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우주와 나는 연관이 꽤 깊다.
나는 로켓을 만드는 회사에서 잠깐 일했다. 내가 거기서 느낀 감정은 ‘경이’였다. 날마다 놀랐다. 처음에는 그 복잡함에 놀랐지만, 나중에는 그 아름다움에 놀랐다. 로켓 공학은 현대 과학기술의 결정체다. 신이 설계한 자연법칙의 아주 좁은 빈틈을, 로켓 기술자들은 파고든다. 운 좋게도 나는 회사의 맹아시절부터 합류해 로켓 기술자들 틈에 낀 유일한 ‘문과생’의 지위를 오랫동안 누렸다. 그곳에서 내가 느낀 인류의 모습은 ‘더 이상 지구에 예속되지 않은 우주적 존재’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학교에 돌아가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를 공부했다. 그런데 웬걸? 그녀의 주저 『인간의 조건』 서문은 ‘1957년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 사건’으로 시작한다. “인류는 지구에 영원히 예속되지 않을 것이다”라던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의 말도 인용되어 있다. 그 유명한 치올코프스키 로켓 방정식을 유도한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인공우주물체는 로켓 방정식 덕분에 우주에 갈 수 있다. 치올코프스키는 로켓을 쏘아 사람을 우주로 보낸다는 정신나간 소리를 과학의 언어로 번역한 위인이다.
아렌트는 치올코프스키를 보며 플라톤을 떠올렸다. 소크라테스가 독배 앞에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치올코프스키의 생각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여겼다. 죽음은 오히려 감옥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사건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에 나오는 말이다. 플라톤과 치올코프스키의 유일한 차이점은, 우주와 죽음을 결부시켰느냐, 분리시켰느냐뿐이다. 나는 철학 공부를 하며 로켓을 떠올렸다.
로켓은 나의 삶을 관통하는 여러 주제 중 하나다. 그 곁에 철학이 있고 사랑이 있다. 먼 훗날 누군가 나라는 사람을 기억하려면 로켓과 철학, 사랑이라는 씨줄로 이야기를 엮어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의 성공을 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이노스페이스에서 쏘아올린 한빛이라는 물건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녹아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었을까? 나도 덩달아 가슴벅차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리호 성공보다 더 기쁘다. 한빛의 발사 성공에 내가 기쁜 이유는 값싼 민족주의가 아니다. 나도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공역허가를 받겠다고 여기 저기 전화 돌리던 기억, 로켓 한 번 쏘겠다고 땅끝 해남 뻘밭에서 헤엄치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노스페이스도 그랬겠구나, 한빛도 그렇게 떴구나.
이제 시작이다. 호사다마라고, 성공의 순간에 불운은 찾아온다. 이제는 우주와 죽음이 완전히 결별했음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여주길 바란다.
이노스페이스 팀의 건강과 발전을 기원한다.
추신. 이제 우주는 명실공히 산업의 영역에 포섭됐다. 말 그대로 ‘밥 먹듯이’ 로켓을 쏘아 올리는 스페이스 엑스를 보며, 실패나 죽음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법학을 배우던 학부 시절 과제로 제출한 소논문에서, 우주관광산업이 러시안 룰렛 꼴을 면치 못하리고 비판한 적 있다. 우리가 러시안 룰렛을 산업으로 받아들일 수 없듯이, 유인우주선의 사망률이 너무 높아 우주관광산업은 법체계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생각은 틀린 듯하다. 거대한 행정기관이 개입하지 않아도, 로켓은 우주에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