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 또는 정부를 의미하는 ‘가번먼트(government)’와 가상을 의미하는 ‘사이버-(cyber-)’는 사실 같은 어원에서 났다. 바로, 항해에서 키를 잡는다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 ‘퀴베르난(κυβερνᾶν)’이다.
키잡이에서 통치로 의미가 분화된 건 쉽게 납득된다. 수십-수백 명의 선원들은 자기 목숨을 조타수의 손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통치자의 손에 함께 죽거나 살아가는 모습과 들어맞는다.
문제는 가상이다. 인터넷은 무수한 정보가 범람하는 공간이어서 바다로 비유된다. 그 바다는 줄곧 탐색(explore)의 대상이었고, 사람들은 그 표면을 즐기며 유영(surf)한다. 검색을 위한 관문(portal)은 마치 항구와 같아서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항해자(Naver)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아마 인터넷에서 ‘사이버-’라는 말을 최초로 떠올린 사람은 바다와 유사한 이미지에 착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사이버-‘는 바다 같은 ‘충만함’뿐만 아니라 ‘내실없음’까지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공허한 소통의 장이다. 인터넷에 범람하는 정보는 마치 바닷물 같아서 그대로 마실 수는 없다. 때문에,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를 줄줄 외워도 사람들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유튜버들이 한 말을 아무리 주워섬긴들 내가 생각해 판단하지 않으면 나는 인정받을 수 없다. 내실이란 사이버의 바깥, 오직 ‘내 안’에서만 자라나는 것이다. 내실은 사이버를 수단으로 삼을 수는 있어도, 사이버에 의존한다면 결코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사이버 그 자체는 나의 반성이라는 별도의 정제 활동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결코 마실 수 없는 바다와 같다.
비단 인터넷뿐일까? 모든 통치자는 어떤 의미에서 언제나 가상현실에 산다. 무수한 정보가 통치자에게 범람하기 때문이다. 궁금한 건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다. 과거의 군주들은 이미 (다소 느리긴 했겠지만) 인터넷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대단한 이유는 모든 사람을 그런 지위로 올렸다는 데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통치자는 가상에 빠지기 쉬웠다. 오늘날 우리가 가짜뉴스에 신음하듯이 역사적으로 통치자는 아첨꾼에 시달려 왔다. 아첨꾼에 둘러싸인 통치자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통치와 가상이 같은 말에서 비롯된 데는 이런 의미가 숨어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24년 12월 3일, 45년만에 대한민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오늘 아침에는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의 뜻에 따라 부정선거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선거관리위원회에 계엄군을 투입했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읽었다. 아무리 큰 난리가 나도, 그 원인이 하찮아 허탈한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는 바닷물을 들이킨 것일까? 통치자는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적절히 의심하고 추려냄으로써 가치 없는 것들을 무시해야 한다. 인터넷 시대에 이 능력은 모든 시민에게 요구된다. 어떤 조타수가 적임자인지 잘 가려냈어야 한다. 결국 내실 다지기란 바닷물을 정제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오늘의 난리는 우리의 능력부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희망은 현실을 마주하고 내실을 다지는 것이다. 가상은 현실을 이길 수 없다. 계엄군의 증언으로는, 북한으로 가는 줄 알고 헬기를 탔는데 내려보니 국회였다고 한다. 완전무장한 계엄군은 비무장한 시민을 진압할 수 없었다. 사이버 가번먼트는 결국 무력하기 때문이다.
주. 이 글은 민들레 뉴스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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