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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6권 독서노트” 글에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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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5-6권에 대한 잡생각, 한영현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만나기 전 마니교에 빠진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섭리란 인간의 시간 안에서 적용되는 것일까? 만약 섭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있어 부질없다는 수동적 허무주의적인 생각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모든 판단과 행동을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섭리는 인간의 시간 안에서 적용되지 않고 시간 밖에서 적용된다고 했다. 즉 죽음 이후에 비로소 신의 섭리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대로 신의 섭리의 적용 다시 말해서 신의 심판이 아예 시간 밖에 있다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왕으로 군림할 것이다. 양심과 책임이라는 충실한 신하들이 있지만 이미 왕이 된 자유의지는 그것들에 과연 귀를 기울일까? 결국 키르케고르는 신을 기만하는 것이 어린아이를 기만하는 것보다 더 쉽다고 인정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하지만 인간은 결국 보이는 것만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영원함’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임으로써 믿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 불로불사의 존재를 말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의심하고 불신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거짓 혹은 표상과 상상이라”
인간의 관점에서 이 말씀은 이렇게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고로 우리는 모두 보이는 존재이다. 다만 우린 언어를 통해 생각을 할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다. 생각과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생각과 말이 영원한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생각과 말은 글이나 그림이라는 보이는 것을 통해서 영원함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글과 그림, 즉 ‘기록’이 없다면 영원함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이 ‘영원함’은 진정한 영원함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보이는 존재인 인간이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인간은 보이는 것만 믿는 존재인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보이지 않기에 상상 속에서 볼 수밖에 없다. 상상 속에 있는 존재는 현실감이 없다. 현실감이 없으므로 쉽게 잊히고 버려지거나 혹은 상상에 빠져 허우적댈 수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표상과 상상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상상 속의 하느님을 자기 안으로 모심과 동시에 자신이 하느님의 안에서 안식을 취하였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일 뿐. 그래서 그는 ‘보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믿어야 이해가 가능하다고 얘기한다.
보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우리는 때때로 그런 존재들과 마주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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