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만큼 중요한 사내정치

“재영 씨는 정치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왜 사내정치에는 둔해요?”

얼마 안 되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들은 말이었습니다. 작은 스타트업에 다니던 시절, 같은 팀에서 일하던 팀원 한 분(아마 직급체계가 잡힌 대기업이었으면 쳐다도 못 볼 대선배였을 겁니다)께서 제게 핀잔 아닌 핀잔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회사생활을 하면 좋은 회사원이 될 수 없으리라는, 저를 생각하는 마음에 부러 꺼내신, 쓴소리였을 겁니다.

실제로 저는 정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한 정치까지 지켜볼 만큼 ‘정치’라는 현상을 저는 흥미롭게 여기고, 심지어는 ‘정치’철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까지 받았죠. 그런데 유독, 사내정치에는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근무시간에 웃으며 함께하는 분들을 위선, 모략, 암투, 모함으로 얼룩진 시각으로 보다니! 예의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 자기 이익을 좇는 게 썩 쿨해 보이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저는 제 뜻대로 했습니다. 곧 죽어도 바른 말, 옳은 소리,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제 판단과 얽힌 수많은 이해관계자의 반응은 봐도 못 본 척하곤 했지요. 심지어 결정권자의 의중도 제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 데이터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 입사 전후 대표의 설명으로 제가 이해한 회사의 비전, 스타트업의 초기 멤버라는 자부심이 저를 움직이는 힘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요소를 고려해 회사의 이익보다 제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으로 동료들에게 ‘비칠’ 것을 저는 두려워했습니다. 저의 유별난 도덕관이 사회초년생의 비장함과 뒤섞여 매일 아침 순교하는 마음으로 출근하기도 했습니다. ‘여긴 스타트업이다! 나는 회사의 기둥이다! 나의 선택이 회사와 모든 동료들의 미래를 좌우한다! 으아아아아!’ 당시의 제 마음가짐을 묘사하면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요? XD

몇 년이 흐른 요즈음도 같은 마음가짐을 갖고 사냐 물으신다면, 저는 이른바 ‘속물’이 됐습니다. 현실에서 순수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순수한 악행만큼이나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이제 저는 잘 새기고 삽니다. 물론 이 교훈은 경험으로 얻었고요. 제가 아무리 선을 추구하더라도 제가 한 일이 다른 사람이 한 일과 뒤섞여 나쁜 결과를 낳는 모습을 보았거든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삽니다. 살아가는 사람의 수만큼 수많은 시각이 세계를 비추고, 그만큼 많은 선과 악이 세계에 공존합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수많은 해석을 낳는 것처럼, 우리의 손을 떠난 모든 일은 우리의 목적과 다르게 움직입니다. 이 자명한 사실을 저는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정치철학을 업으로 삼다가 한 발짝 물러서 취미로 삼으니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사내정치는 정치만큼 중요합니다. 우리가 정치인을 보고 응원하거나 욕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거나 분에 넘친 사람들을 나무라고, 내 뜻에 맞는 사람들과 연대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맞서는 일만큼, 사내정치는 중요합니다.

행위로 비친 의도는 우리가 품은 목적과 다르게 해석됩니다. 여기서 겉과 속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한데요. 겉모습은 누구에게나 드러나지만 속마음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습니다. 행위, 의도, 목적 중에 겉에 드러나는 건 행위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행위를 하기 전에 속마음으로 목적을 세웁니다. 목적에 따라 한 행위는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제 행위를 보고 속마음으로 제 의도를 파악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종의 불일치가 발생합니다. 제 마음속에 세운 ‘제 행위의 목적’과 타인 마음속에 떠오른 ‘제 행위의 의도’는 대체로 일치하지 않거든요. ‘이심전심’이나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는 말은 신화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이 제 목적을 이상한 의도로 오해하기 십상이니까요. 오히려 마음이 통하는 상황이 더 기적 같은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내정치가 발생하는 이유는, 바로 이 불일치, 즉 목적과 의도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속마음은 결코 겉모습이 될 수 없다는 진리 때문이지요.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의도로 비춰질지 염려합니다. 더군다나 제 이익이 타인에 달려 있다면, 이 염려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 될 겁니다. 제 목적은 이미 중요하지 않죠. 제가 아무리 좋은 뜻으로 일한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다른 사람이 제 의도를 나쁘게 해석하면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걸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위선은 기본, 사기는 옵션이 됩니다. 목적과 의도가 어긋나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모종의 게임처럼 대합니다. 타인으로 하여금 내 의도를 좋게 해석하도록 만들면 좋은 점수를 얻는 게임이지요. 우리의 목적과 의도를 완전히 일치시킬 수 없으니,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위선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목적이 아무리 악한들 타인이 좋게 해석하도록 만들면 되니 사기도 능력으로 인정받을 여지가 생기는 것이고요. 이 게임에 심취한 사람은 내 이익에 대한 영향력을 덜 가진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됩니다. 소위 깍두기에게는 민낯을 드러내더라도 이 게임의 핵심 플레이어, 알파 메일, 최종 보스에게 잘 보이려는(우리가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말로 ‘잘 보이려 한다’는 말을 괜히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거죠. 이른바 속물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속물, 위선, 사기를 나쁘게만 보아야 할까요? 물론 사기범죄를 무작정 옹호하자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 그래도 시사점은 있습니다. 형법상 고의는 목적이 아니라 의도입니다. 공정한 재판을 통해 결론이 난 사건이라도 피의자의 고의는 실제 피의자가 마음속에 가졌던 목적이라기보다는 법관이 해석한 피의자의 의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해석하는 타인의 의도는 모두 우리 나름의 해석이지 그의 목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겉모습을 보고 의도를 추론하는 법관과도 같다는 것이지요. 누군가의 행위를 두고 위선이라 덮어놓고 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애초에 위선은 인간의 행위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이기도 하고요.

이제 우리는 사내정치를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내정치도 정치의 일종이니까요. 정치는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서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여러 사람이 서로 교류하는 이상 겉과 속 사이에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스튁스 강처럼 결코 건널 수 없는, 경계가 버티고 있을 테고요. 한자어 회사(會社)에 담긴 뜻처럼,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서 정치는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순수한 이념을 실현해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하는 일을 정치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타인이 해석한 내 의도를 내 속마음에 간직한 목적과 완전히 일치시키려는 태도로 회사생활에 임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살아가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빗발치거든요. 타인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사내정치는 바로 이 문제와 직결된 현상이고요.

여러분의 회사생활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정치 문제만큼이나 사내정치 문제에 적절하게 관심을 갖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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