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서 상대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은 용인될까? 거짓말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른바 네거티브다. 없는 사실을 말하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감추고 싶어하는 것을 굳이 공개적으로 말하는 모습이, 상대의 약점을 잡고 늘어지는 모습이 정치인에게 바람직한 모습일까?
일단, 네거티브는 도덕적이지 않다. 모든 사람이 서로 치부 드러내기에 몰두하는 세상은 끔찍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춘 것을 드러내면 그것은 더 이상 감춘 것이 아니게 되고 그러면 공개된 것과 감춘 것의 경계, 나아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가 사라지게 된다. 모든 사람이 네거티브만 일삼는 세상에서는 네거티브라는 행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모든 것이 샅샅이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세상에서 비밀은 없다. 우리가 언론을 통해 네거티브를 일삼는 정치인을 보고 왠지 꺼리는 마음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네거티브는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다. 네거티브는 사람들에게 ‘어라, 그러면 안 될 텐데’하는 마음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정치는 도덕이 아니다. 정치는 드러난 것들로만 가능하다. 반면, 도덕은 다른 이에게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질 때에만 가능하다. 정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지만, 도덕은 나와 나 자신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가령 봉사활동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동네방네 소문내며 봉사하지 않는다. 봉사활동은 남 모르게 수행할 때 빛을 발한다. 그런데 정치인의 봉사활동은 수많은 사람들과 카메라를 대동하는 게 숙명이다. 정치인에게는 부고 빼고 모든 뉴스가 이득이다. 대중에게 알려져야만 살아남는 인간이 정치인이다. 그런 자들에게 묵묵한 봉사활동을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도덕적인 행위여도 대중에 공개되면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 선행이 우연히 공개된 것인지, 고의로 공개한 것인지를 따진다. 도덕이 그 순수함을 잃지 않고 동료 시민들에게 드러나는 경우는 행운에 의존하지만, 드러난 대부분의 선행 중에 순전히 운이 좋아 드러나는 경우가 그렇게 흔치는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행위는 나를 보는 동료 시민을 전제하는 행위이지만, 도덕적인 행위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상황일 때만 가능하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치는 수많은 시민들의 다양한 해석 아래 놓여 있지만, 도덕은 나만의 단일한 해석만 가능하다. (기껏해야 신이나 미래에 거듭난 내가 시도하는 새로운 해석까지 포함해 두 가지 해석만 가능하다. 지금 논의하기에는 너무 큰 주제다) 도덕적인 인간이 보기에 정치는 언제나 타인의 의도를 의심하고 곡해하는 야만의 공간이다. 선과 악이라는 명확한 기준은 나 홀로 있을 때에나 작동한다. 여러 사람이 끼어들면 어떤 일이든 칼로 베듯이 간단히 판단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반면, 정치 한복판에 사는 인간에게 도덕적이기만 한 인간은 오만하다. 도덕적인 인간은 다른 모든 이의 해석을 무시하고 자신의 해석만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러 시민들이 모여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그 의견들이 또 각각 나름대로 말 되는 의견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선과 악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반드시 억울함을 느끼는 시민들이 발생한다. 이 모든 현상은 정치와 도덕이 결코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한다. (한 가지 더, 모든 사람은 홀로살 수 없기 때문에 순전히 도덕적인 행위는 있을 수 없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나의 행위를 목격한 사람이 사망한 경우이다)
그렇다고 정치가 비도덕적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 물론 정치는 도덕이 아닌 행위여서 비-도덕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겠으나, 통상 비도덕적인 행위는 도덕적인 기준에서 악한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악한 행위가 아니다. 정치는 마키아벨리에 씌워진 오명처럼 비열하고 잔인한 행위도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기준으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섣부르게 선과 악으로 갈라놓는 게 오히려 더 비열하고 잔인하다.
그러면 모든 정치적 행위는 도덕적인 판단의 그늘에서 벗어난 걸까? 그것 역시 동의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 옳다거나 그르다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의견에 동료 시민들이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건 둘째 문제이고, 바로 그것이 정치이지만, 모든 의견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거쳐 제기된다. 도덕적 판단은 그리 거창한 게 아니다. 거리낌을 느끼는 게 도덕적인 판단이다. 거리낌은 흔히 ‘쎄하다’고 표현하는 기분이나 분위기, 혹은 느낌일 뿐이어서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거리낌을 느끼는 능력, 즉 도덕적인 성품은 타고나는 것이고 교육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공격적인 사람이라 부르는, 태생적으로 거리낌이 없는 듯 행동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성품은 가정에서 부모의 모습을 보고, 사회에서 선생들의 모습을 보고 배워 형성되기도 한다. 관습은 한 사람의 수명을 넘어 여러 세대를 거쳐 오랜 기간 축적된 행동양식이다. 관습에 어긋나는 행동이 거리낌을 자극한다. 그게 나의 행동이든 다른 이의 행동이든 관계없이 모든 행동이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최소한의 도덕이 있어야만 정치가 가능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정치는 단순한 난상토론이 아니라 실천을 전제한 의견 교환이다. 쉽게 말해 정치는 약속이다. 약속은 약속 맺기와 약속 지키기로 구성된다. 약속을 맺는 일은 언제나 타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정치적이다. 다른 인간에게 미래 어느 시점에 어떤 행위를 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할 때에만 약속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는 행위는, 약속을 맺은 과거의 나와 약속을 지키려는 현재의 나 자신을 일치시키는 행위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행위는 거짓말이 된다. 어떤 말이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여부는 약속을 맺는 시점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는 시점에 결정된다. 다시 말하지만, 도덕은 나와 타인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 자신의 관계다. 약속을 지켜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일치시키려는 최소한의 도덕은 나와 동료 시민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감춘 것이 있어야 드러내는 일이 가능하다. 모든 것을 드러낸 사회는 모든 것이 감추어진 사회만큼 끔찍할 것이다. 우리는 네 벽과 지붕이 숨겨주는 집이 있어서 인간일 수 있다. 사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집에 누구도 살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적인 것이 있을 때에야 공적인 것이 가능하다. 감추어야 공개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좀 더 나아가면, 약속을 지키는 일도 도덕적이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정치에서 네거티브는 용인되어야 하는가? 정치는 네거티브를 포섭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정치인이 “나는 결코 네거티브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면, 네거티브는 용인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네거티브는 정치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그런 약속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상대가 감춘 것을 동료 시민들에게 드러내는 편이 그들의 더 나은 판단에 도움을 주리라고 믿는다면, 네거티브는 용인되어야 한다. 단지 스스로의 다짐 수준에서 네거티브를 하지 않겠다 맹세한 것이라면, 혼자 있을 때 후회될 수 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더라도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논의한 네거티브는 흔히 아는 네거티브와 다르다. 단지 상대를 낙선시키기 위한 네거티브라든지, 동료 시민들의 판단과는 결코 무관한 네거티브 말이다. 그건 양심에 털이 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이라기엔 과분한 사람들이다.