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고 사퇴하기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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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친 공직자가 “책임지고 사퇴하겠다”고 하면 “똥 싸질러 치우지도 않고 내뺀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리석은 소리다. 사퇴는 공직자가 책임지는 첫 번째 행위다. 첫째는 그것이 내 잘못이라 인정하는 행위요, 둘째는 그러므로 나는 여기 더는 있으면 안 될 놈이라고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격 없는 놈이 자리를 지키는 게 더 큰 문제다. 어떤 잘못을 했는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합법적으로’ 방해할 테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기 잘못을 축소시키려 든다. 우리 법에서 범죄자가 스스로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는 범죄가 아니다. 증거인멸죄도 타인의 증거인멸을 도운 자에게만 해당된다. 그러니 공직자가 사고를 쳤다면 한시라도 빨리 권한을 중지해야 한다.

평등만큼 중요한 차등

공직자의 책임과 사퇴의 관계를 말하려면, 평등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문자 그대로 ‘평등하다’고 믿나? 그렇게 믿으면 순진한 거다. 대한민국은 합법적 차등을 인정하는 국가다. 대한민국이 평등하다는 말은 기본권이나 참정권처럼 헌법과 법률로 정한 일부 사안에 대해서만 타당한 이야기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니까. 우리 법체계에는 평등보다 차등을 규정한 조항이 더 많다.

여기서 잠깐. 차등과 차별은 다르다. 법으로 평등하게 하라고 정한 사안에 대해서까지 차등을 두면, 그때부터는 차별이다. 차등은 사회에 질서를 깃들게 한다. 질서 있는 사회야말로 정체(政體)다. 질서는 모종의 제한이고, 수직적 차등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세계에서 무한자는 악이다. 마치 데이트 코스를 수십 번 제안해도 “글쎄”만 반복하는 연인처럼.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어떤 질서도 용납지 않으려는, 머리에 꽃만 들어찬 이상주의자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말이다.

권리와 의무는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이 수직적 차등이다. 헌법에서부터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차등을 둔다. 국회 밖의 국민에게는 입법권이 없다는 말이다. 국민은 법안을 발의할 수 없고 단지 국회의원에게 “청원”할 뿐이다. 합법적인 차등 대우를 받는 사람은 그에 걸맞은 의무를 이행하고, 권리를 누린다. 법에 명시된 수많은 직위가, 수직적 차등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질서를 이룬다. 관료제라 부르는 차등의 피라미드는, 물론 사회의 전부라 해서는 안 되지만,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임에는 틀림없다.

공직자의 책임은 지위에서 온다

문제는 자리와 사람의 불일치이다. “책임지고 사퇴하라”는 구호가 등장하는 모든 사고에는 담당자의 판단미스가 있다. 모든 공직자가 자리에 걸맞게 처신했다면 사고는 나지 않을 것이다. 천재지변은 못 피하더라도, 적어도 인재는 피할 테다.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 높은 사람이 할 법한 결정을 하리라는 믿음이 그를 그 자리에 앉혔기 때문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우리 사회는 일단 사람을 앉히면 그에 맞게 인적 물적 인프라를 제공한다. ‘자, 멍석 깔았어,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좋은 세상을 만들어 봐!’ 책임은 여기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면? 어떤 행정조치로도 결코 회복할 수 없는 피해, 사망사고였다면? 담당자가 적절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면? 알고도 무마했다면? 내 탓 아니라며 면피에만 급급하다면?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의지도 없다면?

결자해지라는 가스라이팅

모든 피해에는 가해자가 있다. 설사 그 피해가 우연의 산물이어도 가해자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결부됐다면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공직자는 자기 소관에 책임을 져야 한다. 모든 공직자는 적어도 그 자리를 수락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용서받을 유일한 길은 피해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일이다. 그런데 형법은 처벌을 아주 좁게 제한한다. 가해에 엮여 들어간 공직자는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정치적으로 처벌해야 한다. 수직적 질서에서 배제해야 한다. 어떤 처벌로도 피해를 갚을 수 없는 범죄라면, 가해자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피해자가 스스로를 해칠 만큼 도탄에 빠졌다면, 공직자는 반드시 사퇴해야 한다. 사퇴하지 않는다면 쫓아내기라도 해야 한다.

사퇴보다 문제 해결이 먼저라고? 우리 이제 솔직해지자. 그건 인치주의다.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고. 결자해지만 외치는 사람은 사실 가스라이팅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쟤 아니면 안 돼.” 그럴 리가 있나? 그것도 일종의 신격화다. 우리 대한민국은 생각보다 더 질서잡힌 사회다. 문제 해결은 다른 사람이 해도 된다. 아니, 더 잘한다. 길 한복판에 똥 쌀 정신을 가진 놈이 자기 손으로 치울 정신은 있을까? 똥쟁이는 빨리 화장실로 보내 버려야 한다. 똥을 숨기겠답시고 더 흩뿌리기 전에.

추모와 죽음 방지라는 사퇴의 의미

사실 사퇴는 무력하다. “내 탓이오” 인정해도 죽은 가족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진다. 중요한 건 사퇴 이후다. “제발 다른 사람이 제 가족처럼 죽지 않게만 해주세요.” 수많은 유가족들이 비슷한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추모(매장)와 살인 금지는 인류의 본질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모를 방해하고 거듭 사람을 죽게 하면 그보다 모욕적인 일이 없다.

그래서 책임자의 사퇴가 중요하다. 사퇴는 재발방지를 위한 첫걸음이다. 내 임기 중에 이런 일이 났으니 물러나겠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사퇴는 이만저만한 뜻을 전하는 사과, 혹은 재발하지 않기를 기원하는 제사와 유사하다.

책임은 짐이다. 등에 지는 짐처럼 무거운 것이다. 관직에 오르려는 자, 관모의 무게를 견뎌라. 자리에서 물러나 견디는 체라도 하라. 사퇴 요구를 정치적이라 비난하는 자만큼 정치에 몰두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 자들에게는 정치라는 단어도 아깝다. 우리말에는 거짓말, 억지, 권모술수처럼 적확한 단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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