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은 최종생산물을 남기고 종료되지만 노동은 삶 그 자체를 낳으며 무한히 반복될 뿐이다.
2020년대는 그야말로 바디 프로필 전성시대라 부를 만하다. 네이버 데이터랩 검색어트렌드와 구글트렌즈 검색어 비교를 살펴보면, 2016년부터 2023년 3월 현재까지 ‘웨이트 트레이닝’에 대한 관심은 일정하다고 볼 수 있다. ‘바디 프로필’을 검색한 사례는 미미한 수준이었으나 2020년을 기점으로 점차 증가하더니 2021년부터 2022년 사이에 웨이트 트레이닝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기도 했다. 2022년 들어 바디 프로필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고 있으나 수 년 전에 비하면 몇 배나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때 아닌 훈장질을 하려 드는 건 아니다. 바디 프로필은 그저 ‘보여주기’일 뿐인데 요즘의 웨이트 트레이닝은 바디 프로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보여주기를 염두에 두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웨이트 트레이닝에 집중해야 한다, 그게 ‘순수한 관심’이다…라는 식의 비판은 바디 프로필을 찍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주사하는 사람의 생각만큼이나 짧다. 요즘 바디 프로필을 주제로 게재된 신문 기사를 보면 죄다 이런 식이다. 요즘 사람들 바디 프로필 찍는 데 열 올린다, 바디 프로필 무리하게 찍다 건강 잃는다, 진짜 운동은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수준 낮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바디 프로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탐구해보는 기사가 이렇게나 없을까?
나는 사람들이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했으면 좋겠다.
생물에게 세상은 둘로 나뉜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나를 살리는 것과 나를 죽이는 것이 세상에 가득차 있다. 이것과 저것, 흑과 백, 욕망과 분노, 선과 악, 코나투스의 충돌, 에로스와 타나토스, 자유와 예속, 친구와 적… 모든 이분법은 단 하나의 근원을 갖는다. 생명이다. 생명은, 즉 호흡하는 모든 것은 곧 정신이다. 자연은 어떤 경계도 설정되지 않은 연속체다. 정신은 자연에 경계를 설정한다.
모든 생물은 노력한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의 것을 끊임없이 먹는다. 자신을 해치려 드는 것들을 공격한다. 자신이 설정한 경계에 따라서, 경계 안의 것들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경계 밖의 것들을 몰아낸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미생물의 삶을 보면 이 점은 명백하다. 삶과 죽음은 얇은 세포막을 유지하느냐 유지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이고, 이것이 저것의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것은 죽고 저것은 산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남기는 일, 성장하는 일, 유전자라는 단백질 덩어리들은 늘 그 일을 한다.
먹고 사는 일 뿐이랴. 운동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모든 생물은, 이곳과 저곳의 차이를 안다. 지능지수가 얼마가 됐든, 운동하는 모든 동물은 저곳이 이곳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안다. 식물도 뿌리를 내리며 끊임없이 미지의 저곳을 탐색한다.
반면에 무생물은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자연 그 자체인 무생물은 애초에 경계를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생물은 호흡하지 않아서 무생물이 아니라 경계를 설정하지 않아서 무생물이다. 자기복제하는 유전자나 반복된 배열의 결정이나 동일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현상은 비슷해보이지만, 경계를 설정하는 능력은 유전자에게만 허락된다는 점에서 둘은 아주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