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에 부쳐야 할 것들

왜 연봉은 비밀에 부칠까

여러분의 회사는 안녕하신가요? 위에 인용된 기사처럼, 모든 사람의 연봉이 공개된 회사를 상상해봅시다. 누구는 얼마 받고, 누구는 얼마 받고 속속들이 다 아는 그런 회사 말입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도시괴담인가 싶겠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닙니다. 우선 회계부서에서 급여를 담당하는 분은 모든 사람의 연봉을 알고 있습니다. 회계부서장 또는 운영 임원도 직원들의 연봉을 알아야 할 것이고요. 사장은 누가 얼마를 받는지 반드시 알고 있을 겁니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실수를 하면 누가 얼마를 받고 다닌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됩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도 타인의 연봉을 알게 되어 한바탕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냥 괴담만은 아닌 일인 거죠.

연봉이 속속들이 공개된 회사는 천국일까요, 지옥일까요?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타인의 평가가 수반됩니다.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인 회사에서는, 사람들의 평가를 수단 삼아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도록 닦달합니다. 평가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돈과 인정입니다. 돈과 인정은 가치와 우정을 교환하는 공통분모입니다. 사업자는 직원의 실적에 따라 이익을 나누어줍니다. 회사의 구성원은 서로를 보고 평판을 형성합니다. 만약 연봉이 공개된다면 연봉을 둘러싸고 그와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평판이 형성될 겁니다. 이렇게 일하는데 저렇게 주는 사장, 저렇게 일하면서 이렇게 받아가는 동료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겠지요. 이런 회사에서 우정이 제대로 꽃필 수 있을까요? 참고로, 모든 팀워크는 우정을 전제합니다.

비밀 없는 우정이라는 신화

비밀이 없어야 우정이 싹튼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우정은 철저한 비밀을 기초로 합니다. 우정은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입니다. 관계를 유지하기에 가장 좋은 태도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결코 네가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는 네가 원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상대방은 불쾌해지기 십상입니다. 나의 욕망과 충동을 잠시 접어두고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절제가 배려의 첫걸음입니다.

배려는 침묵에서 비롯됩니다. 침묵은 비밀을 만들고요. 비밀의 다른 모습은 절제라고도 불립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란 두 아이를 생각해볼까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와 찢어지게 가난한 집 자식은 친구가 되기 매우 어렵습니다. 서로가 수다스럽게 모든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면 둘 중 하나는 불쾌해질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두 아이는 물려받게 될 재산만큼이나 다른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밥상머리 예절부터 부모가 주로 쓰는 말을 따라 배운 말투까지 모든 면에서 다를 겁니다. 이렇게 다른 두 아이가 오랜 친구로 남기 위해서는 서로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부모에게서 배운 예절과 말투 말고, 친구를 위한 예의와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 예의와 언어를 사용하는 목적은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조금이라도 망가지면 우정은 사라집니다.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보이지 않게 볼일을 보는 배변문화 안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급하다고 누가 있든 거리낌없이 싸버리면, 상대방은 배려받지 않았다고 느낄 겁니다. 당장 제 앞에 누가 똥을 싸면 저는 그렇게 느낄 테니까요. 그런 관계에서 우정은 없습니다. 속의 일은 속의 일로 제한해야 겉의 일을 침범하지 않습니다. 그 핵심은 분별 있는 비밀입니다.

물론 배려와 위선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내 마음을 숨기고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에서 위선과 다를 게 없거든요. 배려를 두고 위선이라 하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왜 똥오줌을 지리지 않느냐고, 지금 하는 짓은 위선이라고 나무란다면, 반박하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누구나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기도 합니다. 우리 머릿속은 생각보다 불결하고, 불경하고, 추잡하고, 추악합니다. 솔직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런 것들을 모두가 보는 앞에 드러내야만 할까요? 저는 그런 세상이 싫습니다. 차라리 위선을 택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세상은 인간의 세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회사가 각자의 연봉을 비밀의 영역에 두는 건 배려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정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드러내지 않는 속마음

사람들이 가장 솔직해지는 때가 언제일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 고해성사를 위해 고해소에 들어가 있을 때? 제 생각에는 인터넷 검색을 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검색기록은 잘 드러내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 같거든요.


2022년 올해의 검색어. 구글트렌드 제공.

구글 트렌드에서는 올해의 검색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태원 사고”라는 키워드가 종합 5위에 올랐네요. 확실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검색했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싶어서 구글 검색창에 “이태원 사고”를 입력한 것일까요?


“이태원 압사” 키워드에 대한 관련 검색어. 구글트렌드 제공.

사람들은 참사의 현장이 궁금했나 봅니다. 그런데 관련 검색어를 보니, 참사라는 사건보다 그 현장의 충격적인 이미지가 더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호기심은 아주 깊은 이성적 추론을 통해 도출해낸 호기심이 아닙니다. 단지 생명이 사라지는 희귀한 장면을 보고싶은 원초적인 호기심입니다. 실제로 참사 현장이 적나라하게 유포되어 문제가 크다는 지적도 언론에서 다수 제기됐습니다. 인물검색 1위를 차지했던 아베 신조의 경우에서도, 가장 관련이 깊은 검색어는 “아베 총격 영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광경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이 마음은 음란물을 시청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음란물을 애청합니다.

“porn”, “philosophy”, “politics”, “biden” 키워드에 대한 검색어 비교. 구글트렌드 제공.



“야동”, “철학”, “정치”, “윤석열” 키워드에 대한 검색어 비교. 구글트렌드 제공.

솔직한 면모는 성과 관련된 검색어에서 더욱 적나라합니다. 시간 흐름에 따른 관심도 변화 그래프에서 세로축의 숫자는 검색 빈도를 의미합니다. 50이 평균이고, 100이면 가장 많이 검색했다는 뜻입니다. 음란물을 의미하는 “porn”과 “야동”은 365일 내내 검색 빈도가 평균 이상에 위치해 있습니다. 심심치 않게 100도 기록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반면, “철학(philosophy)”, “정치(politics)”, 유력 정치 지도자(전세계 기준 “Biden”, 국내 기준 “윤석열”) 검색어는 연중무휴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윤석열” 키워드는 대통령이 당선되던 시기인 3월에 반짝 25를 기록합니다. 그마저도 “야동”의 3분의 1 수준입니다. 그 후로는 별 볼일 없습니다.

사람들의 솔직한 마음은 이렇습니다. 남 눈 앞에 고상해보이는 철학보다, 정치보다, 야동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밖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주제 중에 음란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많던가요? 오히려 저는 철학, 정치, 윤석열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눕니다. 아, 물론, 제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을 더 많이 하는지는 비밀로 두겠습니다. 여러분과 저와의 우정을 위해서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구글트렌드는 왜 2022 올해의 검색어에 “야동”을 올리지 않았을까요? 공정한 기준에 따르면 야동은 단연 1위를 차지했어야 마땅할 텐데요. 야동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10월에도, 이태원 참사보다 더 많이 검색된 키워드입니다. 우리는 구글의 검열 아래 예속된 걸까요?

안과 겉

프랑스의 자랑 알베르 까뮈는 1937년 『안과 겉』이라는 에세이집을 출간합니다. 그 안에는 동명의 짧은 에세이가 한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내용 일부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성격이 유별난 할머니 한 명이 살았습니다. 가족이 죽어 꽤나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습니다. 그 돈을 어디에 투자할까, 하다가 스스로 조만간 들어가게 될 무덤 하나를 계약합니다. 할머니는 인부를 불러 자기 이름을 새기고 무덤을 꾸밉니다. 처음에는 그 무덤이 잘 꾸며지나 확인하러 가보다가, 나중에는 습관처럼 무덤에 갑니다. 시끄러운 바깥보다 고요한 무덤에서 더 큰 기쁨을 느낀 것이지요. 할머니는 그 안에 들어가 기도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그런데 한날 기도를 마치고 무덤 밖으로 나오는데, 입구에 꽃 몇 송이가 놓인 게 아니겠어요? 그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이름 없는 무덤인 줄 알고 연민을 느껴 헌화까지 하고 간 겁니다.

할머니의 무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헌화를 받다니, 기묘하지 않나요? 까뮈는 이렇게 씁니다.

“한 사람은 관조하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무덤을 판다. (중략) 나는 나의 모든 몸짓을 통해서 세계에 연결되어 있으며 나의 모든 연민과 감사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연결되어 있다. 세계의 이 안(裏面)과 저 겉(表面) 중에서 나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고 또 남이 선택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까뮈의 생각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두 세계가 있습니다. 안과 겉이지요. 속마음(관조)은 죽음과 같아서 타인과 결코 공유할 수 없습니다. 반면, 겉은 몸짓과 연민, 감사로 타인과 연결된 공간입니다. 모든 것을 공개하자는 주장은 이 안을 저버리고 저 겉을 선택하자는 주장입니다. 그런 선택은 저 겉을 버리고 이 안만 선택한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속마음이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겉모습이 아무리 죽음에 취약하다고 하더라도, 이 안과 저 겉에서 동시에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는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시 굴러떨어질 걸 알면서도, 행복한 마음으로 돌을 굴려 올라가는 시지프의 마음이지요.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속마음과 겉모습 사이를, 비밀과 공유 사이를 갈팡질팡하더라도 고통스럽지만은 않을 겁니다.

속마음과 겉모습의 경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속마음을 속에만 두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주워 들은 비밀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은 충동이 얼마나 강한지는 우리 모두가 알잖아요. 게다가 나의 유불리에 관한 일이라면 그걸 속마음에만 묻고 숨기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내 안에만 담아두어야 할 이야기만큼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 이익을 과도하게 추구하거나 타인의 속사정에 너무 깊은 관심을 가지면, 다시 말해 내가 나밖에 모르면,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를 할 기회를 잃고 맙니다. 사람들이 저를 믿지 못하게 되거든요. 사람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결국 제 이익을 증대하거나 고통을 경감하는 데에만 의도가 있다고 믿을 겁니다. 그 믿음이 한번 들어서면,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 언론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경고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습니다. 까뮈의 「안과 밖」 역시 그 경고와 유사한 듯합니다. 회사에서 모두의 연봉을 공개하면 아마 모두가 그에 대해 떠들어 대느라 어떤 일도 완성되지 못할 겁니다. 대중 매체가 어떤 심의나 검열도 없이 인간의 속마음을 겨냥한다면, 결국 매스컴은 거대한 포르노그라피로 전락하고 말 것이고요.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밀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슈를 공중에 드러낼지, 어느 이슈를 감출지 결정하는 역할은 언론이 담당합니다. 그래서 언론이 중요합니다. 이건 중립성이나 공정성의 문제 이전의 문제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러분의 회사는 안녕하신가요? 여러분은 누가 얼마를 받느냐에 혈안이 되어 해야 할 일을 멀리하고 계시지는 않은가요? 배려에는 적절한 비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에는 과연 드러나야 마땅한 것들만 드러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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