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록과 해석은 사물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록의 핵심은 사물의 견고함에 있다. 인간은 사물의 존재에서 질서를 찾는다.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나눔으로써, 이름을 붙임으로써 인간은 자연에 경계를 만든다.* 그러나 사물이 동일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이내 상해 모습이 변해버린다면, 인간은 그 사물에서 질서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든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의 흐름은 그 사물을 상하게 하고, 단지 사물마다 얼마나 그 흐름에 저항해내느냐가 달라질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시간은 무질서한 방향으로 흐른다’며 자연으로부터 시간을 분별해냈다. ΔS ≥ 0. 무질서의 질서다. 사물이 자연의 흐름에 맞서 동일함을 유지할 때, 인간은 시간의 변화에도 질서를 찾아낼 수 있다. 우리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금속으로 된 반지를 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죽은 뒤에 살이 썩어도 반지는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뼈가 남지만, 뼈는 살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볼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는 뼈, 그것이 금속이고 반지다.
기록의 중요한 특징은 기록이 만들어질 당시의 순간이 사물에 보존된다는 것이다. 기록을 마주한 인간은 기록할 당시의 순간을 상상한다. 물론 모든 기록된 사물은 기록되어 남겨진 순간부터 발견되어 해석되는 시점까지 자연의 흐름으로 인해 변형된다. 그러므로 해석자에게 기록자의 순간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순간이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물이 그 사물이 전하는 감각일 뿐이지 결코 그 사물 자체(Ding an sich)가 아닌 것과 같다. 모든 기록은 해석된 기록이지 결코 기록된 순간의 그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견고한 사물은 자연의 흐름에 저항함으로써 충실하게 그 순간을 보존한다. 오히려 해석자는 기록된 이후로 줄곧 사물을 침습하는 자연의 흐름을 의식할 때 기록의 순간을 더 잘 상상할 수 있다.
기록자는 해석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에게 말을 건네며 언제나 스스로 듣는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성량과 음정, 박자를 조절하고, 스스로 들을 만한 목소리가 나올 때 상대방도 들어주겠거니 생각하며 말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록자는 기록하는 순간마다 앞으로 기록할 것을 해석하면서 동시에 앞서 기록한 것을 해석한다. 종이에 글씨를 남기는 기본적인 작업에서도, 우리는 쓸 것과 쓴 것을 생각하며 나아간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해석자는 기록자이기도 하다. 듣는 행위는 그 자체로 스스로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건넸을 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따라할 수 없다면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해석한 것을 그대로 기록할 수 없는 사람은 그 기록을 해석할 수 없다.
사진 혁명은 기록자와 해석자를 분절했다. 사진(photograph)은 빛(φάος)을 기록하는 것(γραφή)이다. 사진이 발명되고부터 해석자는 기록자인 화가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기록자로서도, 자신의 해석이 야기할 수 있는 왜곡으로부터 벗어나게 됐다. 그러나 사진에서 기록자는 사물인 상자(καμάρα)일 뿐, 인간인 제작자(ποιητής)가 아니다. 제작에는 언제나 기억하기(μνᾶσθαι)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가는 기록할 순간을 기억해야 하지만, 사진가는 단지 암실(camera obscura)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방법만 기억할 뿐이다. 사진 혁명 이후 예술가에게는, 사건을 해석하며 기록한다는 작업의 특징이 사라지고, 노동의 수준으로 격하된 단순한 인화작업만이 남았다. 간편한 도구로 기록의 과정이 단축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어떤 순간을 기록할 것이냐 하는 고민과 세계로부터 시점(viewpoint)을 분리해내는 찍어내기(framing)만 있으면 예술인가? 그렇다면 어떤 사물을 부를 것이냐 하는 고민과 자연으로부터 그것을 분리해내는 이름붙이기(naming)만 있으면 존재가 되는 것인가? 뒤샹의 변기통은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진의 등장으로 사물(res)의 실제(real) 모습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지만, 세계의 현실성(reality)으로부터는 멀어졌다. 사진을 인화하는 장소가 암실에서 포토샵(photoshop)으로 옮겨가면서, 사진은 더 이상 기록 당시의 시간이 지운 한계에 갇히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포토샵에서는 이념적(ideal)인 것이 현실적인 것을 대체한다. 더욱 실제처럼 보이도록(ἰδεῖν) 생각(idea)되는 색과 형태가 실제 기록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는 회화나 조각에도 내재한 문제였다. 제작자의 손을 거친 이상 예술은 이상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의 아주 원초적인 경계에서, 인간은 말을 통해 자신의 질서를 동료 인간과 공유함으로써, 문화를 만든다. 경작된 토지(humus cultus)에서 비롯된 인간 문화(human culture)는, 함께(cum) 빵(panis)을 먹던 사람들(companio)이, 자연적인 땅(terra)을 농토(fundus)로 만들 때 설립됐다(fundare).
다시 바디 프로필로 돌아가 보자. 바디 프로필은 나의 몸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하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몸을 만드는 일도 포함된다. 포토그래퍼와 퍼스널 트레이너가 제휴해 몇 개월만에 바디 프로필을 만들어주는 상품이 나오는 이유다. 2014년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시작한 ‘완벽한 몸(perfect body)’ 캠페인의 연장선이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조각같은 몸’을 만들자는 취지다. 이상향을 향해 분투하라, 기록으로 남겨라, 우리가 도와줄 테니 돈을 내라는 구호다.

물론 아름다운 몸은 있다. ‘어떤 몸이든 당신은 아름답다’며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 역시 ‘앞으로 완벽한 몸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지금 추한 몸을 가진 사람들’에게 옷을 팔아먹으려는 마케팅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몸이든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인간이 정신을 갖고 있는 한 미추는 몸과 분리될 수 없다. 다만, 아름다운 몸은 피부 아래 쥐새끼들이 어디에 얼마나 위치했느냐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다. 몸은 행위가 누적된 것, 다시 말해 익숙해진 습관이 드러난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몸은 아름다운 행위의 역사를 보여준다. 만일 누군가 아름답지 않은 행위들이 누적되어 형성한 몸마저도 긍정한다면, 그 사람은 미추의 구분을 의도적으로 흩트리고 있는 것이다.

성형수술과 테스토스테론 주사는 에토스 없는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