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스는 자연과 언어 사이에 있다.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자연과 동일하지만, 인간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언어와 동일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토피카>에서 문제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그에 따르면 문제는 총 세 가지인데, 자연에 관한 것, 에토스에 관한 것, 언어에 관한 것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철학자들 중 플라톤의 입지를 밝히면서 이 구분틀을 그대로 사용했다. 자연철학자들이 자연을 탐구했다면, 소크라테스는 윤리를, 플라톤은 변증술에 관한 것을 탐구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어떤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는 점과 플라톤의 기록으로 후대에 전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에토스는 언어적인 것이 아님에도 언어로 완성되어야만 하는 숙명에 놓인다. 마치 신처럼, 에토스는 영원히 미완의 언어가 된다.

“Two people oppositing each other and a cliff of abyss between them.”
에토스는 깊이와 같다. 깊이는 시간이 흘러야만 알 수 있는 개념이다. 깊이는 감각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모든 감각은 모종의 접촉인데, 접촉은 평면적인 것이므로 애초에 깊이라는 범주가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깊이는 상상된 감각이어야 한다. 이 때의 접촉과 저 때의 접촉을 상상 속에서 종합함으로써 깊이라는 느낌이 완성된다. 우리의 시각도 마찬가지다. 시야는 언제나 2차원 평면에 배열된 화소처럼 시각적 자극으로 구성된다. 그것들이 시간을 두고 종합됨으로써 형태라는 것이, 깊이라는 것이 우리 세계에 가능하게 된다. 원근법이 가능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람에게도 물론 깊이와 같은 것이 있다. 모든 사람은 서로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 겉모습으로만 마주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속마음을 안다. 그가 과거에 어떤 행위를 했었는지 현재의 말과 함께 시간의 흐름 안에서 종합함으로써 그의 에토스를 알게 된다. 세계가 자연-에토스-언어라는 삼중의 구조를 갖는 것처럼, 인간은 속마음-에토스-겉모습으로 존재한다. 속마음은 결코 알 수 없는 심연이고, 겉모습은 모두에게 드러난 공적인 것이지만, 에토스는 그곳으로 향하는 깊이다.
에토스는 시간 안의 행위들이 인간의 상상으로 종합된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상상하지 못하는 인간은 타인의 에토스를 결코 보지 못한다. 그 결과는 질서의 부재다. 모든 질서는 경중, 선후, 상하, 우열 등 각종의 비교를 통해 나타난다. 상상력이 부재한 사람은 비교할 수 없다. 비교를 하더라도 천박한 비교만 한다. 겉모습만 보기 때문이다. 천박한 비교는 결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논쟁만 낳는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사회 현상은 어떤 틀로도 종합되지 못하고 무수히 많은 언어를 낳기 때문이다. 그런 언어는 자연이나 인간의 속마음을 결코 향하지 못한다. 하지만 에토스를 보는 사람은 그의 미래 모습을 안다. 타인의 에토스를 보는 사람은, 그의 과거 행적과 현재 행위를 비교함으로써 미래에 그가 어떤 모습을 갖게 될 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에토스를 아는 사람은 허위와 위선을 걷어낼 수 있다. 인간에게 도덕적인 판단은, 바로 이와 같이 역사적인 판단을 능수능란하게 할 때에야 가능하다.
한편, 에토스는 믿음과 용서의 영역을 가능하게 한다. 모든 사람은 성장한다. 성장하는 존재는 과거와 현재에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있다. 이 모순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만 해소된다. 마찬가지로, 성장하는 인간은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현재 다른 결심을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과거의 모습을 그 어떤 변화도 없이 고이 간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사물뿐이다. 사물은 피해를 입어야만 변화한다. 사물이 변화하는 원인은 폭력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과거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인간은 현재 결단함으로써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속마음이라는 심연, 즉 사유의 영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계열은 사유의 계열로 단절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에토스는 인간이 의지하는 것이자 극복해야 할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단할 수 있는 인간, 상상할 줄 아는 인간은, 타인의 에토스를 보면서도 그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에토스를 볼 줄 아는 사람은, 동시에 에토스를 철폐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그래서 그런 인간은 모든 인류의 이상이 된다.
문제는 상상력이 타락할 때다. 타락한 상상력은 역사판단을 통해 도덕판단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타락한 자들은 이상이 요청하는 역사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낸다. 우리 사회에는 상상력이 타락한 사람들이 유달리 모여산다. 손흥민-이강인의 라커룸 갈등이 대표적이다. 인간은 잘못을 한다. 어린 이강인은 이미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상이 된 손흥민에게 잘못된 행동을 했다. 이강인의 에토스를 보려는 자들은, 이강인의 잘못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문제로 그의 과거를 들여다봤다. 공교육에 진입하기 전부터 스페인에서 생활했던 배경,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자들이 타인과 어울리는 데 힘겨워하던 사례가 많았다는 점 등등은 그가 포섭될 새로운 도덕의 기준을 제시했다. ‘모든 인간은 잘못한다’는 이 도덕적인 판단은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앞으로 더욱 성장하기를 믿어줄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강인을 나쁘게 보려고 마음 먹은 자들은 ‘이미 그가 나쁘다’고 단정짓고 그가 반사회적 행동을 하던 어린시절의 영상을 편집해 들고 왔다. 모든 어린이는 일종의 반사회적 행동을 하고 어른에게 교육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런 내용의 미디어는 역겨웠다. 역사판단과 도덕판단 사이의 질서가 전도되면서, 정치판단은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단죄하는 데 사용됐다.
바로 동일한 이유로 에토스에는 선천적인 한계가 있다. 바로 자유 때문이다. 과거에 아무리 좋은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인간은 현재 얼마든지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오직 에토스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인간은 도박사의 오류에 빠진 자와 다르지 않다. 인간에게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자유라는, 혹은 사유라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에토스는 믿음의 대상이지 사실을 입증하는 도구가 아니다. 신도 마찬가지다. 경험의 한계 안에서 신은 결코 증명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태도에 따라 에토스는 믿음이 되기도,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타인에게 믿어주기를 호소하는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개인의 믿음과 독립한 법칙이 성립할 수 없다. 오직 인간은 스스로 약속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기로 자유롭게 결단함으로써, 스스로 먼저 믿고 타인의 믿음을 갈구함으로써 깊이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