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를 떠나며

정들었던 이수진 의원실을 떠납니다.
운 좋게도, 철학을 공부한 제가 국회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치열하게 일하고 많이 배웠습니다.

2022년 2월 7일에 입사해 이번 달 말일에 떠나니,
입사 이후 1년이 지나 퇴사하게 됐습니다.
짧고 굵게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했던 일을 간략히 되돌아봅니다.

  1. 행정부에 262건의 자료를 요구하고 201건의 자료를 받았습니다.
    그중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준비하기 위해 요구했던 예산안이 91건이어서, 특정한 문제의식을 갖고 요구했던 자료는 171건뿐입니다.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와 이태원 참사 때 대부분의 자료를 요구했습니다.
    정치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라던 랑시에르의 말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일’인 행정 덕분에 편리하게 삽니다. 그럼에도 정치는 방 안의 코끼리를 계속해서 말해야 합니다. 정치인은 말하는 사람이고, 보좌직원은 정치인의 말을 글로 돕는 사람입니다. 좋은 자료가 좋은 글을 낳듯이, 성실하고 시의적절한 자료요구는 좋은 의정활동을 낳는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2. 제가 작성한 질의서가 처음 읽힌 날은 2022년 5월 10일 새벽 1시였습니다.
    한동훈 법무부장관의 인사청문회를 위해 2만 자 분량 질의서를 작성했고, 딱 한 줄 읽혔습니다.
    “정부조직법의 법무부장관 의무가 뭔지 말씀해 보세요.”
    당시 함께 일하던 보좌관님께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와..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제가 쓴 질의서 읽으셨습니다 다듬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보좌관님 ㅠ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사청문회였지만, 제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의 그 뿌듯함은, 아마 평생 간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로, 당시 한 장관은 제대로 답하지 못했습니다)
  3. 제가 한 업무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직접 닿았던 건 2022년 8월 13일이었습니다.
    작년 여름 동작구에 물난리가 크게 났습니다. 지하 사무실에서 미래를 꿈꾸던 청년 사업가들의 터전과 재고가 모두 물에 잠겼습니다. 마침 근처에 자리한 모교가 떠올라 스승님께 염치불구 부탁을 드렸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흔쾌히 응해주셨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로운 일을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실의에 빠진 청년들은 잠깐이나마 학교에서 사업을 유지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장님들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일전에 신세많이졌습니다. ㅎㅎ 큰도움되었습니다.”
    이 뿌듯함도 아마 꽤나 오래 곱씹을 듯합니다.
  4. 제가 작성한 보도자료가 처음 기사화된 건 2022년 9월 2일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갑작스러운 대통령실 이전도 납득하기 어려운데, 대통령실에서 관련 정보를 은폐하려는 정황이 발견되어 이를 비판한 내용이었습니다. 만년 독자이던 제가 비로소 저자로 탈바꿈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꿈만 같아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후 국정감사를 거치면서 수 차례 보도자료를 작성했습니다. 그중에 몇 개는 나오고 몇 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기사화되지 않은 보도자료를 더 읽습니다.
  5. 제 보도자료가 처음으로 단독기사화된 건 2022년 11월 4일이었습니다.
    이태원참사 이후 모두가 혼란에 빠졌을 때, 참사 현장을 비춘 CCTV가 정상작동하고 있었다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기사였습니다.
    그날은 아주 빠르게 일이 진행됐습니다. 요구했던 자료가 도착하자마자 쓱 훑고 곧바로 보좌관님께 보고했습니다. 보좌관님께서는 “어, 이거 기삿거리 되겠는데” 하시고는 곧바로 기자에게 전달했습니다. 기자는 30분 안에 기사를 써내고 헤드라인에 [단독]을 붙였습니다. ‘손발이 맞는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처음 느꼈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자리에서 모두가 저를 축하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픔을 다룬 기사였으므로, 저는 마음놓고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6. 입사 이후 업무를 위해 처음 참고한 서적은,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었습니다.
    2월 18일 대통령 선거 유세 연설문을 준비하다가 토지공개념에 대해 공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도 수많은 책과 논문, 연구보고서, 기사를 읽었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읽고 글을 쏟아내느라 이미 휘발됐지만, 하나 남은 것은 있습니다. 바로, 학자의 읽기와 보좌직원의 읽기는 다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누구의 읽기가 더 낫고 못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읽어야 할 것을, 마땅히 읽어야 할 방식으로 읽으면 그만입니다.
  7. 스스로 제일 대견하게 여기는 것은,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짬을 내서 늘 책을 읽습니다. 아직 서툴지만 논문도 쓰고 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축적한 시간이 언젠가는 도움되리라 믿습니다.
  8.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인연의 끈을 놓지 말라던 스승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결코 놓지 말아야겠다 생각할 만한 사람들을 만난 건 커다란 행운입니다. 제가 가진 것에 비해 너무나 운이 좋았습니다.

외에도 미처 기억하지 못한 수많은 일이 있겠지요.
언젠가 문득 떠올리며 미소지을 듯합니다.
감사한 나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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