니다. 인간이 신에게 기름 부음을 줄 수 없듯이, 작가는 독자에게 작품에 대한 평가를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독자더러 자신의 작품이 ‘철학적’이라고 먼저 평가를 선점해버리면 전광훈이 한 짓과 구조적으로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전광훈이 기름 부음을 오용한 것처럼, 우리는 ‘철학적’이라는 평가나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우리의 언어에서 영영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글을 굳이 공개적으로 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모임에서 제가 하는 텍스트 해석에 모자란 점이 있다면 반드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이라는 판단이 가능한 어떤 것을 발표할 때에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원숙한 독자로부터 이렇게 혹독한 평가가 내려질 수도 있다는 인정, 그리고 그 판단에 겸허히 따르겠다는 인정(만약 판단이 틀렸다면 또 붙어 봐야 할 문제겠지만, 그리고 아무리 혹독한 비판이라도 그 판단에 대한 또 다른 혹독한 평가가 기다릴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이런 인정이 전제된 상태에서만 온전한 작품 발표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반달돌칼에게만 쓰는 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특히 제 자신에게 쓰는 글이기도 합니다.
6. 나가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해보겠습니다. 반달돌칼은, 너무나 빈번하게 작품을 발표한 나머지 작가를 존중하는 성실한 독자의 윤리를 위기에 처하게 만든, 윤리적 악인입니다. 만일 작품의 수준이 월등하나 독자가 이를 따라가지 못해 오해한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작품 하나하나를 분석한 결과 비평하기가 민망한 수준이라는 점이 드러났습니다. 반달돌칼은 작품 발표에 앞서 연습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렇게 수준 미달의 작품에 대해 ‘그건 별로인데요’라고 말하지 못한 우리 모두는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반달돌칼이 수준 이하의 작품을 소음처럼 발표해 공허한 반응을 유도했다는 책임을 은폐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임 자체가 망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품도 작가도 그렇게 별로라면 무시하면 되지, 왜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논하느냐고요? 왜 이렇게 공격적이냐고요? 좋은 질문입니다. 이 글은 함께 철학을 취미로 하는 친구에 대한 극렬한 공격이기도 하면서, 가장 친근한 우정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반달돌칼이라는 필명 뒤의 여진석이라는 인물을 좋아하고 아끼기 때문입니다. 아끼는 사람의 그릇된 행위를 비판하는 것, 어떠한 허위도덕으로도 포장하지 않는 것, 이것이 비평가가 작가에게 건네는 유일한 우정의 악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때에야 우리의 우정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정의 가장 철학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진석 님에게 “비평을 원하느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만약 원치 않는다고 하셨다면, 저는 사무적이면서도 친절하게 “좋은 작품이지만 너무 과도하게는 발표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을 것입니다. 진석 님이 “비평을 원한다”고 말했을 때, 이미 진석 님은 저를 철학적 친구로 받아들이신 것이고, 이와 동시에 진석 님 자신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되기에 한참 모자란 사람이 되었습니다.
철학이라는 이름이 탐난다면 반드시 발전해야 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일은 어제의 나보다 한층 지혜로워져야 한다는 명령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고 언제나 지혜로운 타인을 흠모해야 합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배움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이걸 겸손이라 부릅니다. 니체의 초인이 주장하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니체는 타인에 대한 겸손으로는 더는 배울 게 없는 인간, 모든 인간을 뛰어넘은 인간, 그래서 결국 자기 자신밖에는 겸손을 취할 대상을 찾지 못한 인간인 초인이라는 이상적 모델을 제시한 것입니다.
위대한 인간─자연이 구성하고 장엄한 양식으로 발명한 한 사람─그는 누구인가?
… 셋째: 그는 어떤 동정적인 마음도 원치 않는 대신, 하인과 도구를 원한다. 사람들과 하는 교류에서 그는 언제나 그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는 그가 소통불가능함을 안다. 그는 친근(familiar)해지는 데 관심이 없고, 그가 친근하다고 누군가 생각할 때에도, 그는 좀처럼 친근하지 않다. 그가 그 자신에게 말하지 않을 때, 그는 가면을 쓴다. 그는 진리를 말하기보다 거짓말을 한다. 이건 더 큰 영혼과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 안에는 고독이, 칭찬도 비난도 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항소할 수 없는 심급(정의)로서의 고독이 있다.
Fridrich Nietzsche, Will to Power, Book 4. Discipline and Breeding, Ⅰ. Order of Rank, 5. The Great Human Being, 961(1885).
물론 초인은 오만불손합니다. 저는 반달돌칼이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성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처럼 계속해서 그저 그런 수준의 글만 난사하는 이유를 바로 반달돌칼이 품고 있는 니체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에서 찾습니다. 이러한 애정은 겸손하지 못한 태도로 변질되었습니다. 겸손하지 못함, 이것은 니체를 절반만 읽은 겉멋 든 치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우스운 태도입니다. 니체는 텍스트 해석을 매우 성실하게 했던 고전학자였습니다. 니체의 오만이 아직까지 유효한 이유는, 단지 겉으로만 오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겸손하게 앞선 텍스트를 읽고 사유를 끝까지 전개한 결과로 오만이라는 결론을 도출했고 그러한 오만에 인생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오만하다는 겉모습을 단지 모방하기만 해서는 니체의 발끝도 우리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내 작품을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읽어주는 경험은, 작가로서는 매우 황홀한 경험입니다. 이와 동시에 독자에게 무한한 부채의식을 느껴야 하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내 글이 이렇게까지 분석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느냐, 타인이 내 작품을 해석하는 데 들인 시간(이것은 곧 타인의 생명입니다)이 아까운 그런 졸작을 발표하지는 않았느냐, 만약 내 작품이 종이로 인쇄됐다면 나무에게까지 미안함을 느껴야 하지 않느냐(그래서 어떤 출판사의 이름은 ‘도서출판 나무야미안해’이지요) 하는 질문을, 작가는 작품을 발표하기 전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작가의 윤리이며, 한 마디로 하자면 겸손입니다. 앞서 언급한 시 「새로운 길」을 습작노트에 고이 품고, 윤동주가 왜 10년이나 발표를 미루었는지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마저도 윤동주는 죽은 뒤에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작가의 부끄러움과 책임의식과 겸손, 작가의 윤리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지금까지 작품에 대해 했던 모든 공격은 결코 진석 님에 대한 공격이 아닙니다. 진석 님의 철학 여행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 위한 우정의 초월적 표시입니다. 다만, 진석 님은 앞으로 글이든 그림이든 무엇이든 발표하는 일을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독자를 상상하면서, 그가 나의 작품을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좋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 때에만 작품을 발표하세요. 한 마디로, 부끄러움을 느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이 전제된 상태에서, 우리 모임 구성원 모두가 자유로이 작품을 발표하시고 모임을 빛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