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0.- 3. 26. 요약생활 189-204

2024. 2. 20. 화. 비.

출근해 일했다. 오후에 휴가를 써 지원과 시간을 보냈다. 오후 반차를 내 지원과 시간을 보냈다.

조카 의준을 생각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형제를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하듯이, 형제의 자녀를 작은아들(아ㅊㆍㄴ아들)이라 불렀다. 그래서일까 우리 누나가 낳았지만 내 아들처럼 예쁘다.
조카는 가족의 아래를 의미하는 族下로 표기되곤 했는데, 우리말이 먼저인지 한자어가 먼저인지 알 수는 없다. 조카를 의미하는 nephew는 라틴어 nepos에서 비롯됐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 νέποδες와 비슷하다. νέποδες는 어원이 불명이지만 어린 발들νέοι πόδες이라는 의미를 연상케 한다. 조카 의준의 발을 보면 이 발로 세상을 어떻게 밟고 서나 걱정될 만큼 여리고 예쁘다. 그래도 의준은 제 발로 설 것이고, 멋진 인간이 될 것이다. 나보다 훨씬 더 멋진.

2024. 2. 21. 수. 비.

출근해 일했다. 저녁에 취미 철학 독서모임을 했다. 플라톤 <국가> 마지막 시간이었다.

2024. 2. 22. 목. 비.

출근해 일했다. 기억나지 않는다.

2024. 2. 23. 금. 비.

오전 반차를 내 하예 님과 만나고, 은행업무를 봤다. 출근해 일했다.

2024. 2. 24. 토. 흐린 뒤 비.

이양수 독서모임에서 칸트 <순수이성비판>을 거의 다 읽었다.

취미 철학 독서모임에서 책거리를 했다.

2024. 2. 25. 일. 비온 뒤 갬.

이런 생각을 했다.

시끄러운 나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을 읽는다.

"지배받지 않고는 잘 지배할 수 없다. ... 좋은 시민은 지배를 받고 지배를 하는 앎과 능력을 가져야만 하며, 또 자유로운 자들의 지배를 양쪽에서 아는 것이 시민의 덕(탁월성)이다." (제3권 1277b13-15)

"최상의 정치체제에서 시민은 덕(탁월성)에 따른 삶을 목표로 해서 지배받고 지배하는 능력을 가진 자이며, 또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자이다." (제3권 1284a1-2)

"모든 앎과 기예에서 그 목적은 어떤 좋음이기 때문에, 최고의 좋음과 최선의 좋음은 모든 것들 중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앎과 기예의 목적이다. 이것이 정치적 능력이다. 그런데 정치적 좋음은 정의이고, 정의는 공동의 이익이다." (제3권 1282b15-18)

"필연적으로 1인 내지 소수 혹은 다수가 최고의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1인 내지 소수 혹은 다수가 공동의 유익함을 위해서 지배할 때 이 정치체제들은 필연적으로 올바를 수밖에 없지만, 반면에 1인 내지 소수 혹은 다중이 개인적인 유익함을 위해서 지배할 때는 그 정치체제들은 타락한 것들이다. ... 다중이 공동의 유익함을 위해 통치할 때에 이것은 모든 정치체제에 공통되는 이름인, 즉 폴리테이아로 불린다." (제3권 1279a29-37)

"참주는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동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는다. ... 분노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우월성이 아니라 복수를 위해서 공격한다." (제5권 1311a1-35)

2024. 2. 26. 월. 맑음.

출근해 일했다. 회사에서

아내가 데리러 와주어 퇴근길이 행복했다.

혈압이 높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알렸다.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언제?

지원에게 흔한 질문을 비판했다. 설거지를 하다가, ‘성격 좋은데 일 못하는 사람, 일 잘하는데 성격 나쁜 사람 중에 누가 낫느냐’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했다.

2024. 2. 27. 화. 포근함.

출근해 일했다.

고양이 갓또의 생일을 축하했다. 공부도 하지 않고 내내 놀아줬다.

2024. 2. 28. 수. 맑음.

출근길에 멀어진 친구를 생각했다. 출근해 일했다.

2024. 2. 29. 목. 맑음.

출근길에 이런 생각을 했다. 출근해 일했다.

매일 아침 환승하려고 서해선을 타고 김포공항역에 간다. 서해선 김포공항역은 단테 신곡 지옥편만큼 깊다. 기나긴 에스컬레이터를 세 번 올라야 다른 노선으로 갈아탈 수 있다. 혹시라도 출근길에 나를 본다면, 저 망령은 왜 여기서 고통받을까 물어보셔도 좋다.

문제는 한줄서기다. 묘한 한줄서기 문화 때문에 그 긴 에스컬레이터를 절반만 쓴다. 걸어오르는 몇몇 사람도 있는데, 아마 이곳에 처음 와봤거나 아주 급한 사람일 거다.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겨우 오르면 아직 두 개나 더 남았는데도 허벅지가 터질/타는 듯하다. 계단에 층계참을 두는 이유를 몸으로 알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 우측에 서서 탄다.

역사에서도 이걸 아는지, 매일 출퇴근길에 직원을 배치한다. 직원은 유니폼을 입고 경광봉을 흔들면서 ‘좌측도 서서 이용해주세요’라고 외친다. 목도 팔도 아플 것 같다. 이제는 직원도 눈에 익어서, 다른 직원이 나오면 휴가를 쓰셨나 싶다.

그래서 드리는 제안. 직원들이 그냥 ‘두줄서기’라고 앞뒤로 큼지막하게 박은 유니폼을 입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어떨까? 나도 직원이 딱해 좌측에 서서 가고 싶은데, 혹시 뒷사람에게 봉변이라도 당할까 우측에 서서 시선을 피한다. 용기내서 좌측에 서서 가는 몇몇 분도 본 적 있다. 뒷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그냥 서서 갔다. 다행히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진짜 급했으면 엘리베이터를 탔겠지.(정말 급할 때 이용할 비상계단이 없는 건 큰 문제다. 불나면 엉켜서 죽는 사람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소시민인 내게 그런 용기는 없다.

완장을 차면 나 같은 사람들은 잘 따른다. 유니폼 입고 좌측에 서면 아무도 따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깊이 지하철을 뚫었는데도 이용객의 편의와 안전은 도외시한 역사의 구조를 비판하기보다 매일 아침 이 꼴을 보아야 하는 자기 신세를 탓할 것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면서 이게 다 누구 탓이다… 생각할 수도 있고. 이런 사람에게는 공인된 권위를 눈앞에 보여주는 상징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문제해결을 위한 일도 있고, 문제해결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일도 있다는 걸 잘 안다. 역사와 직원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딱해 보여서 한 마디 해봤다. 보여주기만큼 소모적인 일도 없으니까.

2024. 3. 4. 월. 기억나지 않음.

이런 생각을 했다.

주자가례를 읽는다.

관혼상제 중 제일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단연코 상례다. 전 5권 중 상례를 다룬 제4권이 절반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탄생을 알리는 관례, 한 가정의 탄생을 축하하는 혼례, 뿌리를 기억하는 제례도 있는데, 왜 하필 상례가 그렇게 중시됐을까?

유해손의 보주에 설명이 나온다.

”순자는 ‘상례의 모든 것은 변하면 꾸미고 움직이면 멀며 오래면 고르게 된다. 그러므로 죽음의 도라는 것은 꾸미지 않으면 더럽고 더러우면 슬퍼하지 않으며, 가까우면 장난하고 장난하면 꺼리며, 꺼리면 잊고 잊으면 공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이 꾸밈없는 속마음이라면, 예는 겉모습으로 드러낸 마음이므로 어쩔 수 없이 일종의 꾸밈으로 나타난다. 인 없이 예식에만 갇힌 사람이 허례허식으로 비웃음을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모든 예식을 허황된 것이라 웃어넘길 수는 없다. 꾸미지 않으면 더러워진다. 더러우면 슬퍼할 수 없다. 특히나 시신은, 매장하기 전까지 빠르게 부패한다. 머리를 감기고 씻겨 죽기 전의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액체가 흐르고 벌레가 파먹는 몰골을 보고 어찌 슬퍼할 수 있겠는가! 꾸밈은 인위다, 인위여서 인간이 하는 것이고, 그래야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우리 삶에서 위선을 모조리 제거하자는 자들은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잊지 않고 공경할 수 있다.

2024. 3. 8. 금. 맑음.

세 친구의 글을 읽었다. 모두 논평을 써주고 싶었으나 가장 소중한 친구의 글은 마음에 남기기로 했다.

2024. 3. 12. 화. 흐리고 비 조금.

이런 생각을 했다.

어제 잠들기 전에는 내가 세상의 승리자가 된 것 같았다. 포근한 이불, 함께 누운 아내, 다리춤에 느껴지는 보드랍고 따뜻한 고양이, 모든 것이 완전했다.

어릴 때 나는 뱃속이 저릿했다. 놀이기구 탈 때 느껴지는 그런 마음. 좋아서 그런 적도 있지만, 애가 타서 그럴 때가 더 많았다. 어린 몸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가난, 부모님의 싸움, 이런 것들이 내 뱃속에서 날갯짓을 할 때마다, 나는 똥처럼 이것들을 싸버리고 싶었다. 유치원에(작성중단)

2024. 3. 22. 금. 맑음.

이런 생각을 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또 읽는다. 그러고 보니 1년 단위로 다시 읽는 듯. 읽을수록 모른다는 것만 명확해진다.

1년 전 이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뭔가 새로운 걸 알아냈다!... 예전의 나는 바보였다!' 뭐 이런 흥분감에 썼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우습다. 책 빈 공간에 적어둔 메모에 큰 X자 표시만 늘어간다. 이때 이건 잘못 알았고, 그건 사실 저것이었고, 이건 아예 이해를 못했으면서 뭘 아는 체 했고, 난 바보고… 바보고…

네 번째 읽으니 뭐가 좀 보인다. 물론 이 말도 다섯 번째 읽을 때 우습게 느껴질 건방진 말이다. ㅋ

2024. 3. 23. 금. 맑음.

폴티 원고, 자기소개서, 직무수행 계획서 작성,

롤랑 바르트 읽기, 니코마코스 정리

2024. 3. 26. 화. 흐림.

이런 생각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과 자제력, 소크라테스의 죽음 사이의 관계를 찾았다.

정치학-윤리학-수사학이 이 한 고리로 묶인다. 감격스럽다. (이미 나 빼고 다 아는 논의라면 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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