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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휘바이든
2022년 9월 22일, MBC는 뉴스 한 꼭지를 보도합니다. 미국 순방 중이던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촬영한 영상이었습니다. 영상은 현재 616만이라는 조회수를 올리고 있습니다. ‘MBCNEWS’ 유튜브 채널에서 전체 14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순위권에 오른 대부분의 영상이 게시된 지 몇 년 된 영상인 점을 감안하면, 불과 3개월 된 동영상 치고는 꽤나 폭발적인 반응입니다.
윤 대통령은 동행하던 사람들에게 뭐라 말했을까요? MBC뉴스 제작진은 이렇게 들은 듯합니다.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때마침 직전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연설을 마친 뒤였습니다. 저개발국의 질병 치료를 지원하기 위해 조성된 ‘글로벌펀드’에 미국이 10억 달러를 먼저 기부하고, 의회의 승인을 받아 60억 달러를 더 기여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백악관 공식 미국 대통령 발언 속기록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MBC뉴스의 보도를 기반으로, 윤 대통령의 말을 정황에 맞게 그리고 무례하지 않게 다시 풀어보면 이런 말일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몇십 억을 기부하겠다고 저렇게 호언장담해도, 미국 대통령제에서는 의회가 승인 안 해주면 그렇게 못할 텐데. 그럼 거짓말한 꼴이 돼 부끄럽겠다.’ 윤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 요지와 미국 대통령제를 정확히 이해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친 표현이 문제였습니다. 외신의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도전문채널 폭스 뉴스(Fox News)에서는 MBC뉴스와 대동소이하게 윤 대통령의 발언을 보도했습니다. “새끼들”을 “f—ers”로, “쪽팔려서”를 “lose damn face”라고 옮긴 겁니다. 2022년 기준, Fox 뉴스는 20년 연속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최대 뉴스 채널이었습니다. 같은 뉴스를 비슷한 논조로 CNN에서도 보도했습니다. “새끼들”을 “f***ers”로, “쪽팔려서”를 “embarrassing”으로 옮겼습니다. CNN은 폭스 뉴스 다음으로 시청률 순위 2위를 기록한 언론사입니다.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에서도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새끼들”을 “idiots”로 번역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2022년 기준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이어 전세계 디지털 구독자 수 3위로 추정되는 유력 일간지입니다.
옥스포드 사전에 따르면, “fuckers”와 “idiots” 모두 모욕적인(offensive)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fuckers”는 금기시되는(taboo) 비속어(slang)입니다. 물론 폭스 뉴스와 CNN의 검열로 인해 “f—ers”와 “f***ers”가 “fuckers”를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요.
외교적 부담이 우려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실은 15시간 만에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해명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새끼들”이라는 욕설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 의회를 향한 게 아니라, 우리나라 국회를 향한 욕설이었다고 둘러댔습니다. 특히, 바이든은 언급도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실의 주장에 따라 윤 대통령의 발언을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대한민국이 1억 달러를 기여하겠다는 정부안을) 승인 안 해주고 날리면 (내가) 쪽팔려서 어떡하나” 그 근거로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대한민국이 글로벌펀드에 1억 달러를 기여할 것이라고 윤 대통령이 발표한 점을 제시합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대통령실이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속기록을 공개하지 않고 있어 그 근거가 적절한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윤 대통령의 표현에서 논란이 되는 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이 새끼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였고, 다른 하나는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였습니다. 첫 번째 논점에 대해서는 MBC의 해석도, 대통령실의 해석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던 듯합니다. 물론 어느 방식으로 해석하더라도 대통령이 해외 순방이라는 공적 행사에서 욕설을 사용한 건 부적절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지만요.
그러나 두 번째 논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대통령실의 해명 이후 ‘날리면’으로 들린다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MBC의 보도와 대통령실의 해명 이후 실시된 복수의 여론조사에서도 3분의 1가량의 사람들이 ‘바이든이 맞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날리면이 맞다’고 응답했습니다. 여론조사 응답으로만 보면 2대 1이니 “바이든”으로 결정해야 할까요? 사람의 발화를 다수결로 해석하는 꼴이 우습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전문가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음성학 권위자들은 응답을 거부했습니다. 선입견이 형성된 상태에서 정확한 음성 해석은 어렵다는 겁니다. 소음도 제거해보고 여러 번 돌려보고, 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써봤습니다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이든’이 맞을까요, ‘날리면’이 맞을까요? 그보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왜 일어난 걸까요?
무지개에서 빨간색을 고르시오
철학적으로 윤 대통령의 말을 둘러싼 사건은 꽤나 중요합니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반언어학’이라는 이름의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에서 소쉬르는 언어를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바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입니다.
랑그는 사회적인 언어입니다. 어휘나 문법이 대표적인 랑그의 예입니다. 반면, 파롤은 개인적인 언어입니다. 랑그에 따라 개인이 내는 소리가 파롤입니다. 말로 사과를 가리키려면 ‘사과’라는 소리를 내야 한다는 게 랑그라면, 제가 실제로 목소리를 내서 ‘사과’라고 발음하면 그게 파롤입니다. ‘사과’라는 발음을 들으면, 상대방은 사과를 떠올립니다. 송신자와 수신자가 동일한 랑그를 공유한다는 전제 아래 그렇습니다. 아무리 같은 랑그를 공유한다 하더라도, ‘사가’라든지 ‘서과’처럼 발음하면 상대방은 사과 말고 다른 생각을 떠올릴 겁니다. 마찬가지로, 영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apple’을 들으면 사과를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의 파롤에는 ‘apple’이 포함될 겁니다. 랑그와 파롤은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언어를 구성합니다.
‘사과’를 발음하는 이상적인 발음이 있을까요? 파롤은 개인적인 언어입니다. 모든 사람의 생김새가 서로 다른 것처럼, 모든 사람의 발성기관은 다를 것이고, 이로 인해 사람마다 발음하는 ‘사과’라는 소리는 모두 다를 것입니다. ‘apple’과 ‘사과’의 차이 못지 않게 사람마다 발음하는 ‘사과’는 서로 다릅니다. 저의 ‘사과’는 시옷에 가까운 발음으로 시작하는 ‘사과’겠지만, 노홍철 씨의 사과는 쎄타(θ, th)에 가까운 발음으로 시작하는 ‘사과’일 테니까요. 우리는 저마다 이상적인 ‘사과’를 떠올리지만, 그런 발음을 실제로 들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언어활동을 하는 모두의 정신에는 이상적인 ‘사과’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사과’의 이상적인 발음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소리가 끊임없이 겹쳐 들리는 자연의 소음으로부터 누군가 ‘사과’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구분해냅니다. 우리는 ‘사과’를 들을 뿐만 아니라 ‘사과’라는 지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찾아나섭니다. 사과의 이상적인 모습은 가장 비현실적이지만 가장 정신적이며 가장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소쉬르는 자신의 강의에서 랑그의 언어학만 다루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일반언어학 강의’이라는 이름으로는 일반적이지 않은 파롤을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나 봅니다.
그런데 파롤은 그렇게 무시할 수만은 없는 현상입니다. 언어는 파롤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랑그가 머릿속에 떠올린 삼각형이라면, 파롤은 실제로 우리가 그린 삼각형 비스무리한 모양에 해당합니다. 랑그가 빨간색이라면, 파롤은 무지개와 같습니다. 스펙트럼에서 빨간색을 가리키라고 하면, 저마다 다른 색을 고를 겁니다. ‘하늘 아래 같은 핑크는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다만, 빨간색을 가리키라는 요청에 수많은 사람이 가리키는 색은 대동소이할 겁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빨간색은, 사람마다 다르게 가리키는 바알간색, 검붉은색, 시뻘건색 등등으로밖에 세상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순수한 빨간색은 허구이자 상상일 뿐입니다. 현실에서 ‘빨간색’이라는 말에 대응되는 색은 빨갛다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색들의 집합, 즉 스펙트럼입니다.

파롤로서의 빨간색은 상대방의 동의로 확인됩니다. ‘저는 이 색도 빨간색으로 보이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이 색은요?’ ‘그것도 빨간색이지요.’ 이 세상에서 빨간색은 나와 상대방 사이의 무한한 확인 과정으로 만들어집니다. 만약 파란색을 가리켜 빨간색이라 일컬으면 어떻게 될까요? ‘혹시 잘못 고르셨나요?’ 사람들은 그 색이 빨간색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줍니다. 거부함으로써 교정해주는 것이지요. 줄타기 장인이 양 팔을 흔들어 균형을 잡는 것처럼, 나의 무지개와 상대방의 무지개는 끝없는 긍정과 부정으로 균형을 잡으며 빨간색을 찾아 나갑니다. 다시 말해, 나의 머릿속의 빨간색은 너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의 빨간색으로 실현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습니다. 무지개 안에서 빨간색이 모호한 만큼, 사람들과의 확인 과정도 모호합니다. 주황색과 빨간색 사이의 묘한 색을 빨간색이라 가리키면, 몇몇은 동의하고 몇몇은 반대할 겁니다. 반대하는 몇몇 중에도 몇은 교양있을 테지만 몇은 무례할 겁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그 모호한 경계에서 발생합니다. 나는 분명 이게 빨갛게 보이는데, 상대방은 그게 아니랍니다. 외려 상대가 빨간색이랍시고 가리키는 색은 가관입니다. 도저히 빨간색이라고 할 수 없는 색이 빨갛답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 논쟁도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바이든 파와 날리면 파 둘 중 하나가 허튼 소리를 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