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에 여성 인물이 적다는 비판이 돈다. 지능형 안티 페미니스트 같다. 그들은 모든 역할에 성별을 결부시킨다.
성별을 이유로 역량을 폄하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과장해서도 안 된다.
역할은 역량으로 결정해야 한다. 전통 사회는 역량이 아니라 성별로 역할을 결정하곤 했다. 분명 문제다. 그러므로 자연적 성별과 사회적 성역할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주장이 페미니즘의 핵심이다.
아기를 낳고 젖먹이는 일 말고는, 특정 성별이 특정 역할을 많이 한다는 데에 어떤 자연적 이유도 없다. 역할은 인간이 선택한다. 그 선택이 자유로웠냐 강압적이었냐는 나중 문제고, 우선은 어떤 성별에 마땅한 역할이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손흥민은 남자여서가 아니라 축구를 잘해서 프리미어 리그 선수다. 여자가 감히 프리미어 리그에 뛰면 안 되는 게 아니라, 그곳은 축구 못하는 놈이 감히 넘보면 안 되는 성역이라는 거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모든 역할에 남녀 동수를 맞추자는 건 오히려 페미니즘을 엿먹이는 짓이다. 소위 미러링이라 하는 방법은, 감정적으로는 ’오죽 묻혔으면 저렇게까지 할까‘ 측은하면서도, 명백한 모순이라 본다. 특정한 사회적 사건에 성별을 결부시켜 생각하는 짓은 상관관계를 넘어 인과관계로 일반화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다는 주장도 보인다. 그러나 그건 과장이다. 남성보다 우월한 여성의 자연적 능력은 새로운 인간을 몸 안에 품고 낳아 적당히 클 때까지 기를 수 있다는 점뿐이며, 그 외에는 성별구분 없이 그 개인이 가진 뛰어난 역량이 역할을 결정해야 한다. 재능과 습관, 마음가짐이 역량의 핵심이다. 자연적 성별을 사회적 역량과 결부시키는 순간 그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마치 신과 같이 사심없이 공명정대하게 중립적으로 타인의 역량을 평가할 중립적인 관점이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성별만으로 역할을 결정해 여성을 억압해왔다는 사실을 곱씹고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입장을 왜곡해 마치 복수하듯 남성을 몰아내자는 주장이 보인다. 난 그런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부정에 머물러야 한다. 그 목적은 판단력의 회복이어야 한다. 타인의 역량을 판단하는 관점에 덧씌운 역사적 색안경을 제거하는 데 그쳐야 질서 잡힌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이 선을 넘어 할당량을 주장하는 순간, 성별이 역할을 결정하는 시대로 다시 퇴보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진정한 이상향은 사회적 역량을 자연적 성별로부터 독립하는 것뿐이다.
(2023. 8. 21. Facebook)
성별을 이유로 역량을 폄하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과장해서도 안 된다.
자연적 성별(섹스)와 사회적 성역할(젠더)를 구분하자는 게 페미니즘의 시작이었다. 특정 성별이 특정 역할을 많이 한다는 데에는 단지 사회적 상관관계만 있을 뿐, 어떠한 자연적 인과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페미니즘의 정수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모든 역할에 남녀 동수를 맞추는 건 페미니즘의 이상향이 아니다. 특정한 사회적 사건에 성별을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도 상관관계를 넘어 인과관계로 일반화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몇몇 페미니스트(대표적으로 트위터 페미니스트, 가장 현저하므로)을 보면 모든 역할과 사건에 성별을 결부시킨다. ㅇ성이어서 그 자리에 갔다/가지 못했다(유리천장), ㅇ자여서 당했다/저질렀다(범죄의 성별화)는 구호가 대표적이다.
더 나아가서,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다는 주장도 보인다. 그러나 남성보다 우월한 여성의 자연적 능력은 새로운 인간을 몸 안에 품을 수 있다는 것뿐이며, 그 외에는 성별구분 없이 그 개인이 가진 뛰어난 능력이다. 자연적 성별을 사회적 역량과 결부시키는 순간 그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마치 신과 같이 사심없이 공명정대하게 중립적으로 타인의 역량을 평가할 중립적인 관점이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젠더와 섹스를 구분하지 않고 여성을 억압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부정에 머물러야 한다. 타인의 역량을 판단하는 관점에 덧씌운 역사적 색안경을 제거하는 데 그쳐야 페미니즘의 본령이다. 페미니즘이 무엇을 주장하는 순간, 젠더와 섹스는 다시 결부될 것이다. 페미니즘의 진정한 이상향은 사회적 역량을 자연적 성별로부터 독립하는 것뿐이다.
(2023. 8. 18. project_Qualia)
[청아] [오후 1:57] 예전에 페미니즘 친구가 몸매가 여성스럽다 할때 여성스럽다라는 단어 자체 또한 차별이라고 해서 엄청 부딪혔던 기억이 있네요
[청아] [오후 1:58] 페미니즘? 이였던가 ,,,? 정확히는 어떤 협회에 들고 말고에 관심이 크게 없었지만
[청아] [오후 1:58] 젠더와 쏵스를 구별하자라는 문장을 보고 생각이 났습니다
[답변]
“여성스럽다”는 표현 자체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이념형(idealtype)이라 합니다. 살면서 경험한 것들을 겹쳐 공통의 성질을 추출해낸 결과이지요. 이념형이 없다면 개념도 없고 의사소통도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밈meme도 존재하지 않을 테고요.
“이탈리아인스럽다”는 말에는 예컨대 이런 것들이 들어갈 겁니다. 카페 아메리카노를 싫어한다, 파인애플피자를 싫어한다, 끓는 물에 파스타를 부러뜨려 넣는 걸 싫어한다… 이런 특징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경험한 것들이 모여 형성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들은 이탈리아인이 불쾌해 한다면 사과해야겠지만, 이런 이념형이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여성스럽다”는 표현에는 (일반적으로 대다수 여성들이 가질) 도드라진 유방과 골반, 아이를 품을 자궁을 갖고 있다는 자연적 형태에 관한 의미가 들어있다든지, 아니면 여성이 흔히 모여 하는 행위들, 예를 들면 동성 친구끼리 팔짱을 끼고 손을 잡는다든지 하는 행동에 관한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물론 상대방이 불쾌해 한다면 사과해야 하고요.
“이념형이 곧 현실이다”라고 바로 일반화해버리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현실보다 이념형을 우선시 해서, 결국 이념형에 맞추어 현실을 수정하는 태도를 이데올로기ideology라 하니까요. 대부분의 전체주의 사회가 채택했던 전략입니다.
마찬가지로, “‘여성스럽다’는 표현은 모두 성차별적이다”는 주장 역시도 페미니즘이라는 이념에 현실을 맞추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성차별적인 현상은 도처에서 발생하고 그런 현상을 최대한 막아내는 게 인간적이겠으나, 그렇다고 ‘모든’ 사회현상이 성차별적인 것은 아니니까요. 과격한 페미니스트의 구호와 나치 선동가들의 구호가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페미나치라 비난하는 일부 사람들의 말이 전혀 택도 없는 소리는 아닐 겁니다. 당연히 페미니즘은 나치가 아닙니다. 오해 금지.
[청아] [오후 2:35] 전문적 단어와 논리정연한 들에 짜릿하면서도 철학을 잘 몰라 버벅이는 뇌가 생생합니다
[청아] [오후 2:35] 감사합니다
[청아] [오후 2:35] 저는 그런데 호르몬에 의한 여성만이 가지는 특질은 분명히 있는데 그것을 사과해야 할꺼요?
[청아] [오후 2:36] 이것은 이념보다 현실에 더 가깝다 보기엔 무리가 있을까요?
[답변]
“호르몬에 의한 여성이 가지는 특질”이라 표현해주신 것은 제 생각에 이념형에 해당합니다. 호르몬의 많고 적음에 따라 특징의 발현도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이념형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그 표현이 현실이라 주장하려면, ‘이 정도면 여성이다!’라고 주장할 만한 호르몬의 수치를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요? 아무리 전문가라도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므로 이념형은 현실이 아니기에, 그러한 이념형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나 속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표현을 조심해야 합니다. 의도치 않은 공격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성만이 새로운 인간을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성은 결코 그 능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건 자연적 성별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바꿀 수 없고 순전히 운으로만 결정됩니다.
[청아] [오후 2:47] 헉 근데 호르몬의 수치에 따라 여유증이라던지, 여성호르몬 예시로 에스트로겐이 꽤나 많다던지? 어떤 수치가 이미 정해져 있어 병원에서 그 수치를 가지고 판단하는것으로 아는데 이것또한 불가할까요?
의학이 어떻게 학문으로 기능한다 보시나요? 의학에서 제시하는 수치는 모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치를 제시합니다. 인체는 복잡계이므로 어떤 특정한 수치 하나로 특정한 결과가 완벽히 결정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인체는 내외에 무수히 많은 미생물과 세균, 단백질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기능합니다.
예컨대 에스트로겐 수치가 기준의 100%를 만족하면 반드시 여성일까요? 99%는요? 98, 97, … 이렇게 넘어가다보면 끝도 없습니다. 이걸 미끄러운 경사(slippery slope)라 부릅니다. 머리카락 한 가닥’만’ 있는 사람은 분명 대머리인데, 그렇다면 머리카락이 수천만 가닥 있는 사람도 대머리가 되거든요.
인간에 관한 문제에서 수로 결정되는 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환자] [오후 2:55] 유의미한 통계적 연관성이 있다면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는게 맞다고 봅니다.
[환자] [오후 2:55] 흑백으로 OX여부 결정이냐가 아닌 상관관계가 어느정도 있느냐는 참고할수 있다고 봅니다
[답변]
네, 맞습니다. 상관관계의 존재는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점은 꼭 지적해야 합니다. 상관관계는 곧바로 인과관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논리적 인과관계처럼 “특정한 결론이 도출되면 ‘반드시’ 그러한 원인이 있다”는 식으로 추론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태도가 바로 이념형이 현실을 전도하는 이데올로기를 이끕니다.
[환자] [오후 2:58] 담배는 몸에 해롭다
[환자] [오후 2:58] 인과 인정됩니까
[답변]
논리적 인과는 인정되지 않지요. 방사선을 쬐도 암이 발병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WHO에서 발암물질이라 규정한 것도 통계적 상관관계에 근거한 것이지, 논리적 인과까지 근거하지는 않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논리적 인과는 순전히 내용 없는 형식 이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학은 무지와 함께] [오후 3:00] 보통 한가지의 값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몇가지 주요지표를 상정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수로 인과관계의 가능성을 통계적으로 판단해보는 부분에서는 의학을 어느정도 인정하는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수치로 측정하는 활동은 주로 원인을 파악하는 과정이 되는걸로 저는 이해하고 있거든요.
[철학은 무지와 함께] [오후 3:00] (의학 관련 내용만 말씀드리는거에용)
[답변]
맞습니다~ 의학은 논리적 인과가 아니라, 통계적 상관관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의사 개인의 경험을 중시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고요.
[김츄르] [오후 3:01] 의학이 의사 개인의 경험을 중시하나요?
[김츄르] [오후 3:02] 한의학이면 모르겠지만 현대 양방 의학은 연구 데이터 중심 아닌가요..?
[철학은 무지와 함께] [오후 3:03] 의학은 보고된 다수의 사례를 학습한 의사가, 의사 개인의 경험을 포함하여 판단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사실상은 데이터 중심에 가깝습니다
[김츄르] [오후 3:05] 여기서 주장하시는 게 그래서 의학은 학문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라는 것인가요? 아렌트 님께서 생각하시는 학문의 정의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네요.
[답변]
외과 교육에서 의사 개인의 술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연구 데이터 역시 의료현장에서 활동하는 의사 개개인의 판단과 보고로 구성됩니다.
여기서 그 데이터는 결코 논리적 인과를 형성한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다수의 사례가 보고됐다”는 통계적 상관으로 보아야 합니다.
[김츄르] [오후 3:07] 그건 저도 아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그건 전공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인데 “의학은 개인의 경헌을 중시한다” 라고 단정할 수가 있는가 싶은 거예요
[답변]
당신이 모른다고 말씀드린 적 없고요, 계속해서 흑백논리를 적용하시기 때문에 지적한 것입니다. ‘개인의 경험을 중시한다’는 주장이 ‘통계적 데이터를 경시한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나요?
논리학과 형이상학 등을 제외한 모든 학문은 경험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통계적 상관 위에 서있습니다. 경험과 결부되지 않은 학문은 논리적 인과 위에 서있습니다.
[김츄르] [오후 3:11] 개인의 경험을 중시하면 그 개인의 경험이 통계적 데이터와 반대될 때, 그럼 이 둘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나요? 개인의 경험을 “중시”한다면요.
[답변]
통계적 상관의 요소가 되는 개별 사례가 곧 개인의 경험이라는 점을 과소평가하시는 듯합니다.
개인의 경험이 통계적 데이터와 반대될 때에는, 의사 본인의 판단에 따라 재검을 하거나 진단을 내려 학계에 보고하면 되지 않습니까?
무언가를 중시한다는 것은, 그밖의 것을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지요. 이 점이 제가 지적하는 흑백논리라는 겁니다. 세상은 손쉽게 판단할 수 있는 부분들로 구성된 게 아니라, 수많은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연속체니까요.
[김츄르] [오후 3:18] 단지 “개인의 경험”이라고 할 때히 그 경험과 통계적 데이터를 이루는 연구를 통한 경험적 데이터는 좀 다르다고 봅니다.
[답변]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츄르 님이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셨는지 궁금합니다. ‘개인의 경험’과 ‘통계적 데이터’는 어떻게 다르다고 보시나요?
[김츄르] [오후 3:23] 의학은 경험과학이고 따라서 논리적 인과관계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경험적 연구를 통한 통계적 상관관계를 기초로 한 것이라고 저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얘기할 때 그런 통계를 이루는 경험적 사례를 “개인적 경험”이라는 표현을 잘 쓰진 않는다고 봅니다.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하면 그 뉘앙스가 그냥 한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그로부터 가지는 주관적 의견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라, 저는 그게 서로 연결이 되나 싶었던 겁니다.
[답변]
네, 옳게 지적하셨습니다. 개인적 경험을 ‘독단적 경험’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겁니다. 부분이 전체를 전제하는 것처럼, 개인은 공동체를 전제하는 한에서 기능하니까요. 어떤 개인도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독립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사의 경험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판단 기준을 학계라는 공동체에서 빌려오고 다시 학계에 보고해 공동체를 변동시키는 역동적인 과정 안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가설도 결국에는 이념형입니다. 히포크라테스의 4체엑설에 맞추어 수천 년동안 인체를 해석해온 역사는 나름의 학문적 의의가 있어도, 결코 진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에테르도 한 때에는 진리로 보였고, 플로지스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죠. 앞으로 또 어떤 것들이 진리’였던 것’으로 평가될까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들이 그 반증가능성 앞에 벌거벗고 있는 것입니다.
[솜늄] [오후 3:15] 전 논리적 인과랑 통계적 상관관계를 구분하는 법부터 이상해 보이네요. 후자가 전자를 파악하기 위한 한 방법이라고 보는게 맞지 않을지
[솜늄] [오후 3:15] 용어선택을 뭔가 잘못 한게 아닐까 합니다
[답변]
논리적 인과는 반증 가능성이 전무한 순수한 상태입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그런 멸균상태가 가능하다 보시나요?
이러한 구분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부패’ 이론에서 가져왔습니다.
[솜늄] [오후 3:22] 통계를 해석하려면 그에 맞는 이론을 만들어야죠. 이 논리적 구축물 역시 경험적 데이터로 반증가능한 것이고
그렇다면 (‘가설’이라 부르는) 그 ‘논리적 구축물’은 논리적 참인가요, 그렇지 않은가요?
가설은 이론이 아니지요. 인간의 세계에서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 말고 진리인 명제가 있나요? 가설은 아무리 여러 증거로 입증되더라도 잠정적인 진리로 겸손하게 스스로를 유보해야 합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니까요.
[솜늄] [오후 3:34] 요지는 논리적이란 술어가 그것이 부여된 것이면 바로 반증불가능하다고 좁히기 어렵도록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네이밍이 잘못됐단 것입니다
무슨 의도인진 알겠는데 보통 논리적이란 표현을 그렇게 쓰지 않는 것 같아요
통계적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결국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위함이고
인과란 원래 논리적으로 흐르는 것이라 결국 통계적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목적이 논리적 인과를 파악하려는 것이죠
[답변]
논리적 인과와 통계적 상관의 구분틀은 옳습니다. ‘논리적’이라는 표현에 반증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빼면 무엇이 남습니까? ‘개연적’인 것이 ‘논리적’인가요? 그러면 소설의 사건들은 모두 논리적 참이라고 보아야 하나요? 제가 보기에는 솜늄 님께서 ‘논리적’이라는 표현을 너무 포괄적으로 오해한 것 같습니다.
‘논리적’이라는 표현이 ‘논리학에서 채택하는 절차를 따랐다’는 의미라면, 이해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흄의 인과율 부정은 헛수고가 될 테니까요. 논리적 인과라는 건 반증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해야 합니다. 따라서 의사의 진단은 개연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의학이 논리적 인과를 담지한다고 전제하는 경우, 의사의 진단은 결코 틀릴 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솜늄] [오후 3:35] 가설 이론 얘기는 왜 나온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통계를 해석”하기 위한 “이론”이자 “논리적 구축물”을 가설이라 부릅니다.
[솜늄] [오후 4:07] 이게 너무 첨 듣는 얘기라요. 어디서 나온 말인가요. 가설과 이론의 차이를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습니다
[답변]
네, 어원적 해석이기 때문에 어떤 책을 봐도 다 다른 말로 비슷하게 설명됐을 겁니다.
이론은 theory, 가설은 hypothesis입니다. theory는 관조한다는 뜻의 θέασθαι에서 왔습니다. 여기서 관조의 대상은 현상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것인 νοητόν이고요. 플라톤의 가지계/현상계 구분틀과 연관됩니다. 가지계는 논리와 진리의 세계입니다. 제가 ‘논리적’이라는 단어에 반증 불가능성을 계속해서 결부하는 이유입니다.
반면, 가설은 아래에ὑπό 둔다τιθέναι는 말에서 왔습니다. 임시로 기초를 설정했다는 뜻이고, 언제나 반증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런 입체적인 차원을 이해하고 계신 게 아니라면 “엉뚱하다”는 표현을 삼가주세요.
다음날.
감사합니다.
1.먼저, 페미니즘과 관련한 부분에서 제 이해가 맞는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념형을 포함하는 발언을 사실 기술적 진술로 해석해서도, 그렇게 사용해서도 안 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저 나는 내가 경험한 바 여성들에게서 이러한 두드러지는 특징을 추출할 수 있었고,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자 한다는 정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어떤 일반적 속성이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엄격한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2.이 문제는 의학을 포함한 경험 세계에 대한 탐구 모두에 연관됩니다. 하지만 먼저, 논리적 인과성과 학문, 진리간 관계를 정확히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학문을 이론 체계라고 본다면, 학문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으로, 논리적 엄밀함 (논리적 인과성, 논리적 필연성 등)을 담지해야 합니다. 즉, 어떤 학문이 인과성을 주장한다면 그 인과성은 필시 논리적 인과성이라고 할 수 있을 기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3.여기서 의학에 대한 지적이 성립합니다. 의학은 상관 관계에 의존하고 있고, 그것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두루뭉술한 인과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학문이 주장해야 할 논리적 인과성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므로 학문이 아닙니다.
4.하지만 의학이 학문이 아니라는 비판은 겉보기와는 달리 의학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경험적 탐구 전체의 본성에 관한 사실적 주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경험적 탐구 전체가 논리적 인과성을 결여 내지 그것과 무관하기 때문에, 의학이 그러하다는 진술은 절대 의학에 대한 폄훼가 아닙니다. 의학을 포함한 경험적 탐구 전체가 그러하고, 논리적 원리에 관한 탐구가 아니라 우리가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한 탐구가 그러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탐구 중 의학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5.이 진술의 한 가지 의의는, 경험 탐구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를 쇄신할 이유를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경험적 탐구는 논리적 인과성을 담지할 수 없으므로 마치 논리적 인과성을 담지한 학문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대할 필요도, 그럴 근거도 없습니다.
6.하지만 이 의의의 뚜렷한 한계는, 과정은 참신하고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그 결론이 지금 시점에서는 너무나 진부하다는 점입니다. 과학에 대한 중대한 지적은 아니라는 말이죠. 과학이 경험 세계 (가시계, 가사계, 생성소멸운동하는 세계) 에 대한 탐구 사이에서 압도적 지위에 있는 것은 그것이 논리적 인과성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개연적 주장에 머물지라도 경험 세계에 대한 여타 접근들과 구별되는 설명력과 정합성을 갖추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논리학이나 형이상학을 과학과 구분하는 문제보다, 과학과 경험 세계에 접근하는 과학 아닌 방법들의 구별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7.아렌트님의 진리론에서 진리 언명의 의미는 축소주의적 진리론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진리다”라는 언명은 “나는 이 주장이-이론이 진리라고 생각한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거죠. 하지만 이 경우 문제는, 아직도 이 때 진리라는 개념이 어떤 의미인지 해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때 진리 언명의 의미를, ‘발화자가 그 말을 천고불변의 사실이라고 믿음’이라고 규정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합니다. 사실과 믿음 개념 모두 보다 깊은 층위의 진리 개념을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8.아렌트님의 진리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설을 세워봤습니다. 첫 번째는, 논리적 필연성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즉 어떤 사실이 진리라는 말은 “그럴 수밖에 없고 그러지 않을 수 없음.”의 의미라는 거죠. 하지만 이 역시 “그 말이 참일 수밖에 없고, 참이지 않을 수 없음.”과 동일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역시 참의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9.두 번째 가설은, 형이상학적 참이란 “자신의 믿음 체계에 정합적으로 부합함”의 의미가 아니냐는 겁니다. 하지만 이 역시 강한 반론에 부딪힙니다. 믿음이라는 개념부터가 그러하듯, 자신의 믿음 체계에 부합하는 것을 진리로 여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믿음 체계가 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이 역시 또 다른 층위의 참 개념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0.김오지님의 반론은 절반은 유효하고 절반은 불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의 의미에 대한 이견은 아주 불필요 했습니다. 그저 아렌트님이 사용하는 이론은 어떤 것을 가리키고 어떠한 성질을 지닌다 정도로 알아듣고 본론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김오지님의 모든 반론이 핵심을 비껴나갔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아렌트님은 타인과 논박을 통해 내가 내 이론을 수정하거나 폐기하거나, 상대가 내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진리라고 여기는 이론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는, 이 상황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서는 진리론이 의지하는 참 (진리) 개념을 소명해야 합니다. 어떤 발화된 이론이 누군가에게 수용된다는 것의 의미와, 부정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소명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 누군가와 대화를 통해 내가 기존에 지니고 있던 이론을 폐기하고 상대의 이론을 수용하거나, 자기 이론을 수정할 때 이 변화의 의미는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들 사례 모두, 대화를 통해 자신의 기존 이론이 진리에 걸맞거나 걸맞지 않음을 판단하고, 그 판단 결과에 따라 이론을 수정-폐기하거나 유지-발전시킵니다. 논박의 기준에는 언제나 진리-참 개념이 있는 걸로 보입니다. 김오지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고 생각합니다.
[답변]
와, 굉장히 깔끔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1부터 5까지는 모두 제 생각과 동일합니다.
6은 좋은 지적입니다만, 학자 수준과 대중 수준을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진부한 문제 제기가 계속되는 이유는 이런 문제 제기가 진부해질만큼 대중이 과학의 진리성을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신적 지위를 가진 패러다임은 기존의 철학자들이 그토록 분투했음에도 아직 지배적이라고 저는 평가합니다.
7부터 9까지는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특히 7에서 사실과 믿음은 진리를 전제한다는 주장에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이때 이 진리가 전달될 수 없음을 주장합니다. 모든 전달은 의견의 형태를 띠므로 반증 가능성에 열려 있습니다. 진리는 개인의 믿음에서만 진리이며, 전달을 통해 공동의 믿음으로 확장하는 순간 준-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개인의 믿음인 한에서는 모든 논리적 필연성이 오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오류냐 반증이냐의 양자택일에 놓인 것이지요. 8에서 제안하신 해석법은, 논리적 필연성이 개인 수준에서는 언제나 오류 앞에 열려 있다는 한계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논리학도 어쨌거나 학계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학문인 한에서 의견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마찬가지로 9에서 지적하신 형이상학도 사적인 차원과 공적인 차원을 나눠볼 수 있습니다. 내게 보이는 것은 내게 늘 참입니다만 오류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사물의 존재는 공적 의견을 통해서만 그 존재성을 획득합니다. 여기서 공사는 타인의 존재 유무로 나뉩니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타인이란 그 자체로 반증 가능성입니다.
그러니 10에서 말씀하신 그분의 문제제기가 절반은 유효한 것입니다. 그분과의 논쟁에서 제가 계속해서 진리의 과정적 속성을 주장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사적 진리와 공적 진리의 구분틀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있다”는 마무리 발언에서 이 점은 명백해집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의 믿음체계는 공적 의사소통으로 언제나 변화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물론, 개인의 믿음체계라는 사적 진리 그 자체는 결코 그대로 전달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상은 의견이라는 왜곡을 거쳐야만 공론장에 등장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사적 진리를 수정하는 작업은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리에 걸맞는다”는 말은 플라톤류의 무한하고 늘 참인 이념형을 전제할 때에나 사용할 수 있다 봅니다. 저는 그런 이념형을 진리의 수준으로 대우하는 건 과분하다 봅니다. 이념형은 의사소통을 위한 공통감각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철학에 토대라 할 것은 그러한 진리가 없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모든 의견은 반증 가능하다. 이 정도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