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눈물의 기도는 노래가 아니다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허 연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혹 시간이 맞거든 연차를 내고
시골 성당에 가서 커다란 나무 밑에 앉는 거야. 촛불도 켜고

명란파스타를 먹고 헤어지는 거지. 그날 이후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돌진하는 건 재미없는 게임이야. 잘 생각해. 너는 중독되면 안 돼.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뻔해.
우리보다 융자받은 집이 더 오래 남을 텐데.

가끔 기도는 할게. 그대의 슬픈 내력이 그대의 생을 엄습하지 않기를. 나보다 그대가 덜 불운하기를. 그대 기록 속에 내가 없기를.

그러니까 다시는 가슴 덜컹하지 말기.
이별의 종류는 너무나 많으니까. 또 생길 거니까.

너무 많은 길을 가리키고 서있는 표지판과
너무 많은 방향으로 날아오르는 새들과
너무 많은 바다로 가는 배들과
너무 많은 돌멩이들

사랑해. 그렇지만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리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이 시에서 행갈이는 주저함이다. 시 안에서 ‘나’는 ‘당신’과의 “이별”을 앞두고 있다. 앞두면서 기도에 가깝게 되뇌고 있다.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적당히 빠르게. 그래서 여러 문장을 말해도 숨이 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2연까지 쉼없이 말한다.

9연까지 ‘나’는 총 두 번 주저한다. 3연에서 “연차를 내고” 무엇을 할지 적당히 고민할 때 한 번, 6연에서 “중독되면” 어떤 걱정을 할지 고민할 때 한 번. 3연의 정적은 비교적 가볍다. ‘나’는 가능한 “이별”을 가볍게 여기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쉽고 편하게” “이별”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여긴 “시골 성당”을 그냥 떠올린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 마음이 무겁다. 가볍디가벼운 “명란파스타”를 입에 올리면서도 호흡은 느려진다. “시골 성당”에서 ‘당신’과 나눈 기억이 “촛불”처럼 떠올랐기 때문일까?

6연에 나타나는 정적에는 낮은 흐느낌—울먹임에 더 가까운—이 들린다. 이 울먹임은 이후부터 행을 넘어갈 때마다 계속된다. ‘나’가 울먹이는 이유는 아마도, “이별”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서는 ‘나’가 ‘당신’을 궁금해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미 궁금해 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걸 “중독”이라 말한다. 이미 ‘당신’에게 중독된 ‘나’에게는 ‘당신’과 함께했던 ‘나’의 “슬픈 내력이” ‘나’의 “생을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속에 “달아오르”면서 “불타오르”는, “덜컹하”는 울먹임을 숨기지 못하게 됐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불운”하다 여기는 것이다. ‘당신’과의 “이별”이 “뻔해”라고 단정지으면서도, 어차피 ‘나’는 ‘당신’과 “이별”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죽음으로 돌진하게 되는 자연적인 이별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일상적으로 말하면서도, 속으로 흐느끼는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중독돼서 주저하고 울먹인다. ‘나’는 숨을 크게 쉬면 “가슴 덜컹하”는 울먹임 때문에 노래를 부를 수 없다.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밭은 숨으로, ‘나’는 기도해야만 한다.

‘나’는 그래서 ‘당신’을 위해 기도한다. 울먹임 없이. 이때만큼은 결코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의연하게 ‘당신’을 위해 ‘나’는 기도한다. 사실 ‘나’가 ‘나’ 자신에게 했던 1연부터 7연까지의 기도는, ‘당신’에게 “중독”된 ‘나’ 자신을 은폐하려던 지금까지의 시도는, 이 기도를 의연하게 끝마치려고 한 연습이었던 셈이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나’는 마음껏 흐느낀다. ‘나’와 ‘당신’은 “이별”해야만 할 관계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이 “이별”을 거부하더라도, ‘나’는 언젠가 이별해야 한다. 모든 “길”이 이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별의 종류는 너무나 많으니까.” ‘나’가 ‘당신’을 만나서는 안 될 이유를 열거할 때에는 마치 노래처럼 들린다. 이때의 흐느낌은 리듬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껏 흐느끼며 말한다. “이별의 종류는 너무나 많”다고. 그제서야 ‘나’는 숨이 트였을 것이다. 노래방에서 울면서 노래를 불러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 느낌을 알 것이다.

인간이 맺는 모든 관계는 끝을 맺는다. 관계는 오고감이지만, 관계의 끝은 멈춤이다. 오고감에는 “방향”이랄 것이 없지만, 모든 “방향”은 끝을 전제한다. 그렇기에 “표지판”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모이는 “바다”처럼 관계는 이별이라는 한 방향으로 모인다. 그래서 이별에는 “돌멩이”처럼 방향이 없다.

그런데 “노래”라는 것은, 울면서 부르는 것이다. 끝이 올 줄을 알면서 “불타는 자동차”에 올라탄 듯이, 한번 미쳐보는 것이다. “표지판”과 “방향”을 무시하고 “바다”로 갈 줄 알면서도 “돌진하는” 것이다. 사랑의 재미는 여기에 있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별”하지 말자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을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잉태되었으나 낙태된 이 “사랑”은 울먹임이다. 그러나 ‘나’가 흐느낌을 숨겨서 이 울먹임이다.

여기에서 모든 시간은 뒤틀린다. 어쩌면 ‘나’는 애초에 ‘당신’과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사랑은 ‘당신’에게 전혀 닿지 않은 짝사랑일 수 있다. “그대 기록 속에 내가 없기를” 바라는 ‘나’는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이별을 두고, 감히 사랑을 말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앞서 ‘당신’을 위해 기도하려 떠올렸던 일상적인 기억들은, ‘나’가 ‘당신’과 사랑하게 된다면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를, 그런 기억들이다. 우리말에서도, 외국어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사실을 다루는 가정법은 과거형으로 쓰인다.

‘당신’에게 중독된 ‘나’는 ‘당신’을 흐느낄 수 없다. “노래”할 수 없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나’는 슬픈 “사랑”을 참고, 감추고, 억누른다. 그것이 ‘나’가 ‘당신’이라는 “노래”를 부르기를 열망하면서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이다.


허연의 시는 음침하다. 이런 시가 아름답다고? 우리가 흔히들 ‘소시민’이라 부르는 비겁한 사람들을 허연은 아름답게 분장하고 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마음껏 노래하지 못하는 인간을 연민하는 것이다. 그 이유란 고작 ‘당신을 위해서’이다. 아픔에 맞서지 않는 인간, 회피하는 인간, 그런 모습의 인간을 우리는 인간이라 불러야 할까?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는 일상적인 세계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는 노래가 될 ‘당신’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노래는 우리가 부르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이다.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서 화자는 불운한 처지를 비관하며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철학의 여신은 그따위 노래의(무사) 여신들은 치워버리라며 역정을 낸다. 울먹이는 노래—차라리 기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따위 노래는 우리의 팔다리를 자르고 단지 우리가 처한 세계에서 눈물 젖은 안락함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삶은 고통스럽다. 자궁을 떠난 아기가 첫 숨을 내쉴 때처럼, 우리는 느껴야 한다. 노래를 불러야 한다. 울어야 한다.

‘당신’이 그 울음을 들으면 어떡하냐고?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누구도 다쳐서는 안 된다고? 이런 주장은 채식을 강요하는 광신도들에게서 이미 많이 보았다. 고깃덩어리에 의탁해 사는 우리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니. 인간이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상처를 주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인간은, 이미 자기가 상처주는 존재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인간이 제일 무섭다.

‘당신’이 듣든지 말든지, 나는 운다. 울 수밖에 없다.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울어야 한다. 울면서도 당신에게 미안하다. 그것이 사람 사는 것이다. “불타는 자동차”에서 내리고 싶었으면, 애초에 태어나지를 말았어야지. 우리는 절망에 빠져 있다.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살을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이다. 살기 위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면서도 굳세게 밀고나가는 것, 그래서 상처받은 자를 정확히 내 앞에 모셔두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철학의 여신이 노래의 여신들을 물리친 것은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노래의 여신들이 주는 위안이란 단지 영원히 “노래”를 희구하는 “기도”일 뿐이며, 마약같은 “중독”일 뿐이다. 오히려 철학의 여신이 부르는 노래가 우리를 구원하는 진정한 위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허연은 인간을 마치 신처럼 꾸미고 있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듯이, 어떤 음식도 먹지 않고도,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듯이. 허연의 시는 그래서 자폐적이다. 자폐를 찬미하는 시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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