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와 악어새는 만들어진 이야기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2권 68절에는 악어와 악어새 이야기가 나온다. 악어 입속의 거머리를 악어새가 먹어주는 대가로 악어는 악어새를 해치지 않는다는 모종의 약속을 서술한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사』 9권 6장에는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는 악어새가 악어 입속의 거머리를 먹는다기보다 악어에게 양치질을 해준다는 식으로 서술된다.

2012년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를 출간한 정준호 씨는 이 점을 지적한다. 바로, 기생과 공생 관계를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헤로도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저 거짓말로 여겨야 하는가? 현대인보다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미몽으로 보아야 하나? 생각해 볼 문제다.

기생이든 공생이든 함께 산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는 현상을 접한 사람마다 해석하기 나름이다. 악어와 악어새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물소와 할미새 이야기도 나온다. 할미새가 물소의 기생충을 잡아먹어주는 줄 알았더니, 물소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사안을 얼마나 자세히 그리고 총체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기생과 공생을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러므로 악어와 악어새 이야기는 실제 그들의 관계를 기술하는 이야기라기보다, 그 관계를 바라본 인간의 이야기라고 보아야 한다. 세계를 해석해 주변 사람에게 전하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외국인을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어 바르바로스(βάρβαρος) 개념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운다. 바르바로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다른 말을 쓰는 사람,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국인과 친구가 될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우정을 나누나? 개와 고양이는 언어가 달라 친구가 될 수 없다 한다. 자기 딴에는 우호적인 행동이라고 하지만, 그 행동이 서로에게는 무례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국인의 구분기준은 국경이 아니다. 언어를 매개로 정신이 서로 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동물은 인간보다 지능이 낮아 동물이 아니다. 인간과 언어가 달라 동물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와 기초적인 언어로 교감하는 개와 고양이, 기타 반려동물을 소중히 여긴다. 어떤 학자들은 돌고래와 침팬지가 나름의 언어체계를 갖추어 사회적인 생활을 한다고 믿고 있다. 정준호 씨는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에서 “박테리아나 기생충들조차도 일정 수 이상이 모이면 자신들만의 소통법을 통해 개체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적었다. 동물의 사례를 해석할 때에는 그 해석에 자기 관점이 투영되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사실 모든 상황에 대한 해석이 그러하다. 우리는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수많은 사건을 만들어낸다. 그 사건은 언어와 사물을 매개로 사실이 된다. 가장 원초적으로는 화석과 발자국, 동굴의 그림부터, 문자기록과 트랜지스터, 전자의 스핀을 이용한 SSD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건을 기록한 사실이다. 사실은 해석되며 해석자의 관점에 따라 무한히 변주된다. 관점 없는 사실 그 자체는 그저 사물이다. 해석자의 관점을 거칠 때 사실은 다시금 사건이 된다. 그런 점에서, 신과 같이 공명정대하고 중립적인 사실은 인간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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