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스는 깊이다.
에토스는 행위의 축적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한 행위도 나의 에토스를 형성한다. 내 속마음과 몰래 한 짓은 아무도 볼 수 없지만, 에토스로 결국 드러나게 된다.
에토스는 친애를 가능케 한다. 친구 사이는 어쨌거나 타인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매개로만 가능하다. 필요에 따른 충족과 육체적 즐거움은 철저히 가시적인 것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친애는 에토스를 매개로만 가능하다.
성형수술에 우리는 왜 거부감을 느끼는가? 몸은 에토스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생활습관이 모습을 만든다. 지금 내 얼굴과 몸은 주로 짓는 표정, 취하는 자세, 섭취하는 음식의 결정체다. 그래서 우리는 관상과 골상학을 꽤나 들어맞는 말로 여긴다. 골상학이 선을 넘은 건 에토스가 아니라 퓌시스를 지적했기 때문이다. 관상도 마치 그러한 자연법칙이 있다는 듯이 타인을 설득하는 순간 신빙성을 잃는다. 몸은 퓌시스와 에토스의 혼합물이다. 둘 중 하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장애 역시 퓌시스와 에토스, 두 가지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장애는 기능을 잃게 한다. 장애를 당해 슬픔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퓌시스의 차원으로만 보는 장애는 무능 그 자체다. 그러나 우리는 장애인의 에토스를 본다. 주어진 고통을 의연하게 이겨내는 모습에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영웅적인 에토스는 제한된 퓌시스를 오히려 신적인 것으로 승화시킨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헤파이스토스를 보라.
성형수술이 퓌시스의 차원에 머무름을 인정하는 한, 우리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기능적 장애를 해소하고 의연하게 지내던 장애인에게 더 나은 퓌시스를 허락하는 건 전형적인 구원의 서사다. 그러나 성형수술이 퓌시스와 에토스 사이의 선을 뭉개고 에토스의 영역을 퓌시스의 영역으로 침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거부감을 느낀다. 장기간의 운동으로 충분히 만들 수 있는 몸매를, 지방흡입으로 단 며칠만에 만드는 것은 매력적이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거부감은 수사학적 거부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