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지인 역, 곰출판, 2021.

2023년 9월 18일부터 9월 19일까지 읽다.

줄거리

혼돈은 이름 없는 자연, 더 나아가 이름 없음 그 자체다. 자연에 이름을 붙이면 질서가 생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은 어린 시절 별들의 이름을 익히려 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식물과 동물의 이름을 익혔다.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는 자연에 이름을 붙이는 분류학(taxonomy)을 조던에게 전수했다. 조던은 성공적인 분류학자로 알려지며 수많은 물고기의 학명을 명명하고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 당시 학장을 맡는다.

저자 룰루 밀러는 조던에 관심을 가진 계기를 혼돈과 질서의 관계에서 찾는다. 이성과 사랑을 나누며 질서 잡힌 생활을 하던 밀러는 동성과 바람을 피워 혼돈에 빠지고 만다. 조던은 혼돈에서 질서를 찾으려는 사람이었고, 밀러는 그런 조던에 더욱 몰두한다.

명명된 동물은 에탄올이 담긴 유리병에 보관한다. 명명 당시의 표본은 완모식이라 부른다. 완모식은 단지 그 개체에 대해서만 한정되며, 이후의 개체는 결코 완모식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을 만큼 신성시 된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스탠퍼드 대학에 보관 중이던 조던의 완모식을 모두 부순다. 조던은 완모식의 이름표를 표본의 살에 바늘로 꿰는 폭력적인 방법을 고안한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지진이라는 고난에도 절망에 빠지지 않은 조던은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기만으로 자신만만함을 유지한 인물이었다. 밀러는 조던이 이름 붙인 괴상한 생물 Agonomalus Jordani를 보며, 모서리(한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던의 삶과 비슷함을 떠올린다.

조던에 적대적이었던 스탠퍼드의 설립자 제인 스탠퍼드의 죽음은, 조던이 표본 채집에 사용하던 스트리크닌에 중독된 것이 원인이었다. 조던은 스탠퍼드를 독살했다. 뿐만 아니라, 아오스타라는 장애인 거주구역을 가리켜 “진정한 공포의 공간”이라며 우생학에 따른 강제 불임수술을 적극 주장했다. 조던의 동정(identification) 행위가 갖는 근원적인 폭력성, 예컨대 이름표를 원모식에 꿰는 행위는, 훗날 미국 정부가 부적합자의 생식기와 혈통을 잘라내는 폭력성과 공명한다. 조던이 심취한 아리스토텔레스 류의 ‘자연의 사다리(scala naturae)’는 인간의 폭력과 만나 범죄로 이어졌다.

밀러는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natura non facit saltum)”는 다윈의 말을 옮기며, 자연의 사다리가 기만, 즉 상상의 산물임을 지적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분기학(claudistics)이다. 분류학이 자연의 겉모습과 인간의 편의에 따라 동물들의 원근관계를 구분했다면, 분기학은 신체 안에 있는 기관과 유전적 형질까지 고려해 원근관계를 따진다. 비슷한 생김새로 물고기(fish)라는 이름을 공유하지만 서로 매우 다른 근원을 갖는 수중생물처럼, 분류학자들의 질서는 허구다.

감상

밀러는 혼돈에 맞선 질서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잘 정리했다. 겉모습이 아니라 내부로 들어가 근원적인 관계를 따져야 한다.

그러나 밀러의 답변은 모호하다. 미국 정부의 우생학적 불임시술의 피해자 애나와 메리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밀러는 관계의 중요성을 말한다. 한 사안도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 사실로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일 것이다. 분기학이라는 용어가 가지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클라도스(κλάδος)에서 왔다는 점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가지는 무한히 세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밀러가 말하고자 한 바는 명명이라는 행위가 낳는 질서가 실은 무한한 회의 가능성이라는 혼돈에 빠져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밀러는 질서와 혼돈의 관계를 얼버무리며 끝낸다. 그 관계를 명백히 기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조던이 빠진 질서의 함정에 다시 들어가는 꼴이 될 것이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 것인가? 질서와 혼돈은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οὐροβόρος)처럼 각자의 존재 근거를 서로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던이 자연을 정복하고자 시도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던 것처럼, 질서 지우려는 인간은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점은 밀러가 조금 더 파고들어도 좋았을 내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연의 사다리’를 조던의 폭력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서는 결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일정한 크기를 가진 부분들의 배열에 일정한 질서가 있을 때에야 아름다움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조던의 질서는 모서리없는 조던이라고 명명한 그 생물처럼, 한도 없는 무한한 배열이었다. 무한에는 어떤 질서도 나타날 수 없다. 세상 모든 생물에 이름을 붙이겠다고? 그렇게 해보시라. 언젠가는 새로이 이름 붙여야 할 생물이 나타날 것이다. 어쩌면 그 이름을 기억할 나와 인간문명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사다리’를 말할 때, 인간 위에 신을 두었다. 인간은, 마치 조던이 새로운 종을 창조할 때 저지른 짓과 같은 신적인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건 오만이다. 인간이 자기 한도를 알고 오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질서(τάξις)이고, 분류학의 기원이 된다.

분기학의 그리스 어원을 설명한 밀러가 분류학의 어원은 확인하지 않고 넘어갔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밀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시스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희대의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책을 쓴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시스, 자연의 사다리를 교묘히 조던의 폭력이 근거한 원인으로 지목하며, 밀러는 자기 한도를 모르고 사랑했던 사람을 저버렸던 자신의 배신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268)하라고? 한도 없는 페미니즘, 분수를 모르는 자기 동정의 서사는 언제나 한도를 기억하라는 사람에게 지배자라는 오명을 덧씌운다.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깊이는 얕다. 내 감상은 여기까지다.

제출용 독후감

책값 벌려고 대충 씀

혼돈은 이름 없는 자연, 더 나아가 이름 없음 그 자체다. 저자 룰루 밀러는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추적하면서, 혼돈과 질서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폭력성에 주목한다. 자연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일견 질서를 회복하는 듯 보여도, 언젠가는 우생학과 같은 폭력적인 결말에 이르게 된다. 모든 현상은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사실로 보일 수 있다는 점, 질서라는 체계 자체가 어쩌면 인간의 편의에 따른 허구일 수 있다는 점,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무한한 의심 가능성 앞에 자신의 생각을 맞세워야 한다는 점이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이 책은 공직생활에도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공무의 근거가 되는 헌법과 법령은 그 자체로 진리인가? 법의 지배라는 정신이 ‘법만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인간은 법을 넘어 공정, 형평, 정의를 떠올릴 수 있다. 법은 조던의 학명처럼 완전무결, 확고불변한 질서가 아니다. 법은 늘 바뀔 수 있다. 공정하고 형평에 부합하며 정의로운 공무는 법보다 국민을 중시해야 한다.

공직자의 가장 큰 문제는 용기가 없다는 점이다. 살인이나 폭행과 같이 명백한 위법·불법·범죄가이 아닌 이상 공직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국민의 공공복리를 증진하기 위해서라면 법이 미비한 경우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 틈새를 파고들 용기를 가져야 한다. 지원 근거가 없어서 지원을 해주지 못한다거나 우리 부서의 소관이 아니어서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은 공직 기강을 병들게 하는 암적인 태도다. 질서 아래에서만 움직이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현장의 혼돈이 언젠가는 법령이라는 질서로 나타나리라는 믿음을 품고, 인류의 관점에서 공직을 수행해야 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