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익은 일은 좀처럼 실수하지 않는다. 숙달과 실수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절제와 자제의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숙달은 절제와 유사하다. 절제하는 자(ὁ σώφρων)와 자제하는 자(ὁ ἐγκρατής)의 차이는 욕망(ἐπιθυμία)의 유무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마음 속에 불타는 것(θύειν)이다. 동요하는 것이다. 나무를 태우고 남은 재를 다시 나무로 돌릴 수 없는 것처럼, 실수하는 것이다. 실수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숙한 자는 의식적으로 실수를 피해야 한다. 자제는 실수할 가능성을 늘 내포하면서도 흔히 내면(ἐν)이라 일컫는 정신에 힘(κράτος)을 기울여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자제하는 자에게는 그 욕망이 언제나 들끓고 있지만, 절제하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욕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절제하는 자에게는 실수할 가능성이 없다.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행위와 관련된 지혜(φρόνησις)를 보존하고 있다(σῴζειν).
익숙해지기(ἔθειν)는 생각하지 않고도 일을 해내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 어떤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라도 인간은 익숙해질 수 있다. 한 번 익숙해진 작업은 마치 간단한 작업인 양 수행된다. 언어 역시 혀와 성대, 횡경막 등의 발성기관을 사용한 고도의 작업이다. 게다가 언어에는 몸뿐만 아니라 적당한 기표와 기의를 연결짓는 약속과 같은 고도의 정신작업도 포함된다. 그러나 제아무리 복잡한 언어라 할지라도 모국어는 큰 노력을 요하지 않는다. 어떤 외국어든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기울이면 익숙해질 수 있다.
몸은 익숙해진 대로 변형된다. 결정과 생명의 차이도 바로 이 몸의 유무에서 비롯된다. 결정은 어떠한 상황의 변화에도 계속해서 동일한 모습을 유지하지만, 생명은 상황의 변화에 알맞게 적절한 모습을 유지한다. 동일성과 적절성은 생물과 무생물을 가르는 유일한 차이점이다. 변화의 속도가 매우 느린 식물도 결국에는 햇빛의 방향이나 토지의 수분과 양분 분포에 맞게 모습을 바꾼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몸은 자신이 처한 조건에 익숙해진다. 그 대표적인 조건이 땅이다. 땅은 인간의 행위 없이도 인간을 조건짓는 세계이면서도, 경작과 같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크게 변화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인간성(humanitas)의 기원을 땅(humus)에서 찾거나 영토화(territorialization)를 주목한 일, 땅의 모양, 위도와 경도가 인간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모든 신들의 어머니를 흙의 신 가이아로 둔 것과 인간을 만들었다는 크리스트교의 신화는 이 지점에서 통한다. 고대의 네 가지 원소 물, 불, 바람, 흙 중에서 유일하게 변치 않는 모양을 가진 것은 흙뿐이다. 물을 추가해 모양을 빚거나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갖게 하는 것 역시 흙이다. 사는 대로 모양이 변하는 몸은 흙과 같다. 우리는 흙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순응과 같은 정신적 자살행위가 몸을 무생물과 다를 바 없이 만들지만, 이디오진크라지(ἴδιος-σύν-κρᾶσις)는 그러한 상황에서 물질화된 몸을 다시금 약동하는 생명으로 일깨우는 유일한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