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들 2023. 8. 16.

(테세우스의 배 문제에 따라 과거의 일본제국과 현재 일본이 다르니 윤석열의 광복절 연설이 타당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사유와 행동] [오전 8:13] 저는 뭐 나쁘지 않은거같은데
언제까지 반일감정 팔아먹을런지 ㅉㅉ
네 저는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간 과거니까 잊어야죠

[사유와 행동] [오전 8:16] 광복절이라서 더 의미있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과거는 잊고 앞으로 나아가자라는 의미를 담을수도있는거죠
반일감정이 아니라면 문제될게 없다고 봅니다

[사유와 행동] [오전 8:46] 태세우스배의 역설 모르시나요?
아직까지도 철학계에서 논의되는 화두가 이방에선 개논리가 되어버리네요

[답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분이네요. 테세우스의 배는 물론 철학적으로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개념만 가져다 쓴다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지요. 생각이 현명해야 합니다.

테세우스의 배는 흐름과 이름의 긴장관계를 나타내는 사례입니다. 물질이 계속해서 바뀌어도, 우리 정신은 변함없이 그 배를 보며 테세우스를 떠올리니까요. 물질의 끝없는 변화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관을, 영원히 변치 않는 이름은 파르메니데스의 세계관을 상징합니다. 이런 귀한 개념이 고작 일본제국의 만행을 옹호하는 데 사용되다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변화하는 현재뿐입니다. 그의 세상에는 순간의 쾌락이나 고통만 존재할 뿐, 원한이나 카타르시스, 정의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원함은 사유의 산물인데, ‘사유와 행동’이라는 이름을 이마에 써붙이며 지껄이는 당신에게는, 그런 영원함이 전무하고 다만 수많은 파편으로 흩어져 있네요. 천박합니다.

논의의 시작은 당신의 이 발언이었습니다.
“언제까지 반일감정 팔아먹를런지 ㅉㅉ”
그러니까, 테세우스의 배를 들먹이던 목적은 결국 (지금 우리에게 있는지도 의문스러운) 반일감정에 비판이라는 것이지요.

일본의 과거 만행을 옹호하는 당신의 논리는 평면적이고 단순합니다. 그것은 수십년 전 일본제국이 저지른 사건이지 현재 일본인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런 입장은 “집단과 개인을 구분하지 못한다”며 상대방을 비판하는 점으로 명백해집니다.

당신의 말이 성립하려면, 현재 일본인이 과거 일본제국과 단절됐다고 일본인 스스로 인정하거나 주변국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인 스스로도 과거 만행에 대해 주변국에 사과한 바 없고 단지 1965년 우리나라에 독립축하금을 주었을 뿐입니다. 동아시아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현재 일본인들이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일본제국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여깁니다.

당신이 괘씸한 지점은, 선택적으로 과거의 의미를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지나간 과거니까 잊어야죠”라던 당신은 외려, 우리나라 우두머리가 무려 광복절에 일본의 만행을 지적하지 않고 포용하는 태도를 취하자 “광복절이라서 더 의미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고 주장합니다. 당신에게 과거는 유리할 때 있고, 불리할 때 없는 콘돔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몇몇 사람들의 부모가 수십년 전에 사용했다면 참 좋았을 물건인데, 안타까울 뿐이지요.

하지만 과거는 그런 물건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유할 줄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 유불리를 떠나 존재하는 것이 바로 과거입니다. 그러니 분노와 부정의감은 사유하는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불이익에만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당신같은 부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감정이 바로 우리 민족의 ‘한’이라는 감정입니다. 당신들이 하는 반응은 그저 포식자에 맞서 스컹크가 내뿜는 가스 같은 것들이지요. 하지만 스컹크도 과거의 사례로 포식자의 생김새를 배운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당신이 더욱 괘씸한 것은, 당신이 자기 입에서 흘러나온 고약한 내용을 외면하고 사람들의 과격한 표현만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성적이고 고결한 태도로 천박한 말을 쏟아내면 이성적이고 고결한 말이 된다고 여기는 걸까요? 아무리 금항아리에 똥을 담고 겉을 닦아도, 가죽부대에 대충 담긴 포도주만 못할 겁니다.


[사유와 행동] [오전 11:25] 동일자의 지옥에선 타자와 대타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토포스와 아토포스로도 구분될 수 없습니다 당위성을 강제 당하는 규율 사회와는 다르게 성과 사회(신자유주의)는 타자가 대타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닌, 타자가 타자를 착취하는 형태의 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즉, 스스로가 스스로를 착취하는거죠 이것이 미셸 푸코가 스스로의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고 지적했던 겁니다 이것을 태세우스의 배라는 관점으로 옮겨온다면 과연 지금의 일본이 스스로의 복종적 주체이냐, 다시 말해서 과거의 일본(타자)과 지금의 일본(대타자)로 구분될 수 있냐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는 거죠

[사유와 행동] [오전 11:25] 그리고 이건 새로운 논리가 아니고 한병철이나 미셸푸코가 똑같이 사용했던 논리입니다 ㅋㅋ

[사유와 행동] [오전 11:26] 이런 로직이 엉터리라고 말하는 여러분들의 식견에 무릎을 칠수밖에 없군요 호호

[답변]

제가 보기에… 당신은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잘못 읽었습니다. 저도 아주 짧게 원문으로 읽었지만, 도무지 당신의 주장은 한병철과 합치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1. 토포스와 아토포스의 개념쌍 구분에 실패했습니다.
토포스는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개념입니다. 장소는 모종의 경계로 인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경계 안의 것은 동일한 것, 밖의 것은 다른 것이 되지요.

그러나 토포스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인해 상실됩니다. 한계는 모종의 불가능성이 전제되어야만 나타나는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불가능성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 즉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이 오히려 모든 것을 동일한 것으로 평탄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울이 바로 여기서 오는 감정이지요. 자본주의에서 소비자가 만물을 소비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나, 신자유주의에서 성과에 집착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2. 한병철의 신자유주의 비판을 잘못 읽었습니다.
특히, 한병철은 성과에 주목하는데, 이 성과가 바로 죽음이 두려워 노예의 삶을 자처하는 삶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벌거벗은 삶이 바로 이 개념이고, 포르노와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사랑은 그러한 구분을 뛰어넘는 아토포스적 경험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으로 자아와 타자는 동일성의 한계를 넘어서게 됩니다. 그럼에도 사랑은 모종의 토포스를 전제합니다. 사랑은 위대한 성과를 이룬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자성의 부정성이 사랑 경험의 구성이다”라는 문구가 바로 이 뜻을 함의합니다. (원문으로 보시면 더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한병철은 푸코의 신자유주의 옹호를 비판합니다. 성행위가 사랑의 목적이 아닌 것처럼, 성과는 행위의 목적이 아니니까요. 한병철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구성원인 경제적 인간(Homo oeconomicus)이 스스로를 착취하며 자유롭다 여긴다며 비판합니다.

하지만 한병철은 무한한 자유의 사회보다 모종의 불가능성을 전제한 사회에서 서로의 실패를 보듬어주는 사회가 더 낫다고 보는 듯합니다. 특히, 한병철은 “사랑이 사유를 이끈다”고 주장합니다. “에로스(사랑)는 튀모스(감정, 분노)를 아름다운 행위로 이끈다”고 주장하는 점이 한병철이 푸코와 갈라서는 지점입니다.

3. 한병철의 논리대로라면 일본은 그런 식으로 과거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한병철은 “그러나 사랑이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를 표상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호메로스 일리아스에서 디오메데스와 글라우코스가 서로 다른 가치의 무구를 교환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가치가 다른 것도 교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한병철의 사랑이 성립하려면 교환가치가 달라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서로 알면서도, 그러한 불가능성을 뛰어넘는 종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한병철이 “사랑에는 모종의 종합적인 것(somthing universal)이 기거한다”고 주장하지요.

자, 한병철의 이러한 생각을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놓고 봅시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피해자-가해자 관계로 뼈아픈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이에서는 어떤 우정도 일어날 수 없을 겁니다. 여기에서 이 과거사로 인한 관계의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사과해서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만드느냐(한병철), 과거가 어떻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신자유주의)을 견지하느냐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은 정확히, 한병철이 비판한 신자유주의적 입장에 서있고요.

제 말이 틀렸나요?


[12:51] 저는 @사유와 행동 님의 언행으로 분노했습니다. 증오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고요.

분노는 모종의 질서와 배분을 전제합니다. 질서에 어긋나 과분한 보상을 받은 자를 보며 품는 것이 분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분노는 분노의 대상인 그가, 내가 이 분노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길 원합니다. 질서에 순응해 과한 보상을 반납하고 사과하기를 원하지요.

반면, 증오는 질서나 배분과 관계없이, 단지 그가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제가 분노했다는 사실을 깨우치려 들지도 않아요. 나치의 유대인 학살. 그게 증오입니다.

[오후 12:59] 이제는 정말 증오의 수준으로 분노가 커져가고 있습니다.


(인문학이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않아 문제라는 유시민의 지적에 대하여)
https://youtube.com/shorts/259cTzBPzX0?feature=share

흥미로운 지점이네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는 테크메리온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완전한 증거라는 뜻인데,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진리와 정치>에서도 잠깐 나오는 개념입니다. (물론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요)

아렌트에게 정치는 무한한 반박 가능성에서 시작됩니다. 실제로 어떤 사실도 반박이 가능하고요. (바이든-날리면 사태를 떠올리세요) 그러니 테크메리온을 얻으려는 학자들의 노력을 일컬어 “진리의 폭정”이라며 비판합니다.

영상을 보니 유시민은 테크메리온이 없어 인문학이 공허해진다는 논조로 주장하는 듯하군요. 그러면 테크메리온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액체와 고체 사이의 경계를 묻는 자신의 예시가 그대로 본인에게 적용된다 봅니다.

[철학적하모니/온건자유] [오후 2:05] 이런 관점으론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네요. 역시 깊으세요. 다만 유시민이 말하는 definition을 테크메리온으로 볼건지 하나의 약속과 합의체계로 이해할지에 대해선 같이 생각해보고 싶네요 ㅎㅎ

[답변]

공리를 의미하는 axiom의 어원은 가치있다는 뜻의 ἄξιος입니다. 모든 학문적 기초를 이루는 약속들은, 누군가의 가치판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ㅎㅎ definition도 아마 여기에 해당할 겁니다. 경계finis를 누가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테니까요. (여기에서 한병철의 토포스 이론이 떠오르네요~)

테크메리온은 그러한 경계를 넘어선 어떤 경계일 것입니다. 예컨대, 부동의 원동자가 존재”해야만” 한다든가, 인간은 죽는다 따위의 주장들이요.

[철학적하모니/온건자유] [오후 2:18] 그렇죠 ㅎㅎ 엑시움, 즉 공리는 “증명할 필요가 없는 명제”라고 할 정도로 자명한 것을 말하니까요. 형법에서도 beyond reasonable doubt(합리적 의심을 넘어선 명백한 증거)를 말하는걸보면 “(데카르트 어법에 따르면) 명석판명함”을 추구하는 인간만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싶네요
ㅎㅎ
근데 유시민이 말한 부분은 결론에 대한 다양성이 “확실하지 않은것”으로만 볼 수 있냐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공리나 정리를 “전제”하고 그에 기반해서 어떤 결론을 낸다고 가정할 때, 내가 어떤 결론을 내기위해 어떤 공리나 정리를 전제로할지부터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인문학 자체가 정답을 제시하는 학문이 아니라 논지전개과정에 초점을 맞추는건 맞지만, 마치 학문 속성 자체부터 나름의 진리치를 전제하지 않는것처럼 말하는건 확실히 오류가 아닐까싶어요

[사이다꿀잼] [오후 2:22] 근데 그 공리라는건 개인에게 있어서는 상대적인부분이자나요. 이런부분은 사회에서의 선택문제를 직면할때 사용되는것이니.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하는것이 주가되는 학문이 있고 아닌 학문도 있다고 봐요

↘ [철학적하모니/온건자유] [오후 2:29] 그 공리나 정리의 운용방식의 차이인거죠. 학문은 각기 추구하는 목적성이 있고 그 목적성에 따라 방법론과 결론이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이 정의를 엄밀히 하지않아서 생기는 문제는 아니죠

[글로] [오후 2:23] 제가 보기엔 옆에 계신분이 과학자인데 인문학의 정의를 말할려는 거보단 인문학도 과학을 접목해서 더 정확한 정의를 해야한다라는 의미로 보여지네요. 가령 유시민이 말한 양송이 스프에서 어디까지 액체로 볼 것인가는 스프만 액체로 볼 것인가 아니면 양송이도 수분이 많이니 액체로 볼 것인가에서 인문학적 철학적으로 볼 때 각각 생각하는 정의가 다를 수 있으니 이런 지점에서는 과학의 힘을 빌리자 뭐 이런 취지인 거 같군요

↘ [철학적하모니/온건자유] [오후 2:28] 취지는 이해할 수 있어요. “소통당사자들 간에 용어합의를 명확하게 하자”는 거지요. 다만 인문학이 정확한 정의를 함에 부족하다는 의도의 말은 상당히 부적절하다는 입장입니다. 정치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이 정치철학이고, 삶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이 도덕철학입니다. 오랜 기간동안 어떻게 정의해야할지 논의해왔으나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정답”에 해당하는 무언가가 없는거죠. 이것은 학문의 목적과 성격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지, 인문학이 정의를 엄밀히 하지않는단 근거는 성립되지 않죠

[사이다꿀잼] [오후 2:24] 테크메리온에 해당되는 것이 없는 인문학은 사실 설득력이 떨어질수 있다 이런의미아닐까요?

↘ [철학적하모니/온건자유] [오후 2:31] 테크메리온(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데카르트의 본유관념, 칸트의 이성, 헤겔의 절대정신 등)이 실존하느냐? 또는 어떤 형태로 존재하느냐? 고정된 것이냐 변화하는 것이냐? 등등을 설명하는 것부터 철학의 시작이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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