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 프로필 전성시대 2

결정은 깨어지지만, 생명은 죽는다. 결정은 얼어 있지만, 생명은 동요한다. 결정은 순응하지만, 생명은 저항한다. 생명은 끊임없이 노동하면서 주변의 질서를 잡아먹는다. 끝없이 끊임없이 무질서로 해체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노동하는 생명은 질서를 부여잡는다.

노동의 시작은 정신이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최초의 경계에서 정신은 싹튼다. 정신이 깃든 신체는 먹을 수 있는 것을 삼킨다. 이미 먹고 남은 것을 몸 밖으로 뱉어낸다. 생명은 음식을 삼킴으로써 음식에 들어 있는 영양을 흡수한다. 영양은 물질일 뿐이지만, 정신의 분별을 거친 물질은 영양이 되어 몸을 이룬다.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의 가장 극단적인 구분은, 몸과 몸 밖의 것이다. 몸의 기준은 감각이다. 어린 아이는 손가락을 빤다. 손가락을 빠는 행위는 삼키는 것,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숙한 정신이 몸을 몸 아닌 것으로 분류한 데 따른 현상이다. 그러나 손가락을 삼키려는 아이는 손가락이 삼켜지고 있음을 느낀다. 삼켜지고 있다는 감각은 손가락이 몸임을 알게 한다. 몸을 삼키는 것은 정신을 삼키는 것과 같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정신은 입에서 손가락을 빼낸다.

몸은 최초의 도구다. 손으로 음식을 집어 입에 넣는 일, 입에 넣어 치아로 음식을 씹는 일 모두 삼키기 위해 수행하는 일련의 작업 과정이다. 어린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한 일들이 왜 작업으로 분류되어야 하는지 명백하다. 작업에는 기술이 개입된다. 작업을 얼마나 능숙하게 하느냐에 따라 기술의 정도는 달라진다. 어린 아기는 손을 능숙하게 쓰지 못한다. 애초에 목을 가누는 일, 두 발로 딛고 서는 일부터가 절묘한 기교에 해당한다. 익숙하지 않은 도구를 다룰 때 정신은 언제나 도구의 옳은 사용과 옳지 않은 사용을 의식하게 된다. 자전거를 처음 타던 때를 기억해보라. 그게 가물가물하다면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에 처음 발을 올리는 때를 떠올려보라. 모두 지금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있지만, 한때는 너무나 어렵게 여겼던 작업들이다. 언젠가 그러한 작업이 익숙해지면, 더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의식하지 않게 되고, 결국 자동반사적으로, 마치 정신이 결코 개입하지 않는 듯이 그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ἔτι εἰ μὲν ἐν τῶ̣ ἐπιθυμίας ἔχειν ἰσχυρὰς καὶ φαύλας ὁ ἐγκρατής, οὐκ ἔσται ὁ σώφρων ἐγκρατὴς οὐδ᾿ ὁ ἐγκρατὴς σώφρων·
더구나, 만약 자제하는 자가 강하고 나쁜 욕망을 갖는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절제하는 자는 자제하는 자가 될 수 없고, 자제하는 자는 절제하는 자가 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46a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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