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이 설득하는 법을 아니? 잘 살면 된다 삶 자체가 증거가 된다 알아서 듣는다 기분 나빠도 배운다 앞뒤 안 가리고 끄덕인다 이 시대는 말의 인플레이션 위조지폐 같은 말을 쏟아내니 헐값이 되고 모두가 떠드는데 아무도 듣지 않는다 듣기 좋은 말만 앨범에 수집한다 앞뒤 안 가리고 끄덕인다 말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면서 표현의 시식코너를…
[월:] 2023 6월
옷
참 재미있지 옷이라는 게 지하철에 앉아 고개를 들면 마주선 중년남성의 사타구니와 내 입을 가로막고 있는 게 몇 겹의 옷이 전부라는 게 옷은 천이고 천은 실인데 얽히고설킨 몇 올의 실이 뜻밖의 구강성교라는 지옥에서 나를 건져올리다니 바지 속의 팬티 속의 피부 속의 세포막 속의 무엇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양파가 될 지도 몰라 그 속은 마리아나 해구보다 깊을 텐데…
탑
우리 있잖아 그때 말이야 우리가 무언가 쌓아가고 있었을 때 우리가 입술을 맞추고 있었을 때 말이야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우리는 그때 우리였지 나와 너로 흩어지기 전 그때 우리는 들숨과 날숨으로 조용한 숨결처럼 대화를 했잖아 이제는 고작 음파를 일으키면서 한숨처럼 소리쳐야 하잖아 외국어처럼 나는 empathy라는 말이 슬퍼 언제부터 나는 너를 느끼려면 네 안으로 들어가야만…
숙취
잔이 멈추고 무서운 숙취가 찾아오면 나는 이불에 갇혀 웅크리고 떤다 혼자 떤다 연탄가스 매캐하고 악을 쓰고 몸을 기울여야 겨우 들리는 술집에서 따닥 뚜껑을 딴 뒤 투명한 잔에 맑은 술 졸졸졸 창을 가린 허름한 시트지에는 푸른 초원에 웃는 소 일가족 건배, 건배, 건강이 최고야 펄떡이는 생선을 건져 눈 앞에서 대가리를 치고 배를 가르면 쏟아지는 내장 흥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