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다. 아니, 글을 읽지 않는다. 이건 도서 시장의 위축이니 독서 인구의 감소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현대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읽기에 무능해졌다는 것이다. 독서대중이 사라졌다. 여기서 독서는 책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텍스트를 읽어 나가는 활동을 의미한다.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출근길 지하철에 타면 모두가 무언가를 읽는 데 열중이다. 다들 무엇을 그렇게 읽는 것일까? 사람이 가득찬 대중교통에서는 앞 사람이 보는 스마트폰 화면이 원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아마 그들은 눈앞의 화면을 사적이라 생각할 테지만, 그들이 보는 화면은 그가 보지 못하는 뒤통수 너머 사람들에게 이미 공공연하다. 그들이 읽는 것은 주로 뉴스나 릴스, 쇼핑몰 상품설명 따위이다. 저널리즘을 상실한 뉴스는 사건을 소화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흘려보낸다. 짧게 편집돼 무한한 연쇄를 이루는 쇼츠, 릴스 따위의 영상들은 호기심만 끝없이 자극한다. 물건이 너무 오래가면 망하게 될 쇼핑몰은, 얼마 못 가 망가져야 할 상품의 운명을 숨긴 채 이 상품이 얼마나 좋은 물건인지 꾸며댄다. 글자로 쓰였다고 다 글인 것은 아니다. 마치 전기밥솥의 사용설명서처럼, 저자가 없거나 있어도 의미 없는 텍스트는 텍스트가 아니다.
사용설명서도 아주 독특하게 쓴다면, 독자는 저자를 궁금해할 것이다. 하찮아 보이는 글 중에도 저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텍스트는 아주 드물게 있을 것이다. 텍스트를 결정하는 것은 기호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 즉 독자의 판단과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내용이니까. 마찬가지로 독서대중은 단지 책을 읽는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미신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성을 자유로이 사용하는 사람들, 계몽된 사람들이 바로 독서대중이다. 독서대중은 타인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한편, 타인의 자유로운 이성에 자신의 생각을 남김없이 펼쳐 보이기도 할 것이다. 독서대중은 자신의 의견에 타인의 정신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고 있으므로, 그만큼 타인의 의견도 성실히 검토한다. 검토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그리고 이때의 검토는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데 점을 찍은 칸트의 주장처럼, 독서대중은 자신의 판단력을 충실히 발휘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독서대중은 왜 사라졌을까?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독서대중의 실종은 저자의 실종이기도 하다. 저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충실히 읽기만 하면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는 그런 텍스트를 이제 아무도 읽지 않는다. 텍스트가 저자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느냐와는 별개로, 대중은 이제 저자를 신경 쓰지 않는다. 독서대중과 함께 저자는 뿔뿔이 흩어지고 사라졌다.
원인은 무관심이다. 이 무관심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칸트가 지적한 무관심(disinterestedness)과 정확히 동일한 위상을 갖는다. 하지만 두 무관심의 대상은 아주 다르다. 칸트의 무관심이 자기 자신의 이익과 손해에 관심을 끊는 것이라면, 현대인의 무관심은 타인 그 자체에 관심을 끊어 버린다. 말하자면, 현대인의 무관심은 모두에게 ‘좆도 신경쓰지 않는 것(not giving a fuck)’이다. 현대인의 무관심은 타인에 대한 깔끔한 단절과 자기 이해득실에 관한 무한한 관심을 의미한다. 남근 또는 성교로 상징되는 원초적인 욕망이 바로 이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발기하는 남근과 같이, 혹은 생명으로부터 성공적으로 격리된 즐거움과 같이, 현대적 무관심은 타인 그 자체가 아니라 타인으로 인해 얻게 될 만족감에만 집중한다. 무관심한 대중이 하는 독서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에 관심 갖지 않고 글을 읽는 것, 읽고 나서도 오직 나의 이익만 문제 삼는 것, 그것이 현대 대중의 독서 양식이다.
무관심을 기초로 한 현대인의 윤리는 파편화와 개인주의다. 물론 현대 한국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원자적 개인이니 뭐니 우리 시대를 비판하는 언어를 개발하려고 사람들은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빠진 상황은, 없던 게 추가돼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기존에 갖고 있던 것을 잃어버려서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가 잃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 우리말 관용어에 있다. 바로 ‘오지랖 부리기’다. 오지랖은 한복 외투 앞섶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날개 같은 양 앞섶을 추스르면 한 날개는 안에, 다른 날개는 바깥에 포개진다. 이때 바깥에 포개지는 앞섶이 오지랖이다. 그러니까 오지랖은 내가 입은 모든 옷을 감싸는 천이 된다. 오지랖이 넓으면 제 품에 안고 보듬어줄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난다. 우리가 한복을 더는 입지 않기 때문일까? 품이 넉넉한 옷보다 몸에 딱 맞는 옷의 인기가 좋은 것처럼, 이제는 넓은 오지랖이 오히려 흠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철저히 본인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자기 앞가림이나 잘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마치 오지랖의 원래 목적은 제 몸 하나를 가리는 것 아니냐는 듯이. 넓은 오지랖은 넉넉한 품만큼이나 확장된 정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타인 입장에서 생각하기’이다. 우리가 잃은 것은 넓은 오지랖이다.
무엇이 우리의 오지랖을 점점 좁게 재단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신학적이다. 부분과 전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몸을 통해 사회에 참여한다(to take part in). 몸을 가진 인간은 자기 이해관계에 매몰되므로 편파적(partial)이다. 몸은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반면 신은 몸을 갖지 않는, 다시 말해 한계를 갖지 않는 무한한 존재다. 무한한 존재는 결코 부분이 될 수 없으므로 언제나 전체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부분이 전체를 구성하느냐는 문제다. 신이 아닌 인간은 아무리 합쳐봐야 인간일 뿐, 신을 참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점이 바로 신학의 한계이다. 이때 시간과 사유에 관한 인간학적 고민이 해결책을 제시한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으나 신적으로 활동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부분인 인간은 시간 안에 살고, 전체인 신은 시간 밖에, 즉 영원에 산다. 인간이 영원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사유뿐이다. 사유하는 인간은 몸을 떠나 활동하므로 신을 닮았다. 사유하는 인간은 신과 같이,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도 느리게도 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을 이미 떠났으므로 타인의 입장이 되어 활동해볼 수도 있다. 자아는 단일하다는 한계를 넘어서 여러 인격을 동시에 가져볼 수도 있다. 이 모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바쁜 활동, 홀로 있으면서도 결코 외롭지 않은 활동인 사유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자는 정의상 부분적이다.” 부분은 전체를 희구한다. 필요는 전체를 희구하는 부분이 놓인 실존적 조건이다. 그래서 인간은 공동체를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영웅이나 배움을 사랑하는 현자를 칭송한다. 용기와 지혜라는 덕목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난 신적 자질이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한 행동이 행위자를 신과 같이 보이게 한다. 물론 그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은 모두가 안다. 그는 인간으로 살아있는 한 결코 자족하지 못한다. 그는 먹고 살아야 한다. 사물이 필요하고 타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듯이 가장하는 태도가 자족적 인간의 첫 번째 덕목이다. 이것이 바로 오지랖이다.
옷을 몸에 딱 맞게 재단하는 일은 ‘앞으로 결코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미래 전망을 전제한다. 성장기에 있는 사람은 옷을 넉넉하게 재단할 것이다. 자고 나면 몸이 자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지랖 부리기’의 상실은 인간이 결코 인류 전체적인 관점으로 세계를 조망할 수 없으리라는 우울한 전망에서 비롯된다. 모든 행위자는 부분적이니 전체가 될 수 없다. 감히 부분적 존재가 전체를 참칭하면 옆에 있던 다른 부분들이 신을 대신해 복수해주는 것이다. 몇십 년 월급을 모아봐야 아파트 한 채 살 수 없다는 자조, 그와 동시에 호황을 누린 명품산업이 현대 한국인의 자화상이다. 전체가 될 수 없다면 부분의 에토스나 제대로 견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우 사회적이지만 한편으로 정치적이기도 한, 대한민국 시민들의 권력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세계 상실은 정치의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행위가 세계를 파괴하는 길로 이끌 수 있다. “행위자는 정의상 부분적”이지만, 인간이 전체적 관점을 견지할 유일한 가능성은 행위를 멈추고 사유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 사람들은 글을 읽어도 타인과 연결짓지 못한다. 아무도 타인을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는 글은 글자들의 연쇄일 뿐, 텍스트가 될 수 없다. 독자가 사라지면 저자도 사라진다. 서점 매대를 가득 채운 비슷비슷한 자기계발서가 이를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