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사람은 타인의 오만을 지적해서는 안 되는가?

겸손은 오해되고 있다. 예의바른 표현이나 몸짓만 하면 겸손인 줄 안다. 그건 겸손이 아니다. 단지 겸손한 듯이 보이려는 것이다. 진짜 겸손은 그런 겉모습이 불필요하다.

겸손하다는 것은 스스로를 낮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겸손(謙巽)이란 주역에서 온 말이다. 겸(謙)괘는 땅 아래 산이 있는 모양이다. 겸손이 낮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외국어에서도 다르지 않다. 겸손을 의미하는 영어 humility는 라틴어 humilitas에서 왔는데, 이건 흙을 의미하는 humus에서 온 말이다. 신이었던 인간 예수는 다음날 자신을 팔아먹을 유다의 발을 씻겼다. 이것이 겸손이다.

다시 주역의 겸괘로 돌아가자. 높은 산이 땅 아래 묻혀 있으니 높아 봐야 삼척인 인간보다도 낮게 된다. 가장 높은 것이 가장 낮은 것보다 낮다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공교롭게도 고대 그리스어에서 겸손은 역설을 의미하는 영어 irony의 어원인 εἰρωνεία였다. 가장 지혜로운 자였던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했던 말은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이것이 겸손이다.

겸손은 높은 자가 스스로를 낮추는, 그래서 더욱 높아지는 역설적인 현상이다. 겸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겸손이다. 그는 타인을 가르치려 들지 않고 끝없이 물었다. 상대방이 준비만 됐다면, 질문은 가르침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겸손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그가 가르친 것은 ‘당신이 겸손하지 않다’는 사실뿐이었다. 예수는 오만을 꾸짖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겸손은 단지 낮아 보이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겸손의 다른 한 짝인 손(巽)은 점친다는 말이다. 점이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일을 알고자 애쓰는 시도이다. 그러면서도 완벽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지혜를 추구하면서도 스스로 결코 지혜롭지 않다고 여기는 것, 다름아닌 지혜에 대한 사랑(φιλοσοφία)다.

아울러, 손괘는 바람이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進退)이자 들어오는 것(入)이다. 계사전에는 손괘를 두고 “칭이은(稱而隱)”, 즉 판단하면서도 숨는 것이라 했다. 물러나고 들어오고 숨기 위해서는, 나아가고 나가고 판단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낮춘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드러내기를 멈추는 것, 타인에 대한 판단 자체를 멈추는 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다.

타인의 오만을 지적하면서도 오만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이 겸손이다. 그럴 때에만 인간에게 타인이란 존재가 가능하다. 겸(謙)이란 아우르는(兼) 말(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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