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전선 이상 없다(2022)

새해를 맞아 ‘서부 전선 이상 없다’ 2022년판을 봤다.

Im Westen nichts neues. 서쪽에는 새로울 것 없음.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옮기기에는 너무 깊은 제목이다.

하인리히에서 파울로 이어지는 돌격 장면과, 파울에서 이름 모를 어린 병사로 이어지는 인식표 수거 장면의 반복은, 새로울 것 없는 참호전을 되새기게 한다. 죽은 병사들의 군복을 수거해 핏물을 빨고 총알구멍을 기워 신병들에게 나눠주고 다시 그들이 죽어가는 장면은, 노동자는 죽어도 그들의 시간을 빨아먹고 자란 상품은 시장에서 영원히 순환하리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으로 읽히기도 한다. 굶주리는 사병과 먹다 남긴 고기를 기르는 개에 던져주는 장교의 대비는, 프랑스혁명과 공장법을 대하던 부르주아의 이중성으로도 보였으나, 그런 이중성은 인간이라면 다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반성에 생각을 멈춘다.

특히 휴전 협정 발효 15분을 앞두고 돌격하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의 새해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나라의 새해는 독특하다. 연말을 사람과 술로 보내다 휴전 협정을 맺듯이 덜컥 새해를 맞는다. 타성에 젖었던 연말에 대한 반성, 그리고 새로운 계획과 다짐은 설까지 유예된다. 신정과 구정 사이, 지난 삶의 관성이 최후의 반격이라도 하듯이 나를 집어삼킨다. 이윽고 설날. 죽어가며 휴전보를 듣는 병사처럼, 1월에는 새로울 것 없었다. 올해도 벌써 8%가 지나버렸구나. 마음먹은 것들에 나는 한 발짝이라도 움직였는가? 의지가 돌격하면 타성이, 생계가, 핑계가 맞받아친다. 읽을 책은 쌓이고, 쓴 글은 줄어만 간다. 새해에는 글을 써야지, 했던 마음도 결국에는 제자리 걸음이다. “몇 주 뒤면 파리를 점령할 것이다”, 몇 개월이면 글 한 편이 나올 것이다…. 시간도 꿈도 새로울 것 없이 반복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내와 고양이가 옆에서 새근새근 잔다. 매일 함께 잠에 드는 이 반복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먹고 사는 일, 더럽히고 어지른 것들을 씻어 정돈하는 일은, 참호전처럼,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처럼 반복된다. 굳이 새로운 것이 있어야만 하는가? 불운에 무너지지 않고 오늘도 무사히 함께 잠들 수 있다는 데 감사해야 하지 않나?

이제 나도 30대의 삶을 산다. 애벌레가 나비로 우화하듯이, 스물아홉 막바지에 결혼해 서른의 첫 해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매번 반복되는 새해지만, 이번 새해는 느낌이 다르다. 평소에 20대니 30대니 나누는 게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아니다. 프랑스혁명이 진행되면서 민중 사이에 이성에 대한 숭배가 나타났다. 성직자를 몰아내고 혁명의 투사를 섬겼다. 그 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한 주를 7이 아니라 10 단위로 나눈 것이었다. 20대니 30대니 나누는 것도 결국에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인생을 받아들이기 위한 이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총탄이 빗발치는 삶을 뛰어가야 하는 우리에게 새해는 잠시 쉬는 참호 같다. 이제 내가 나아가야 할 곳은 새로운 10년이라는 평원이다. 반복이다. 새로울 것 없다. 그래도 반복 안에 늘 새로움이 내재한다.

매해 맞는 새해지만, 늘 그렇듯이, 모두 복 많이 받는 한 해 보내시기 바란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을 만나 나는 전우애 같은 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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