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수 없는 우정이란 것도 있었다.

나는 절교를 즐기는 사람이다. 우정은 잘못으로 깨진다. 친구가 잘못을 저지르면 나는 그가 잘못을 깨닫도록 돕는다. 깨달으면 용서하고 깨닫지 못하면 떠난다. 그래서 내게는 용서와 절교 모두 즐거운 일이다.

용서와 절교 모두 자유롭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내가 따르고자 하는 것에는 반드시 복종한다. 가족이라든지 공부라든지 그런 것들 말이다. 얽매임은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것이니까. 나는 해야 하는 것들을 하기 싫다 여기지 않으니까. 용서와 절교 모두 해야 한다면 나는 기껍게 한다. 그래서 아래 공유한 글을 썼다.

근래에 나의 이런 태도에 균열이 발생했다. 매우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떠날 수 없는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매주 토요일 오전 사람들과 철학책 독서모임을 한다. 벌써 3년이 됐다. 선생님 한 분이 이끄시는데, 학문적으로나 인품으로나 출중한 분이다. 그래서 추종자가 몇 있는데, 그 친구도 그중 하나다.

모임에서 선생님의 뜻은 일관된다.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되 학문적 책임은 성실히 다하라.’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존중하며 순종한다. 선생님이 한 말씀이기 때문이 아니라 학자라면 누구라도 지켜야 할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과 텍스트 해석을 두고 싸우기도 한다. 선생님은 기꺼이 합을 맞춰주신다. 언성이 높아지지만 지적 즐거움이 충만하다.

그러나 선생님을 추종하는 그 친구는 이 말씀을 절반만 듣는다. 모임에서는 별 말을 하지 않고 선생님 말씀을 받아적기만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본인을 예술가로 지칭하며 엉터리 글을 난사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글을 쓰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나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며 비판을 차단한다. 그때마다 드는 근거가 바로 선생님의 저 말씀이다. ‘모임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나의 자유로운 표현을 옥죄지 말라!‘

나는 그에게 몇 마디 했다. 나도 한참 배우는 입장이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무언가를 표현하면서도 그에 대한 비판에 성실히 응하지 않는 건 무책임하다고.

원래 같았으면 나는, 말을 하다가 가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를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떠날 수 없다. 그는 독서모임에서 가장 성실히 출석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일 멀리 살면서도 언제나 모임에 첫 번째로 온다. 그는 결석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는 그렇게 살 것이다. 그를 떠나려면 나는 모임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나 역시도 모임을 떠날 생각이 없다.

나는 용서와 절교 사이에서 새로운 선택지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의 근면한 비판자가 되기로 했다. 그가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이런 방식의 우정도 있겠구나, 나는 아직 한참 더 배워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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