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물건이 아니라서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꼼짝 않을 수 있는 건 도마 위의 생닭뿐이다. 인간이 모여 만든 것들도 그러하다. 어쭙잖은 동아리부터 시작해 국가, 국제연합까지. 상황에 따라 인간은 다르게 행한다. 인간의 일에 한해서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 있다.
그렇다고 도덕이나 윤리, 정치가 아무짝에 쓸모없는 건 아니다. 견고한 기준이 없다고 손놓을 게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해서 그 기준을 쌓아 나가야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함수처럼 대신 산출해주는 그런 법칙은 없다. 무엇에도 의존할 수 없다. 당신의 정신에 달린 일이다. 내가 옳다 생각하면 옳은 거고 그 판단의 책임은 내가 질 몫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상황을 고려하자는 거다. 상황을 떼어놓고 보면 무엇도 이해할 수 없다. 행위만 볼 것이 아니라 상황도 보아야 한다. 상황만 보아서도 안 되고 행위와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 행위자가 보인다. 소설에서도 입체적인 인물이 등장해야 재밌다.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당연히 복잡하고 번거롭다. 그래서 더 생각해야 한다. 운동과 마찬가지다. 힘들수록 도움된다. 더 잘하게 된다.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들이 있을까? 인간은 언제나 한 가지 모습만 갖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 예컨대 도덕과 정치를 섞어버리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 중에도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 몇 있다. 통계자료를 가지고 생각하기보다 자료에 담긴 숫자 그 자체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보다, 마치 스포츠 중계하듯이 통계적인 용어로만 해설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무섭다.
생각하자. 생각으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듯이 생각하자. 동시에 겸손하자. 생각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